프리 스타일 최승호
critic & column | 2006/08/29 11:43
프리 스타일 최승호
예술가의 기질과 예술작품의 관계는 길항관계인 것 같지만 어떤 알고 보면 별무관계인 경우도 많다. 비슷한 기질을 가진 작가라도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예술이란 삶을 헤아리는 너그러운 시선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관통하는 카랑카랑한 시선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최승호는 전자에 매우 가까워 보인다. 그는 그리 팍팍하게 세상을 살지 않는 작가이다. 삶이 그러하거니와 그의 작품도 비어있는 구석구석에 사람의 흔적을 묻혀놓고 있다. 정밀한 구조틀로부터 작품을 뽑아내는 작가가 아니라 커다란 윤곽 속에서 흐릿한 틀을 잡고 그 속에서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거대하게 자신의 감각을 담아내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꽊 짜여진 틀을 가지고 정교하게 엮어나가는 완고한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는 설렁설렁 하면서도 그 속에 구조의 미와 섬세함을 동시에 담아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대화를 엮어 나가는 폼새에서도 그의 너그러움은 작품들과 유사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최승호는 ‘폼잡는 작품’의 외형으로 다가오기보다는 ‘부드러운 인간’의 품성으로 다가오는 예술가이다. 몇 해 전 경기문화재단에서 경기도 지역의 중견과 중진 작가들을 조망하는 <기전미술 2004>에서 그의 작품을 만났을 때, 함석판으로 만든 커다란 입체조형작품들을 접하면서 1990년대 한국미술의 역사 한 페이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듬해에 <일산오픈스튜디오> 기간에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나서야 그의 면면을 제대로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실 한 켠 의자 위에는 커다란 스폰지 덩어리를 깎아서 만든 곰돌이 인형이 놓여있었다. 중년의 조각가에게 스폰지라는 재료가 낯설어 보인 탓도 있지만, 곰돌이 인형 같은 키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감성에 묘한 매력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곰돌이를 카메라에 담아 내 블로그에 올려놓았다. 알고 보니 나는 그의 작품을 오래전부터 자주 접했었다.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 마무리 되어가던 무렵에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그의 옛 작품집을 받아들고 표지를 넘기는 순간 제일 앞에 나온 작품 사진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다. <접근식>(1983)이라는 작품 때문이었다. 10수년전부터 익히 보아오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장방형의 판재를 떠받히고 있는 원들의 연쇄결합구조를 가진 이 빨간 기하학적인 추상 작품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홍익대 B동 입구를 지키고 서있던 바로 그 작품이었다. 너무나 눈에 익은 작품의 주인공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났을 때의 생경함이란.
같은 제목의 연작들을 만들어낸 20대 후반의 최승호는 사각형과 원을 가지고 몇 가지 작품을 더 남겼다. 하지만 나는 기억속의 그 작품과 그 작품의 창작자를 연결시키는 정보를 습득한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양자간의 관계를 접목시키고 있지는 못하겠다. 그의 작품이 기하학적 추상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인쇄물을 통해서 하나의 역사적 자료로서 따로 기억할 뿐이다. 하여 나는 젊은 날의 최승호가 만든 저 사각형과 원의 만남에 대해 앞서 말한 작가와 작품의 길항관계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겠다. 깔끔한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하던 그의 작품 세계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각난 쇳덩이의 결합이나 일러스트풍의 서술구조를 가진 판재 조각으로 변화하기 시작해서 각목을 대충 자르고 엮어서 만든 <까만 혓바닥>(1987)이라는 작품에까지 이른다. 1990년을 전후해서 그는 동판 용접으로 각종 사물과 풍경들을 만들어낸 <침묵의 마을> 연작에 이어 <그 사람의 나라> 연작에 이르기까지 판재를 두드리고 붙여서 오브제와 결합시킴으로써 조형의 근본요소인 선과 면의 문제를 일루전의 국면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1995년의 세 번째 개인전에는 실재의 의자나 옷걸이 등의 오브제와 더불어 아크릴릭 회화까지 등장한다. 1997년에 열린 네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함석으로 만든 16미터짜리 헬리콥터 <새의 모방>을 제작했다. 함석, 철, 유리, 박제, 전기장치 등을 동원한 이 기념비적인 대형 입체조형물을 제시한 이후 그는 10년 가까이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이번 개인전에서 최승호는 알루미늄 판재를 자르고 붙혀서 만든 수십점의 조각 작품들을 선보였다. 각각의 작품에는 각각 다른 이름을 붙였다. 이전에 일괄적으로 동일한 제목을 붙이던 것과는 다르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작품에 자신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얘깃거리를 붙인 것이다. 그는 금속 판재를 오리고 붙어서 입체를 만들었다. <부부>, <아버지>, <가면> 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 사람>이나 <그녀의 가방>과 같이 판재에 글라인더질로 인물이나 사물을 묘사하는 선을 남기고 그 위를 쓱쓱 문질러 준 작품도 있다. <꽃향기>나 <봄바람>처럼 판재를 오려서 특정한 형상을 만들고 그 낱개의 형상들을 상황에 맞게 배치해서 하나의 이야기 구조체를 만드는 방식도 있다. 글라인더질 흔적이 완연한 알루미늄 판 위에 빨간색, 파란색 도색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작품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세련미보다는 70년대 감성을 자극하는 오래된 물건의 향기를 풍긴다. 플라즈마 용접, 가위, 드릴, 글라인더, 사포 등을 사용해 알류미늄 판을 자르고, 금긋고, 붙이고, 짜맞춰서 만든 조각들이다.
이들 조각의 형태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들은 정교한 대상 묘사보다는 생략하고 왜곡해서 대상의 느낌만을 재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집을 하나 짓는 데 있어서도 아귀를 맞추지 않고 대충 만들어 조립했다. 사물이나 짐승이나 인물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평면 에스키스 없이 곧바로 자르고 붙이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드로잉도 없이 대충 만든 것들이다. 최승호의 작업 결과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과정이 보인다.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 그의 매력이다. 에스키스나 전개도 없이 즉흥적으로 자르고 붙여가면서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가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작가의 모습 말이다. 작업을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할 수 있다는 것. 그 매력은 그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며 가슴과 머리와 손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쇠를 자르는 불꽃에 뻑가서 조각으로 바꿨죠. 호랑나비 그려서 옆집 아저씨 이름 쓰고 있던 회화전공 최승호가 그 매력에 빠져서 조소전공으로 바꾼 거예요.” 회화적인 맛이 살아있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 끝에 그의 과거사를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조각을 시작한 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꾸준히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완급을 조절 하면서 달려왔다고 자평한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는 ‘스스로 알리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작업 자체에만 매달려서 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뉘앙스는 다르다. 작가가 자기를 토로해낼 수 있는 유일한 출구를 작품의 조형성이나 일루전 그 자체만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작품 자체만으로 승부한다는 것. 부정할 일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도 없는 얘기다. ‘작가는 작업으로 말한다’는 저 고전적인 언명을 그 누가 나무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그는 자신이 작품이라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고 토로한다. 그저 무지랭이처럼 조각재료와 씨름하면서 깎고, 자르고, 다듬고, 문지르는 작업에만 매달려서 ‘만드는 것’에만 충실했야만 했던 이른바 ‘조각계의 노가다 근성’에 대해 그는 뒤돌아보며 다시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 것이다.
“한참 때는 열을 올리면서 적을 만들고 살았지. 근데, 살다보니 적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훨씬 더 넓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인터뷰를 겸한 음주활동 초반전 음주량이 소주1병 가량에 다다른 최승호의 일성이다. 옆에 있던 그의 지우인 작가 문인수가 재치있게 말을 받는다. “태진아와 송대관은 적이 아니라 동지, 동반자 관계야. 그들의 적은 예컨대 이승철 같은 가수잖아. 우리의 적 개념이 있나? 내가 보기엔 없어. 그게 문제야.” 이어지는 답변은 이렇다. “예전에는 혼자 적을 만들고 살아왔어. 그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을 추스르는 마무리 말을 던진다. 자신은 그나마 혜택 받고 살아온 편이라며 작업실에 써놓은 글귀를 소개한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마라”. 나이 50을 넘기면서 작가로서 살아온 연배의 예술가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그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지금 내가 꿈꾸는 세상은 아니지만, 내 역할 있다면 그렇게 살 거야.”
최승호는 1990년 전후에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서른 무렵부터 한 10년간 그는 수많은 기획전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마흔이 넘어서부터는 끌려다니는 것이 싫어졌다고 한다. 계열, 계파, 학맥, 진영 등 도처에 깔린 갈등의 요소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숨어버렸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숨기 시작한 세월이 10년이야.” 9년만에 개인전을 여는 중진 작가의 소회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열나 달렸지. 97년에 헬리콥터 만들고 나서 한 10년간 이런저런 실험을 하면서 살았고... 10년 전 젊었을 때 그 모든 걸 바쳐서 해 봤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기위해 애썼죠.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인사동 한복판에 자신의 최근작들을 풀어헤쳐 놓은 것은 예술적 창작성과를 드러내는 경하해마지 않을 자리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오랜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던가.
잠시 좌중을 감싸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나의 당돌한 발언 때문이었다. 배움이 짧고 아는 영역이 옹색한 띠동갑 후배가 철없이 던진 ‘한국현대미술판에서 최승호라는 이름 석자를 들은 것이 몇 해 전의 일이다’라는 민망한 고백을 토로했다. 다소간 당혹스러울수도 있는 질문에 대한 답변 치고는 매우 너그러운 대응이었다. 아마도 속으로는 심기가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았으나, 답변은 그의 넉넉한 품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대신에 옆에 있던 지우로부터 따끔한 한 마디를 들어야 했다. “젊은 친구들은 우리를 모를 거다. 그러나 공부해야 한다.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해서 미술판의 작가를 꿰고 있어야 평론가 아닌가!” 그의 말은 짧았지만 굵었다. “1997년 이후 10년 동안 현장에서 공부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최승호 선생님이 네 번째 개인전을 가진 이후 한 동안 활동이 뜸하셔서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료로 만나 뵐 분들도 아니잖습니까? 선생님들을 이전의 역사적인 텍스트를 통해서 미술사로 다루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옹색한 변명으로 몇 마디 붙여봤지만, 그저 옹색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신진을 중진으로 견인하는 과정에 있어서 구조적 허점을 가진 우리 미술계의 단면이 ‘중진 예술가 최승호’의 궤적 속에 묻어 있지 않은가.
나는 최승호라는 작가의 화려한 과거를 자료를 통해서 짐작할 뿐,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말한 자존심이라는 단어에 그 텅 빈 것 같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삶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승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그는 ‘먼저 두드리고 나중에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만들면서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분명 문제적 발언이다. “얽매이지 않았다는 평가. 그것이 나에 대한 가장 큰 찬사예요.” 이 말은 어떤가. 결국 최승호는 삶의 방식이나 작업의 방식 모두 다 프리 스타일 그 자체이다. 회화전공으로 입학해서 조소 전공으로 바꾼 것도 그렇고, 잘 나가던 30대 이후 한 10년 가까이 대략 이럭저럭 유유자적해온 그간의 세월도 그렇다. 그런 그에게 50대 이후의 삶과 작업이 어떠할지를 기대해 보는 것, 작가들의 삶을 따라 한 생을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면서 동시에 매우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준기 (미술비평)
* 계간조각 2006년 가을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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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타일 최승호
예술가의 기질과 예술작품의 관계는 길항관계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별무관계인 경우가 더 많다. 비슷한 기질을 가진 작가라도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예술이란 삶을 헤아리는 너그러운 시선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관통하는 카랑카랑한 시선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최승호는 전자에 매우 가까워 보인다. 그는 그리 팍팍하게 세상을 살지 않는 작가이다. 삶이 그러하거니와 그의 작품도 비어있는 구석구석에 사람의 흔적을 묻혀놓고 있다. 정밀한 구조틀로부터 작품을 뽑아내는 작가가 아니라 커다란 윤곽 속에서 흐릿한 틀을 잡고 그 속에서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거대하게 자신의 작품을 뽑아내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꽊 짜여진 틀을 가지고 정교하게 엮어나가는 스타일보다는 설렁설렁 하면서도 그 속에 구조의 미와 섬세함을 동시에 담아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대화를 엮어 나가는 폼새에서도 그의 너그러움은 작품들과 유사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몇 해 전 경기문화재단에서 중진작가들을 조망하는 <기전미술 2004>가 열리기 전까지 나는 그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함석판으로 만든 커다란 입체조형작품들을 접하면서 1990년대 한국미술의 역사 한 페이지를 발견한 것이 짧은 시간 그를 만난 기억의 대강이다. 이듬해에 나는 <일산오픈스튜디오> 기간에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를 알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실 한켠 의자 위에는 커다란 스폰지 덩어리를 깎아서 만든 곰돌이 인형이 놓여있었다. 중년의 조각가에게 스폰지라는 재료가 낯설어 보인 탓도 있지만, 곰돌이 인형 같은 키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감성에 묘한 매력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곰돌이를 카메라에 담아 내 블로그에 올려놓았다. 알고 보니 나는 그의 작품을 오래전부터 자주 접했었다.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 마무리 되어가던 무렵, 그의 옛 작품집을 받아들고 표지를 넘기는 순간 제일 앞에 나온 작품 사진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다. <접근식>(1983)이라는 작품 때문이었다. 10수년전부터 익히 보아오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장방형의 판재를 떠받히고 있는 원들의 연쇄결합구조를 가진 이 빨간 기하학적인 추상 작품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홍익대 B동 입구를 지키고 서있던 바로 그 작품이었다. 너무나 눈에 익은 작품의 주인공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났을 때의 생경함이란.
같은 제목의 연작들을 만들어낸 그 무렵의 최승호는 사각형과 원을 가지고 몇 가지 작품을 더 남겼다. 하지만 나는 기억속의 그 작품과 그 작품의 창작자를 연결시키는 정보를 습득한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양자간의 관계를 접목시키고 있지는 못하겠다. 그의 작품이 기하학적 추상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인쇄물을 통해서 하나의 역사적 자료로서 따로 기억할 뿐이다. 하여 나는 젊은 날의 최승호가 만든 저 사각형과 원의 만남에 대해 앞서 말한 작가와 작품의 길항관계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겠다. 깔끔한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하던 그의 작품 세계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각난 쇳덩이의 결합이나 일러스트풍의 서술구조를 가진 판재 조각으로 변화하기 시작해서 각목을 대충 자르고 엮어서 만든 <까만 혓바닥>(1987)이라는 작품에까지 이른다. 1990년을 전후해서 그는 동판 용접으로 각종 사물과 풍경들을 만들어낸 <침묵의 마을> 연작에 이어 <그 사람의 나라> 연작에 이르기까지 판재를 두드리고 붙혀서 오브제와 결합시킴으로써 조형의 근본요소인 선과 면의 문제를 일루전의 국면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1995년의 세 번째 개인전에는 실재의 의자나 옷걸이 등의 오브제와 더불어 아크릴릭 회화까지 등장한다. 1997년에 열린 네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함석으로 만든 16미터짜리 헬리콥터 <새의 모방>을 제작했다. 함석, 철, 유리, 박제, 전기장치 등을 동원한 이 기념비적인 대형 입체조형물을 제시한 이후 그는 10년 가까이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이번 개인전에서 최승호는 알루미늄 판재를 자르고 붙혀서 만든 수십점의 조각 작품들을 선보였다. 각각의 작품에는 각각 다른 이름을 붙였다. 이전에 일괄적으로 동일한 제목을 붙이던 것과는 다르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작품에 자신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얘깃거리를 붙인 것이다. 그는 금속 판재를 오리고 붙어서 입체를 만들었다. <부부>, <아버지>, <가면> 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 사람>이나 <그녀의 가방>과 같이 판재에 글라인더질로 인물이나 사물을 묘사하는 선을 남기고 그 위를 쓱쓱 문질러 준 작품도 있다. <꽃향기>나 <봄바람>처럼 판재를 오려서 특정한 형상을 만들고 그 낱개의 형상들을 상황에 맞게 배치해서 하나의 이야기 구조체를 만드는 방식도 있다. 글라인더질 흔적이 완연한 알루미늄 판 위에 빨간색, 파란색 도색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작품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세련미보다는 70년대 감성을 자극하는 오래된 물건의 향기를 풍긴다. 플라즈마 용접, 가위, 드릴, 글라인더, 사포 등을 사용해 알류미늄 판을 자르고, 금긋고, 붙이고, 짜맞춰서 만든 조각들이다.
이들 조각의 형태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들은 정교한 대상 묘사보다는 생략하고 왜곡해서 대상의 느낌만을 재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집을 하나 짓는 데 있어서도 아귀를 맞추지 않고 대충 만들어 조립했다. 사물이나 짐승이나 인물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평면 에스키스 없이 곧바로 자르고 붙이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드로잉도 없이 대충 만든 것들이다. 최승호의 작업 결과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과정이 보인다.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 그의 매력이다. 에스키스나 전개도 없이 즉흥적으로 자르고 붙여가면서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가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작가의 모습 말이다. 작업을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할 수 있다는 것. 그 매력은 그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며 가슴과 머리와 손의 길항관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쇠를 자르는 불꽃에 뻑가서 조각으로 바꿨죠. 호랑나비 그려서 옆집 아저씨 이름쓰고 있던 회화과 최승호가 그 매력에 빠져서 조소과를 바꾼 거예요. 회화과 선생님들이 난리가 났죠. 최명영 선생님만이 ‘니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하더군요.” 회화적인 맛이 살아있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 끝에 그의 과거사를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조각을 시작한지 30년가까운 세월동안 꾸준히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완급을 조절 하면서 달려왔다고 자평한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는 ‘스스로 알리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작업 자체에만 매달려서 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뉘앙스는 다르다. 작가가 자기를 토로해낼 수 있는 유일한 출구를 작품의 조형성이나 일루전 그 자체만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작품 자체만으로 승부한다는 것. 부정할 일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도 없는 얘기다. ‘작가는 작업으로 말한다’는 저 고전적인 언명을 그 누가 나무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그는 자신이 작품이라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을 토로했다. 그저 무지랭이처럼 조각재료와 씨름하면서 깎고, 자르고, 다듬고, 문지르는 작업에만 매달려서 ‘만드는 것’에만 충실했야만 했던 이른바 ‘조각계의 노가다’ 근성에 대해 그는 뒤돌아 보며 다시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 것이다.
“한참 때는 열을 올리면서 적을 만들고 살았지. 근데, 살다보니 적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훨씬 더 넓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음주활동 초반전 음주량이 소주1병 가량에 다다른 최승호의 일성이다. 옆에 있던 그의 지우인 작가 문인수가 재치있게 말을 받는다. “태진아와 송대관은 적이 아니라 동지, 동반자 관계야. 그들의 적은 예컨대 이승철 같은 가수잖아. 우리의 적 개념이 있나? 내가 보기엔 없어 그게 문제야.” 이어지는 답변은 이렇다. “예전에는 혼자 적을 만들고 살아왔어. 그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을 추스르는 마무리 말을 던진다. 자신은 혜택받고 살아왔다면서 자신의 작업실에 써놓은 글귀를 소개한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마라”. 나이 50을 넘기면서 작가로서 살아온 연배의 예술가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그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지금 내가 꿈꾸는 세상은 아니지만, 내 역할 있다면 그렇게 살 거야”.
최승호는 1990년 전후에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서른 무렵부터 한 10년간 그는 수많은 기획전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마흔이 넘어서부터는 끌려다니는 것이 싫어졌다’고 한다. 계열, 계파, 학맥, 진영 등 도처에 깔린 갈등의 요소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숨어버렸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숨기 시작한 세월이 10년이야.” 9년만에 개인전을 여는 중진 작가의 소회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열나 달렸지. 97년에 헬리콥터 만들고 나서 한 10년간 이런저런 실험을 하면서 살았고... 10년 전 젊었을 때 그 모든 걸 바쳐서 해 봤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기위해 애썼죠.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인사동 한복판에 자신의 최근작들을 풀어헤쳐 놓은 것은 예술적 창작성과를 드러내는 경하해마지 않을 자리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오랜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던가.
이 얘기의 시작은 나의 당돌한 질문 때문이었다. 배움이 짧고 아는 영역이 옹색한 띠동갑 후배가 철없이 던진 ‘한국현대미술판에서 최승호라는 이름 석자를 들은 것이 몇 해 전의 일이다’라는 민망한 고백에 대한 대답 치고는 매우 너그러운 답변이다. 아마도 속으로는 심기가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질문을 던진 직후에 가져보았으나, 그의 답변은 그의 넉넉한 품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대신에 옆에 있던 지우로부터 따끔한 한 마디를 들어야 했다. “젊은 친구들은 우리를 모를 거다. 그러나 공부해야 한다.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해서 미술판의 작가를 꿰고 있어야 평론가 아닌가!” 그의 말은 짧았지만 굵었다. “1997년 이후 10년 동안 현장에서 공부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최승호 선생님이 네 번째 개인전을 가진 이후 한 동안 활동이 뜸하셔서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료로 만나 뵐 분들도 아니잖습니까? 선생님들을 이전의 역사적인 텍스트를 통해서 미술사로 다루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옹색한 변명으로 몇 마디 붙여봤지만, 그저 옹색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신진을 중진으로 견인하는 과정에 있어서 구조적 허점을 가진 우리 미술계의 단면이 ‘중진 예술가 최승호’의 궤적 속에 묻어 있지 않은가.
나는 최승호라는 작가의 화려한 과거를 짐작할 뿐,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말한 자존심이라는 단어에 그 텅 빈 것 같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삶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승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그는 ‘먼저 두드리고 나중에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만들면서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분명 문제적 발언이다. “얽매이지 않았다는 평가. 그것이 나에 대한 가장 큰 찬사예요.” 이 말은 어떤가. 결국 최승호는 삶의 방식이나 작업의 방식 모두 다 프리스타일 그 자체이다. 회화전공으로 입학해서 조소 전공으로 바꾼 것도 그렇고, 잘 나가던 30대 이후 한 10년 가까이 대략 이럭저럭 유유자적해온 그간의 세월도 그렇다. 그런 그에게 50대 이후의 삶과 작업이 어떠할지를 기대해 보는 것, 작가들의 삶을 따라 한 생을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마땅히 해야할 일이면서 동시에 매우 즐거운 또 하나의 일이 생긴 셈이다.
김준기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