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은 어떻게 무리수를 두는가 : 알로곤 어페어 리뷰
critic & column | 2009/06/27 15:20
예술가들은 어떻게 무리수를 두는가
20세기 모델의 예술가 상이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모더니즘 시대가 열광해마지 않았던 천재적 존재로서의 작가의 위상이 ‘작가의 죽음’으로 공언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예술가 주체로부터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 화폐로 치환 가능한 예술상품의 생산자로서의 예술가 이상의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 예술가에게서 일상의 평범함이 아닌 일탈의 비범함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구축하고 직조하는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들의 존재를 수의 세계로 치환해서 얘기하자면 유리수가 아닌 무리수에 탐닉하는 존재들에 가깝다. 예술가들은 어떻게 무리수를 두고 사는가? ‘무리수 사건’을 다루는 이 전시는 세 명의 예술가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는 탈은폐와 비논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알로곤(alogon). 유리수가 아닌 수, 그래서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수. 무리수다. 피타고라스는 무리수를 발견하고는 그 존재를 은폐하려고 했으나, 그의 제자 히파수스가 무리수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히파수스는 그 댓가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것은 피타고라스 시대나 지금이나 지식에 관한 욕망과 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전시가 ‘무리수 사건’을 타이틀로 내세운 것은 무리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히파수스와 같은 예술가들이 실체를 알 수 없는 것, 풀어낼 수 없는 진실, 숨겨진 이야기들을 캐내고 들춰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각기 성향도 다르고 방식도 다른 고낙범과 노순택, 양아치 세 작가를 맥락화하는 프레임이다. 세 작가의 차이는 알로곤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동일성과 차별성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고낙범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비정형과 비논리이며 모순에 가득 찬 불완전한 세상이다.
고낙범의 출품작들 오각형이라는 도형으로부터 나온 파생변종 회화이다. 그의 신작들은 단일한 색채를 선택해서 거대한 초상화를 그리거나 인상주의 회화 작품에서 색 값을 추출한 후 수평의 색면으로 재구성했던 기존 작업들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것이다. 오각형은 사선으로 이뤄진다. 삼각형이나 사각형에 비해서 오각형은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안고 있다. 규율과 신비, 섭리를 의미하는 정오각형이 아닌 삐뚤어진 오각형들을 통해서 통제불가능한 에너지를 가진 예술가의 상상력을 드러낸다. 그가 펼치는 무리수 프레임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순택은 <얄읏한 공> 연작을 냈다. 노순택이 명명한 ‘얄읏한 공’은 지금은 사라진 마을 대추리를 지켜보고 있는 레이다 돔이다.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에 있는 거대한 공은 대추리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던 노순택에게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힘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대추리의 일상과 사건을 포착한 노순택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그 거대한 구체는 판옵티콘 그 자체이다. 이번 전시에는 개인전 이후의 파괴된 대추리 마을을 찾아서 찍은 미발표작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말에 전시장 문제로 수난을 겪었던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 : 들 가운데서> 때 손상된 액자를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작품의 팔자’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노순택에게서 히파수스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양아치의 루머건 시리즈 또한 정교하게 짜여있는 시스템에 균열을 내며 루머를 퍼트리는 가상의 존재를 등장시킨다. 미들코리아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그것을 알로곤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의 공간으로 삼아온 양아치는 예술가의 존재가 상상공간 속의 액티비스트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양아치의 분절적 상상체계들은 일련의 서사 구조 안에서 점점 맥락을 형성해가고 있다. 저격수 차지량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의 가상의 캐릭터들 만들어 내고 김씨 공장(Gim's Factory), 바이크, 루머건 등의 설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꾸준히 이어나가는 스토리 텔러의 면면이 분절적이면서도 맥락화한 사진과 드로잉 작업들에 담겨있다.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판명가능한 수인 유리수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무리수를 끄집어내는 예술가 주체의 존재는 예술을 문화상품 이상의 것으로서 여전히 유효한 사회적 노동의 한 요소임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예술가 주체의 존재 자체가 무리수와 같은 비논리의 세계일 수 없다. 예술가 주체 또한 세계의 정교한 시스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비예술가와 변별하는 지점은 그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는 시도를 감행한다는 점이다. 이 전시의 미덕은 세 작가의 작품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와 개체, 전체와 부분, 시스템과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분주히 오가면서 무리수 두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들춰냈다는 데 있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2009년 7월호 아트인컬쳐 기고문 : [알로곤 어페어] 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