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생산과 예술노동, 그리고 새로운 예술체제
critic & column | 2009/11/16 20:02
주문생산과 예술노동, 그리고 새로운 예술체제
새로운 예술체제로의 이행은 어느 대목에서 변곡점을 형성할 것인가?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예술생산이 주문생산 체제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음을 들여다보면 그 해답의 실마리 하나를 찾을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의 현대미술은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미술이라는 예술장르 본연의 시각적 소통을 매개하는 ‘의미 사용의 확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화폐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교환가치의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미술이 사적으로 소유가능한 물질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가령 소설이나 시를 사적으로 소유하여 독점할 수 없으며, 콘서트나 연극을 개인의 사유구조 속에서 사고팔 수 없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음반이라는 물질 그 자체를 천정부지의 가격으로 환산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술작품이 가진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서의 지위는 매우 독특하다. 물론 여타의 장르에서도 예술 콘텐츠의 상업주의적 파행이 심난한 지경이라는 게 공통된 진단이기는 하다. 팔려야만 하는 상품으로서의 예술콘텐츠의 운명은 장르를 불문하고 같은 처지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술작품의 경우 화폐와 작품의 관계가 매우 심각하게 종속적인 관계에 놓이거나 아예 극단적인 물신주의의 길을 걷는다는 데 있다.
예술의 시장 종속은 예술노동의 소외 상황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만성적인 문제로 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과 관습을 구조화한다. 미술작품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행위를 우리는 작품 소장(collection)이라고 말한다. 특정 작품을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서 특정 개인이 지속적으로 사적 소유물로 삼는 일이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관행으로 자리잡아 나가는 과정이 곧 근대적 예술노동의 교환체제이며, 특정 공간에 비치할 특수목적의 공예품이나 장식품이 아닌 예술작품을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한 미술작품의 생산 구조에서 기인한다. 근대 이전의 모든 예술노동의 직접적인 주문생산에 따른 것이었다.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린 주문 생산의 대가 다비드는 솜씨좋은 궁정화가로서 당대의 영화를 누렸지만, 부르주아의 위선을 까발린 <풀밭위의 식사>를 그린 마네는 낙선을 거듭하다가 그 가치를 발견한 뉴욕의 미술시장에 의해 모더니즘을 개척한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마지막 궁정화가인 오원 장승업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얻은 후 광통교 인근에서 오늘날의 화랑과 같은 역할을 한 공간을 통해서 작품을 거래할 수 있었다.
특히 유럽의 경우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명화들이 특정 공간을 위한 주문생산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다빈치는 주문생산품인 모나리자 한 작품을 여러 해 동안 붙잡고 있으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열었으며, 주문 회화의 대가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려 예술가로서의 자아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북아시아 권에서는 주문생산과 관계없이 자신의 사유와 감성을 표현하는 독자적인 세계로서의 풍경화나 사군자 같은 회화가 일찍이 성립했다는 점에서 주문생산 시스템의 예외적 경우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생산은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주문에 다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후의 예술 생산은 확연히 독자적이다. 예술가는 스스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창의적인 세계를 추구할 자유를 얻었다. 당대의 새로운 이슈를 개발하고 그것을 발표할 장으로서의 전시장이 독자적인 공론의 장으로 성립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장이 과거의 미술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수집과 보존, 연구, 전시, 그리고 교육을 목표로 하는 항구적 비영리기관이라면, 살롱과 갤러리는 동시대의 미술작품이 서로 다른 가치를 경쟁하면서 진일보하려는 아방가르드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새로움의 신화를 추구한 전위의 전위가 20세기를 지배했다. 조선미술전람회가 제도화한 1920년대부터 조선반도에서도 미술작품 전람회를 관람하는 일이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등장했다. 전시장이라는 약속된 공간에서의 작품감상행위라는 문명사회의 약속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100년 가까운 전시관람 행위가 아직도 제대로 된 문화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영화에 있어 1000만명이 보는 대박 영화의 대열에 끼어 1년간의 영화감상 대열에 동참하는 대중들은 미술에 있어서도 동일한 현상을 유발한다. 피카소나 샤갈, 르누아르 등의 서구 블록버스터 전시에 길게 줄을 서서 상투적인 미술을 반복재생산하는 데 동원되는 거대한 무리로서의 대중을 확인할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미술문화 대중화의 실체이다. 대중화한 미술(관람)문화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 미술작품의 사적 소유에 근거한 콜렉션이다. 공공미술관의 콜렉션을 제외하면 사적인 목적에 기반한 장식취미가 작품 소장의 대세를 이루는데,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미술시장이라는 메커니즘 아래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시장은 작품 소장을 작품 투자로 변환한다. 투자는 소정의 화폐를 특정 가치에 묶어 두었다가 차후에 이득을 남기기 위한 것인데, 미술작품 소장을 화폐재생산의 수단으로 삼는 이러한 일들은 지난 몇 년간 한국미술시장에 심한 거품현상을 유발했다. 거의 돈놓고 돈먹는 수준의 투기현상이 일어나면서 비평적 가치는 실종했고, 예술가들은 근대적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따른 주문 생산에 골몰해야 했다. 미술시장이라는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주문자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술적 가치 생산을 위한 예술가의 삶은 증발해버리고 미술작품 생산자는 화폐를 획득하기 위한 다양한 직업군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예술노동의 사회화는 곧 시장질서와의 타협을 의미한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길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시장경제를 통해서 예술노동의 가치를 화폐와 교환해야만 하는 지배질서는 동시대를 헤쳐 나가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질서의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권력이 요청하는 주문에 응대하지 않으려는 예술가들의 움직임이 다른 질서를 요청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체제의 동력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예술노동을 주문생산으로부터 독립시켰던 ‘예술가 주체의 자율성’ 개념이다. 문제는 그 자율적인 예술가 주체들이 어떻게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각성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에게는 80년대 현장미술이라는 소중한 유산이 있다. 지난 시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남겨진 자산 가운데 당장 빛이 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갈고 닦아 새로 만들어야 빛이 나는 게 있다. 1980년대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역사도 그렇다.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미술운동은 급변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현실과 매우 긴밀하게 접점을 형성하려는 실천적 대응으로 가져갔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더니즘 시대가 견지했던 탈접점의 미학과 변별한다. 특히 그것은 현장미술이라는 매우 진보적인 실천과 담론을 낳았다. 현장미술은 투쟁의 현장, 삶의 현장에서 예술적 참여와 개입을 전제로 사회적 실천과 예술적 실천을 창의적으로 결합하고자 했던 리얼리스트들의 미술운동이다. 그들은 노동현장과 정치투쟁의 현장에서 그리고 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예술적 실천을 나누고자했던 미술 장(場) 바깥의 예술가들이다. 그 장본인들, 또는 그 후배세대들이 1990년대 중반기의 잠복기를 거쳐 2000년대 들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의 공공성과 현장성을 되살리고 있다.
몇 해 전에 수많은 미술가들이 액티비스트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각성한 일대 사건이 있었다. 2003년부터 2007년 사이에 대추리 마을에서 벌어진 현장예술 활동은 시각예술 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총집결해서 국가단위 공공성과 마을단위 공공성의 간극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대추리를 통해서 함께 만난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들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들사람들은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토선 없는 네트워크였다. 그 네트워크는 900일 가까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촛불을 켠 주민들과 동행했으며 대추리의 현장에 참여하고 개입했다. 결과적으로 마을은 파괴되었지만, 그 현장을 통해서 새롭게 각성한 주체들이 새로운 예술 실천을 체험했다. 그것은 주민 공동체와 함께한 커뮤니티 아트이자, 사회적 의제를 다룬 액티비스트 아트이며, 과정과 상호작용을 확인한 새로운 공공미술이었으며, 동시대의 투쟁 현장을 외면하지 않은 21세기 버전의 현장미술이었다. 대추리에서의 경험은 우리에게 예술은 화폐를 발견하는 물신을 넘어 시대의 가치를 성찰하는 예술적 소통을 매개하는 메커니즘이어야 한다는 점을 각성하게 했다.
공공미술 논의도 새로운 예술체제의 신호탄이다. 이 개념은 1960년대 후반의 유럽에서 문화혁명의 흐름 속에서 나왔다. 그 이전의 미술이 그 생산과 향유, 소비 과정에 있어서 사사성(私事性) 편향적이었다는 반성으로서 나온 것이 공공성에 기반한 예술체제로서의 공공미술 개념이다. 공공미술은 공적 기금으로 공공의 장소에서 공공의 의제를 다루는 미술을 말한다. 한국에서의 공공미술 실천과 담론은 근자에 들어 활성화 일로를 걷고 있다. 그러나 원초적인 방식의 공공미술은 1960년대 후반부터 기념조상이나 기록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가적 영웅을 기리거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들은 그러나 예술적 가치를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문화정치적인 잣대로 일관했다. 공공미술의 두 번째 변곡점은 1980년대 후반 이후의 건축물 미술장식품 제도 시행이다. 도시환경을 미화하기 위해서 건축주가 건물 안팎에 미술장식품을 설치하도록 한 이 제도는 그러나 제도적 결여와 미학적 파산을 결과했다. 장소성과 역사성 등의 공공재적 가치보다는 예술가의 개별적인 표현 결과물을 도시공간에 대입함으로써 공공미술로서의 자질과 효과에 심각한 문제제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수준의 공공미술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것이 새로운 공공미술 개념이다. 그것은 예술의 공공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예술적 실천의 대상과 과정, 그리그 그 결과에 대한 총체적인 재검토이다. 그것은 공공의 의제라고 하는 새로운 주문을 예술적 에너지로 전화하기 위한 창작이념이자 미술제도이며, 새로운 인식과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그 자체기이고 하다. 새로운 공공미술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대안적인 공공예술 운동인 뉴 장르 퍼블릭 아트(New Genre Public Art)에서 나온 말이다. 수잔 레이시에 따르면, 그것은 과정으로서의 미술, 예술가와 관객의 상호작용, 미술행위의 효율성에 관한 비평적 개념을 포괄하며, 특히 1)경험자로서의 예술가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에 대해 감성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수준의 사사미술(Private Art)에서 정보를 공유하며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2)보고자 혹은 3)분석가로서의 예술가 지위를 넘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게 하는 4)행동가로서의 예술가 지위에 이르러 공공미술(Public Art)의 수준을 획득한다.
새로운 예술 실천과 담론은 다양한 주체들이 공통분모를 향해 나아가면서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사회적 합의이다. 그것은 담론 차원의 비평적 언설이나 제도적 뒷받침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자 지난 세기의 경험을 토대로 한 대안적인 미술 개념이기도 하다. 예술노동의 시장 종속을 극복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공공의 의제를 예술적 에너지로 채택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공미술로 수렴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미술은 그 대안적 개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가령 커뮤니티 아트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매우 대안적인 예술소통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예술생산을 세계적 보편성의 실현보다는 지역적 특수성의 가치를 발현하는 지역주의 예술과도 직결한다. 나아가 그것은 또한 물질적 결과보다는 개념 그 자체를 중요시 하는 개념미술과도 연결된다. 영상과 디지털, 인터넷 등의 새로운 매체환경에 의해 떠오르고 있는 뉴미디어 아트 또한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물질 기반 미술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미래의 비전을 현실화하고 있다. 이 모든 실천과 논의들은 전근대의 직접주문 생산체제와 근대의 간접주문 생산체제가 제3의 체제로 전환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미 우리시대 예술은 공공의 의제라는 주문에 응대할 새로운 예술체제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실천문학 기고문 20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