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근대 시대의 동시대적인 감성을 향하여
critic & column | 2006/09/19 15:43
탈근대 시대의 동시대적인 감성을 향하여
성신여대 대학원 동양화과 전시 <뜨거운 돌>에 부처
인류는 감성적 소통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나누는 방식을 개발해왔다. 그것은 20세기를 지나면서 확고한 제도이자 관행이며 개념이고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예술적 소통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있다. 특히 대학이라는 학제 시스템을 통해서 예술을 학습하고 경험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그들에게 전문화된 영역을 부여했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의 전통 회화의 방법과 이념을 동시대의 예술 언어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목표를 가진 동양화과라는 학제 편성을 만났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을 근거로 편성된 이 시스템은 한때 동양화단이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이제 서서히 종식을 선언하고 있다. 이제 동시대의 회화라는 보편적 개념을 향해 서서히 지평 혼융을 시작한 마당에 먹과 안료를 가지고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집약한 동양화라는 제도이자 관행이며 개념이고 영역이 어떻게 변모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있는 비평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17인의 성신여대 대학원생들의 전시 <뜨거운 돌>은 이런 관점에서 매우 뜨거운 이슈를 안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동시대는 물론이거니와 향후 수십년의 미래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 속에는 동시대의 예술적 편향과 더불어 특히나 동양화를 전공한 화가들의 미래상이 담겨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회화의 지층을 확인해보고 동시대의 회화 일반을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단일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각자 나름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오고 있다. 따라서 전제해 둘 것은 여기에서의 그림 읽기가 일관된 전시의 맥락을 가지고 얘기를 풀어나가기는 좀 난망한 일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몇 갈래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압도적인 것이 풍경이다. 산수풍경과 일상담론이 중첩된 결과로 나타나는 이러한 그림들은 우리를 둘러싼 시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를 그리는 경우의 그 풍경이다. 김윤경은 짧은 선이나 점을 가지고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그의 선과 점들은 길을 만든다. 그에게 있어서 길은 풍경으로 이어지고 길에서 만난 세상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자신의 감성을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풀어내기 위한 시발점을 이룬다. 김은진은 나무들로 구성된 숲의 모습을 그린다. 그는 낱개의 조형요소들에 부유하는 자아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불안한 자아의 모습을 풍경을 통해서 담아내고자 한다. 결국은 풍경을 그리되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셈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주변의 나무들을 그리는 배한나는 부분적으로 생략되거나 강조하는 화면의 완급조절이 돋보이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대상의 형상을 화면 위에 옮겨놓는 것을 넘어서 매우 독창적인 화가주체의 감각에 따라 재구성된 화면을 제시함으로써 회화란 여전히 하나의 스타일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장성희 또한 나무숲과 빌딩숲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것을 그려낸다. 그의 그림에서는 바라보는 이와 그려내는 이 사이의 객관적 거리 같은 것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풍경을 그릴 때처럼 사람을 그릴 때도 그는 부분과 전체의 모습을 엮어서 하나의 구조체로 재구성된 회화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풍경을 그리되 그것을 자신의 내러티브나 회화적 관심을 관통하는 하나의 창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배현미는 ‘이기주의’나 ‘여행’ 등의 화제를 붙여서 나무나 자연 또는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그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점을 찍는 일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점은 평면 위에 형상을 구성하는 회화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리기의 목적이기도 하다. 만화적 상상으로 처리되었으며 동시에 민화적 도상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이미지를 그리는 이지영 같은 경우도 있다. 그는 실재 생태의 모습을 인간의 구경거리로 박제화한 동물원 공간의 모습을 실재의 모사로 보고 그것을 다시 모사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생태자연의 실재에 대해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전소진은 만화나 일러스트풍의 회화작품을 통해서 일반적인 서술구조와는 다른 방식의 풍경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고전적인 풍경화를 판타지소설 수준의 이야기 구조로 전환하여 몽환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사물의 모습을 하나의 시각적인 기호로 인식하고 그것을 재해석함으로써 삶의 정황과 정서들을 성찰해보고자 하는 태도를 가진 그림들도 많다. 이상순은 도시의 모습을 간략한 선묘나 색면으로 처리하면서 복잡한 외연 속에 담긴 단순한 구조를 찾으려고 한다. 레코드 판의 형상을 희노애락의 얼굴 기호로 표현하여 인간 삶의 정황을 심플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김민정은 옷이나 구두 등의 패션용품들을 컬러풀한 형상으로 기호화하여 먹그림 풍경 위에 배치한다. 그는 먹그림과 대비되는 이질적인 색면들을 통해서 욕망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신지원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키워드를 주방의 풍경이나 자동차 실내 풍경 속에 담는다. 부엌의 배관구조나 자동차의 각종 제어장치 속에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나 감각의 흐름 등을 담아내는 방식이다. 이은경은 자신이 접하는 일상의 장면과 풍경들을 담은 드로잉을 선보인다. 그 드로잉들은 작위적인 의도를 가지기보다는 하나의 놀이로 자리잡은 그림그리기이지만 그 속에는 순간의 감정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선이 녹아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태도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경향들이다. 나유리는 욕망에 충실한 동물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선묘와 색면으로 구성된 인간의 얼굴이나 인체의 형상을 통해서 권력욕에 사로잡인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다. 문성윤은 강렬한 원색과 먹색을 구사하면서 자아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자신의 이런저런 형상들을 그려낸다. 그림그리기를 통해서 자신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를 가지고 기성의 제도화된 방식을 벗어난 자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조원득은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 기재들을 코믹한 도상과 텍스트를 동원해서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이기도 하며 인간 모두의 상황이기도 한 이러한 삶의 모습들을 만화적 상상의 이미지와 텍스트로 담아낸다.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그림들 가운데는 그것을 하나의 스타일의 문제로 해석해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열어 나가는 경우도 많다. 양호정은 색면과 선묘들로 패턴화 된 얼굴을 반복하여 나열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때 그의 선과 면들은 동일성 위에서 반복적인 운율이나 변주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과 차이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유선영은 그림 그리기의 과정을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인간의 모습을 독특한 자세들과 상황설정으로 담아내며 묘사방식에 있어서도 나름의 독창적인 색깔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조이영은 얼굴을 그린다. 그는 ‘침묵을 입에 물고’ 또는 ‘네가 좋아’ 등의 감성적인 화제로 자신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압축적인 구성의 힘을 증폭시킨다. 그는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도 여유있게 비울 줄 알고, 마른 붓으로 그리면서도 충분히 촉촉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상의 서너 갈래 혹은 너댓 갈래 흐름들은 전제한 바와 같이 개별 작품들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일별해보려는 시각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그림의 대상에 관한 관심이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관찰해보고 그 대상을 화면위에 표현하겠다는 태도는 오늘날 회화 작업의 대세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점을 찍거나 선을 긋거나 면을 만들거나 심지어는 종이를 뜯어내는 식의 온갖 매체 실험이 일정한 성과를 이뤄낸 후에 회화의 내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회화의 외부로 다시금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커다란 흐름으로 해명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모든 매체와 장르의 예술에 걸쳐 유사한 흐름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들 17인의 출품 작가들이 지향하는 바를 가늠해 볼 때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는 것이 대상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을 그렸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에게는 천혜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표현을 억압하던 시기를 지나 표현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악재일 수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세대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난점이기도 한 이 악조건 또는 악영향이라는 것은 대상 표현이 난무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공허함 같은 것이다. 무언가 바라보거나 관찰해보고 그 대상을 그리는 방식을 채택한 대다수의 화가들에게서 ‘왜 그리는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략 가늠해본건대는 일상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이와 같은 개념없는 그리기는 오늘날 회화에서 성찰적 지점들을 점점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해왔다. 오늘날 회화의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표피적인 일상성 담론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해본 몇 갈래의 흐름들은 풍경과 사물과 인간의 모습으로 압축할 수 있다. 좀 더 나눠서 풀어보면 시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 작가의 내러티브나 회화적 관심을 관통하는 창으로서의 풍경, 시각적 기호로 재해석된 사물, 삶을 성찰하는 계기로서의 자신의 모습, 회화적 스타일의 문제로 귀결되는 인간의 모습 등이다. 이러한 흐름의 작품들이 동시대의 반짝이는 이슈와 첨예한 지점들과 얼마만큼 치열하게 만나고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비평적 진단은 작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체계적인 영역분화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던 패러다임의 역할모델을 딛고 탈근대적인 예술가 주체로 자신을 재정립해내려는 각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고, 회화와 비회화를 구분하며, 동양화와 비동양화를 구분하는 20세기 패러다임을 딛고 진정한 탈분화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것은 20세기 작가의 몫이 아니라 21세기 작가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그 시작이 여기에 있다. 이들 열일곱 명의 젊은 작가들 속에 이행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이 담겨있다.
김준기 (미술비평)
* 2006 성신여대 대학원 동양화과 전시 서문
성신여대 대학원 동양화과 전시 <뜨거운 돌>에 부처
인류는 감성적 소통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나누는 방식을 개발해왔다. 그것은 20세기를 지나면서 확고한 제도이자 관행이며 개념이고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예술적 소통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있다. 특히 대학이라는 학제 시스템을 통해서 예술을 학습하고 경험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그들에게 전문화된 영역을 부여했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의 전통 회화의 방법과 이념을 동시대의 예술 언어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목표를 가진 동양화과라는 학제 편성을 만났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을 근거로 편성된 이 시스템은 한때 동양화단이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이제 서서히 종식을 선언하고 있다. 이제 동시대의 회화라는 보편적 개념을 향해 서서히 지평 혼융을 시작한 마당에 먹과 안료를 가지고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집약한 동양화라는 제도이자 관행이며 개념이고 영역이 어떻게 변모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있는 비평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17인의 성신여대 대학원생들의 전시 <뜨거운 돌>은 이런 관점에서 매우 뜨거운 이슈를 안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동시대는 물론이거니와 향후 수십년의 미래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 속에는 동시대의 예술적 편향과 더불어 특히나 동양화를 전공한 화가들의 미래상이 담겨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회화의 지층을 확인해보고 동시대의 회화 일반을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단일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각자 나름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오고 있다. 따라서 전제해 둘 것은 여기에서의 그림 읽기가 일관된 전시의 맥락을 가지고 얘기를 풀어나가기는 좀 난망한 일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몇 갈래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압도적인 것이 풍경이다. 산수풍경과 일상담론이 중첩된 결과로 나타나는 이러한 그림들은 우리를 둘러싼 시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를 그리는 경우의 그 풍경이다. 김윤경은 짧은 선이나 점을 가지고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그의 선과 점들은 길을 만든다. 그에게 있어서 길은 풍경으로 이어지고 길에서 만난 세상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자신의 감성을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풀어내기 위한 시발점을 이룬다. 김은진은 나무들로 구성된 숲의 모습을 그린다. 그는 낱개의 조형요소들에 부유하는 자아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불안한 자아의 모습을 풍경을 통해서 담아내고자 한다. 결국은 풍경을 그리되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셈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주변의 나무들을 그리는 배한나는 부분적으로 생략되거나 강조하는 화면의 완급조절이 돋보이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대상의 형상을 화면 위에 옮겨놓는 것을 넘어서 매우 독창적인 화가주체의 감각에 따라 재구성된 화면을 제시함으로써 회화란 여전히 하나의 스타일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장성희 또한 나무숲과 빌딩숲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것을 그려낸다. 그의 그림에서는 바라보는 이와 그려내는 이 사이의 객관적 거리 같은 것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풍경을 그릴 때처럼 사람을 그릴 때도 그는 부분과 전체의 모습을 엮어서 하나의 구조체로 재구성된 회화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풍경을 그리되 그것을 자신의 내러티브나 회화적 관심을 관통하는 하나의 창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배현미는 ‘이기주의’나 ‘여행’ 등의 화제를 붙여서 나무나 자연 또는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그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점을 찍는 일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점은 평면 위에 형상을 구성하는 회화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리기의 목적이기도 하다. 만화적 상상으로 처리되었으며 동시에 민화적 도상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이미지를 그리는 이지영 같은 경우도 있다. 그는 실재 생태의 모습을 인간의 구경거리로 박제화한 동물원 공간의 모습을 실재의 모사로 보고 그것을 다시 모사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생태자연의 실재에 대해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전소진은 만화나 일러스트풍의 회화작품을 통해서 일반적인 서술구조와는 다른 방식의 풍경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고전적인 풍경화를 판타지소설 수준의 이야기 구조로 전환하여 몽환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사물의 모습을 하나의 시각적인 기호로 인식하고 그것을 재해석함으로써 삶의 정황과 정서들을 성찰해보고자 하는 태도를 가진 그림들도 많다. 이상순은 도시의 모습을 간략한 선묘나 색면으로 처리하면서 복잡한 외연 속에 담긴 단순한 구조를 찾으려고 한다. 레코드 판의 형상을 희노애락의 얼굴 기호로 표현하여 인간 삶의 정황을 심플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김민정은 옷이나 구두 등의 패션용품들을 컬러풀한 형상으로 기호화하여 먹그림 풍경 위에 배치한다. 그는 먹그림과 대비되는 이질적인 색면들을 통해서 욕망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신지원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키워드를 주방의 풍경이나 자동차 실내 풍경 속에 담는다. 부엌의 배관구조나 자동차의 각종 제어장치 속에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나 감각의 흐름 등을 담아내는 방식이다. 이은경은 자신이 접하는 일상의 장면과 풍경들을 담은 드로잉을 선보인다. 그 드로잉들은 작위적인 의도를 가지기보다는 하나의 놀이로 자리잡은 그림그리기이지만 그 속에는 순간의 감정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선이 녹아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태도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경향들이다. 나유리는 욕망에 충실한 동물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선묘와 색면으로 구성된 인간의 얼굴이나 인체의 형상을 통해서 권력욕에 사로잡인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다. 문성윤은 강렬한 원색과 먹색을 구사하면서 자아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자신의 이런저런 형상들을 그려낸다. 그림그리기를 통해서 자신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를 가지고 기성의 제도화된 방식을 벗어난 자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조원득은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 기재들을 코믹한 도상과 텍스트를 동원해서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이기도 하며 인간 모두의 상황이기도 한 이러한 삶의 모습들을 만화적 상상의 이미지와 텍스트로 담아낸다.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그림들 가운데는 그것을 하나의 스타일의 문제로 해석해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열어 나가는 경우도 많다. 양호정은 색면과 선묘들로 패턴화 된 얼굴을 반복하여 나열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때 그의 선과 면들은 동일성 위에서 반복적인 운율이나 변주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과 차이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유선영은 그림 그리기의 과정을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인간의 모습을 독특한 자세들과 상황설정으로 담아내며 묘사방식에 있어서도 나름의 독창적인 색깔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조이영은 얼굴을 그린다. 그는 ‘침묵을 입에 물고’ 또는 ‘네가 좋아’ 등의 감성적인 화제로 자신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압축적인 구성의 힘을 증폭시킨다. 그는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도 여유있게 비울 줄 알고, 마른 붓으로 그리면서도 충분히 촉촉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상의 서너 갈래 혹은 너댓 갈래 흐름들은 전제한 바와 같이 개별 작품들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일별해보려는 시각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그림의 대상에 관한 관심이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관찰해보고 그 대상을 화면위에 표현하겠다는 태도는 오늘날 회화 작업의 대세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점을 찍거나 선을 긋거나 면을 만들거나 심지어는 종이를 뜯어내는 식의 온갖 매체 실험이 일정한 성과를 이뤄낸 후에 회화의 내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회화의 외부로 다시금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커다란 흐름으로 해명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모든 매체와 장르의 예술에 걸쳐 유사한 흐름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들 17인의 출품 작가들이 지향하는 바를 가늠해 볼 때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는 것이 대상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을 그렸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에게는 천혜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표현을 억압하던 시기를 지나 표현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악재일 수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세대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난점이기도 한 이 악조건 또는 악영향이라는 것은 대상 표현이 난무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공허함 같은 것이다. 무언가 바라보거나 관찰해보고 그 대상을 그리는 방식을 채택한 대다수의 화가들에게서 ‘왜 그리는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략 가늠해본건대는 일상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이와 같은 개념없는 그리기는 오늘날 회화에서 성찰적 지점들을 점점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해왔다. 오늘날 회화의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표피적인 일상성 담론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해본 몇 갈래의 흐름들은 풍경과 사물과 인간의 모습으로 압축할 수 있다. 좀 더 나눠서 풀어보면 시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 작가의 내러티브나 회화적 관심을 관통하는 창으로서의 풍경, 시각적 기호로 재해석된 사물, 삶을 성찰하는 계기로서의 자신의 모습, 회화적 스타일의 문제로 귀결되는 인간의 모습 등이다. 이러한 흐름의 작품들이 동시대의 반짝이는 이슈와 첨예한 지점들과 얼마만큼 치열하게 만나고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비평적 진단은 작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체계적인 영역분화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던 패러다임의 역할모델을 딛고 탈근대적인 예술가 주체로 자신을 재정립해내려는 각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고, 회화와 비회화를 구분하며, 동양화와 비동양화를 구분하는 20세기 패러다임을 딛고 진정한 탈분화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것은 20세기 작가의 몫이 아니라 21세기 작가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그 시작이 여기에 있다. 이들 열일곱 명의 젊은 작가들 속에 이행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이 담겨있다.
김준기 (미술비평)
* 2006 성신여대 대학원 동양화과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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