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론 5] 서송 : 문이 열린 작업실
critic & column | 2005/09/25 15:20

서송 : 문이 열린 작업실
인간이 삶을 꾸려가는 터전인 땅. 현대도시인의 삶에 있어서 땅이란 광활한 대지나 비옥한 농토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자리 펴고 누울만한 몇 십 평의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한 삶을 꾸리는데 있어서 누울 자리 하나 변변히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허다한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갖지 못해 불편하게 살고 있는가? 땅은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지속된 사적 소유 개념 아래에서의 땅은 인간의 신분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땅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이들은 노예, 농노, 소작농으로 살아야했다. 농노는 말 그대로 땅을 소유한 자의 노예로서 농사를 짓는 신분이었다면 소작농은 노예신분은 아니되 땅을 사용하는 대가로 추수한 농작물을 현물로 바쳐야 했다. 근대이후의 화폐경제 하에서는 땅의 사용료는 현금으로 바뀌었다. 땅을 가지지 못한 자는 노예에서 소작농으로, 토지임대자로 변화해온 것이다. 이렇듯 땅은 소유개념에 의해 재단되는 엄격한 사회 시스템의 가시적인 작동공간으로 존재해 왔다. 이러한 땅의 역사는 과거의 농경사회에서이건 현대의 도시사회에서이건 간에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땅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구산동의 서송의 작업실 이야기는 땅으로부터 시작된다. 땅의 역사는 예술가의 삶 속에도 깊이 각인되어 있다. 예술노동을 근거로 삶을 꾸려나가는 조소작가들에게 있어서 땅이란 가장 원천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땅은 곧 공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확보해야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와 같이 예술가의 작업공간이 사회적인 생산의 공간으로 인정될 수 없는 시스템 아래에서라면 땅의 문제는 더욱 더 절실한 예술가의 존립 근거로 작동한다.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절실하게 작업실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작업실을 지을 땅을 구한다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땅을 사지 못하면 공간을 빌려서 써야 하는데, 그것은 곧 땅을 사용하는 대가(代價)를 현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서 지대(地代)의 자본주의적 형태가 관철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송은 청춘을 바친 각고의 노력 끝에 구산동 언저리에 자그마한 땅을 마련했다. 1993년에 결혼한 서송은 이듬해에 학교를 졸업하고 일산 송포초등학교 근처의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다. 미술학원과 예고에 출강하는 한편 그의 스승인 최기원의 작업실에서의 모뉴멘트 작업 등의 일을 하면서 경제적 근거를 마련했다. 일은 그에게 육체적인 힘겨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이벤트 조각은 많이 힘들었다. 몸으로 사는 작가가 몸을 버릴 수는 없어서 그 바닥을 떠나기도 했다고 말할 정도로 고단한 삶이었다. 그렇다고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일도 거의 없고, 대형 조형물 제작을 의뢰 받기도 어려운 일이다. 세상살이가 그렇게 녹록치는 않았다. 그는 힘겹게 마련한 삶의 기틀을 정리해서 땅을 샀다. 자신의 맨몸으로 부대낀 세상에서 얻어낸 결과로 마련한 다소간의 자금을 그는 땅을 사는 데 투여한 것이다. 당시 지가는 평당 50만원. 농사를 짓거나 부동산 가치를 염두에 두고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를 위해 그의 땀과 땅을 맞바꾼 것이다. 그의 작업과 그의 가족의 삶을 받아 안아줄 터전을 마려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마련한 그는 집을 짓는 데 혼신의 힘과 정성을 바쳤다.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직접 집을 짓는 일에 나서서 매우 낮은 건축비용으로 2층짜리 작업실을 지었다. 115평의 대지 위에 1층은 34평의 작업실, 2층은 26평의 주거공간을 배치한 아담한 집을 지었다. 작업실 겸 집을 짓는 동안 두 번의 겨울을 허름하고 차디찬 곳에서 넘겨야 했다. 그것은 새 희망을 앞둔 마지막 고비였다. 어렵사리 지은 구산동 작업실에 입주한 것은 2000년 겨울의 일이었다. 이렇듯 어려운 시절을 넘기고 자신의 공간을 마련한 이후 그 모든 힘든 상황을 거쳐 이제는 자기 작업을 하는 것에 삶의 전부를 투여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너무 행복했다. 집과 작업공간을 해결한 후 그는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처음 구산동에 자리 잡은 것은 작업을 하기에 유리한 주변 환경을 고려한 결과였다. 돌공장과 주물공장과 금속작업 관련 기반시설이 활성화되어 있고, 서울 도심과 인접한 부도심이라는 점이 빠질 수 없는 장점으로 꼽혔다. 그는 번잡하지 않은 도시의 외곽에서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작가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빠로서의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고 보람차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또래집단에서 ‘모든 걸 직접 만들어주는 아빠’의 멋진 모습 또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소박하고 단란하게 살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사는 2층의 주거공간을 꾸리고 그 아래에 자신의 작업실과 그의 아내 장선영이 운영하는 푸르뫼창작공간을 꾸리고 있다.
서송은 일산의 작업실 작가들 가운데 비교적 일찍이 자리를 잡은 작가 중 한 명이다.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지역주민들과 친화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한 주민들과 한 동네에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서로 적응하는 시기가 필요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다소 외진 곳이어서 생활여건이 불편한 동네이다 보니 일반인들의 전원주택 개념보다는 필요에 의해 찾아드는 ‘작가들의 작업실 동네’ 개념이 더 어울릴 법한 동네이다. 작가들의 필요에 의해 동네가 만들어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수적으로 보면 작가들은 소수이고 다수의 지역주민들이 있다. 서송은 작업실을 열어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면서 이웃과 친숙한 관계를 만들어나갔고, 그들과 삶을 나누면서 점차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구산동을 제2의 고향으로 굳혀가고 있다.

서송은 최근에 한지를 이용해서 실험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빈번하게 출입하는 작업실이다 보니 아무래도 작업의 성향도 다분히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한지 작업이 더 어울려 보였다. 용접이나 절단, 절곡 작업 쪽 보다는 흙으로 빚어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입혀 종이부조를 떠내는 작업이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얘기다. 그 작품들에는 자신의 유년기 체험이 녹아 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시골 우물에 들어가본 경험을 이야기한다. 사방이 깜깜한 우물 속에서 바라본 하늘의 이미지와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 등이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기억을 되살리는 원형의 한지 부조 작업을 진행 중이다. 거기에다가 채색을 입혀서 다양한 기호들을 담아내고 있다. 일반적인 조소 작업과는 달리 부드럽게 다가오는 매체와 이미지들을 구사하는 그는 유연하게 전통과 자연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공간은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사용자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변모해 나가는 것이다. 공간 자체의 규정성에 따라서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떻게 활용하느냐 혹은 어떻게 고치거나 배치해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서송은 앞으로 작업실 공간을 개조해서 새롭게 공간을 연출해보려는 계획을 얼핏 내비췄다. 하드한 작업실 공간을 외곽으로 옮기고 지금의 공간은 소품을 제작하면서 미술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는 공간으로 꾸미고 싶은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지금의 공간은 여느 조소작가들의 경우처럼 하드한 작업을 하기에는 어려운 중성화된 공간이다. 위층의 주거공간이 있고, 아래층 작업실 엽에는 아이들이 드나드는 창작공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송의 작업실도 상당히 개방적인 구조와 쓰임새를 가지고 있다. 공간 구성이 사람의 활동을 규정하듯 역으로 사람의 필요가 공간을 재구성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 앞으로 서송이 만들어 나갈 또 다른 공간 연출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서송이 새로 만들 공간의 컨셉을 예측해 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문이 열린 작업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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