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전업구상조각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 이정자

critic & column | 2006/05/09 08:16


아뜰리에 탐방 : 이정자

여성전업구상조각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작업실은 작가가 머무는 곳이며 작품을 만드는 곳이다. 나는 작업실에 가면 그 작가가 평소에 사용하는 기구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곤 하는데, 그의 작업실은 매우 특이한 점이 많다. 출입구에 ‘작업실’이라고 써서 붙여놓은 것도 인상적이고, 이웃의 상가건물들과 어울린 아담한 작업실의 촘촘한 배치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자동차 부품을 개조해서 만든 작업대가 가장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화구들이 놓여있었다. 입체와 평면을 오가면서 작업하는 재미에 빠져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촘촘하게 사람내음이 배어있다. 커다란 작업실을 모두 정리해서 집근처로 옮겨서 아담하게 자리잡은 상가건물 2층의 그의 작업실은 거창하게 꾸민 전원작업실이 아니라 삶의 처소에 뿌리내린 그야말로 작업하는 공간 그 자체다. 작업실이란 원래 작가의 손때 묻은 삶의 터전인지라 집근처 작업실은 더욱 살뜰하다.
그는 요즘 그림을 그리면서 회화적 표현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조만간 페인팅과 조각을 같이 전시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작업에 변화를 주기 위한 모색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고민이다. 처음에는 조각에 컬러링을 하려고 몇 가지 도색작업을 실험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내친김에 직접 붓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변해서 작업실에서 본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수가 쌓여있었다. 그림은 그에게 있어 다양한 방법으로 감성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작업의 화두인 감사와 평화, 위로 등의 요소들은 조각이나 회화 모두에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지만,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실험들을 계속해나가는 일을 숙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밝은 성품과 섬세한 감성은 조각과 회화 작업 속에 골고루 들어있다.
이렇듯 조각과 회화를 섞어 보기까지 그는 조각이라는 이름 하나로 한 삶을 꾸려왔다. 조각을 둘러싼 창작과 비평의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 한국현대 조각계가 그랬다. 오늘날의 조각 또는 조각가 정체성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가지고 있는 ‘전업여성조각가’ 이정자는 수십 년간 구상조각을 해왔다. 한국에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여타의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한 자생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전적으로 예술창작활동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작가들이 자신의 삶과 예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작가들이나 시민사회 모두가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환경 아래서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관되게 지켜나가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있어 조각은 숙명이다. 장구한 조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서구적 개념인 근대조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백년에 못 미친다. 따라서 근대적인 예술개념 아래서 이뤄진 조각의 역사는 충분한 성숙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이렇듯 무르익지도 못한 조각이 20세기 후반 들면서 급격하게 퇴색해버린 것이다. 덩어리와 공간, 형태, 선 등 조각 본령의 미적 가치들을 완숙한 경지에서 즐기기도 전에 패러다임이 전환해 버린 것이다. 조각의 기본적인 가치를 얻기도 전에 색과 빛 등의 요소로 건너뛰어 버렸다. 게다가 제도화된 조각 상품인 환경조각이 주인노릇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술장식품이라는 이름으로 환경미화 차원에서 시작된 거대한 조각에 매달려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조각가들에게 스스로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미술장식품제도가 작가의 작업을 돕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조각계 안팎의 중론이다. 적지 않은 작가들이 조형물 작가로 변했다. 그는 ‘조각=조형물’이라는 등식을 넘어서는 작가의 상을 강조한다. 그는 조형물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순수성을 추구한다. 조형물 개념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순수미술. 그것이 평생 손에서 흙을 놓지 않은 작가의 마음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한국의 조소예술은 역사 시기 이후 꾸준히 유력한 조형방법으로 자리 잡아 왔다. 서울시내에만 해도 조각의 전통을 접할 수 있는 근대의 유산들이 많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의 조각 작품에는 근대적 의미에서 말하는 ‘예술가의 창작품’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근대적 의미의 조각개념이 도입된 건 20세기 초반 이후 예술이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면서 전시라는 제도가 생겨나고 해방 이후 점차 미술시장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그는 60년대부터 작가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현대미술계에서 조각이 발전해온 역사를 오랜 세월 몸소 체험한 것이다. 세기가 바뀌고 많은 변화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관통하는 작가의 가슴 속에는 한결같이 작업에 대한 순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지금도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한달이 걸린다고 한다. 현대의 급속한 속도 경쟁에 비하면 턱없이 느리고 경제적이지 않은 방법이다. 속도에 밀려서 ‘작업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느리고 비효율적인 조형방법을 통해서 인간 본성의 육체적인 감성을 지켜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는 구상조각을 하면서 마치 기초과학이 응용과학을 낳는 것처럼 사람의 몸으로 실현하는 미적 체험의 순정을 찾아왔다. 변화하는 세태는 새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흉내 내기에 바쁘다. 젊은이들은 천천히 가는 분위기에 너무 인색하다. 아마 그들도 세상을 좀 더 살아보면 직접 손으로 작업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알 것이라는 기대마저도 이미 그들의 몫으로 넘겼다. 세상살이가 어려워도 예술의 본질을 찾아 가는 모습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예술가의 긴 여정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순정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업작가라는 점과 더불어 여성작가라는 점 또한 그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조건이었다. 그가 여성작가로서 한생을 굴려온 과정들 또한 녹록치 않았다. 그는 이화여대 61학번이다. 백문기, 최의순, 송영수 등의 학부시절 스승과 대학원 시절 최종태, 김경승 등의 스승을 만났다. 그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고3때 <친우두상>이라는 작업으로 국전에 입선을 하기도 했고, 이후에 대학 4학년 때는 국전에서 특선을 했다. 지금이야 국전이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권위를 잃었지만, 그때는 거의 유일한 작가 등용문이었다. 신진작가 시절, 그는 정말 열심히 작업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만큼 성과도 얻었고, 희망도 컸을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도 한 차례 큰 좌절이 있었다. 70년대 후반 서른일곱 나이에 모교의 강사생활을 접은 것이다. 여성으로서 여대를 나왔다는 점이 장애로 작용한다는 점 때문에 젊은 나이에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얻었다. 그에게 여성작가라는 칭호가 각별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좌절을 딛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살아남는데 여성이라는 조건은 여러 가지로 많은 어려움으로 작용했지만, 그는 두 아이를 길러낸 엄마로써, 지금까지 작업을 해온 전업작가로서 두 가지 길을 잘 지켜왔다. 여성이라고 봐주는 시기는 지났다. 오히려 그는 ‘여성이기 때문에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도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평등한 조건을 만드는 일과 별개로 여성 자신들도 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술단체를 만들고 함께 하는 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구상조각대전을 만드는 데 동참했고 전업작가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단체 활동을 하는 것이 작품활동을 방해하는 번거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80년대 이후에 꾸준히 단체활동을 통해서도 미술창장 환경이나 미술정책의 문제에 관여해 온 것이다. 그가 작업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비구상 작가들이 대학 교수가 되려고 애쓰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구상 작가들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이 거꾸로 되는 분위기가 생겼다. 작가 구실을 하려면 대학교수 타이틀을 달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전업작가들이 점점 내몰리는 분위기가 생긴 것이다.
또 다른 배경은 90년대 들어서 50-60대 작가들이 배제되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50대 이상의 작가들이 설 땅이 없다면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 또한 무의미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30대 작가들은 실험기를 거치면서 작가 정체성을 혼란기를 극복하는 작가들이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시각들이 미술계를 주도하는 데에 따른 위험부담은 생각보다 그 파장이 클 수도 있다. 전업작가회는 이러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생긴 단체이다. 순수작가들의 모임, ‘전업작가회’. 보험이나 여권 문제 등을 포함해서 국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갖기 어려운 작가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창작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생긴 단체이다. 이러한 단체의 일은 그가 작업을 하면서 작가로서 살아나가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가 단체일에 나선 것은 그가 작가로서 살아나가는 삶의 한 과정이었다.
요즘 조각계의 가장 큰 공통 관심사 중의 하나가 공공미술 입법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된 사안이기도 한데, 특히 작년에는 입법추진 단계가 본격화 되어 공청회 자리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들 총론에는 동의하지만 각론에서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한다. 이런저런 제도와 규정들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지만, 그가 우려하는 가장 큰 문제는 ‘작가에 대한 존경’이다. 이 문제는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작가들 스스로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공공미술 제도 개선이 작가들의 자존심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돈 쫓는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명제 앞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예술가란 자존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조형물 제도가 선후배의 갈등을 조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돈 따라가는 작가는 진정한 작가로서 성장할 수 없다는 정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돈을 따라다니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 환경조각은 조각계의 얼굴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환경조형물이 오히려 환경공해물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조각가의 한 사람으로써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일부 작가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나 많은 작가들에게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만들어 왔던 미술장식품법이 공공미술법으로 바뀐다고 하는데, 그로서는 여간 염려스러운 게 아니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라면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경쟁적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좋은 작업하는 작가들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희망이 어느 정도나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을지는 몇 해 세월이 흘러야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미술계에 산재한 다양한 창작과 비평과 제도를 둘러싼 담론들이 각각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다양한 시각들은 통합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간 대화의 대상이다. 생각의 차이를 줄이기 위한 의논들이 필요하다. 90년대 이후에 30-40대 작가들 키우기 전시가 쏟아지면서 기획전들이 죄다 그쪽 분위기로 몰렸다. 정부의 지원도 마찬가지였다. 설치미술 일색으로 쏠렸던 분위기도 문제였다. 결국은 설치미술도 흐지부지 뒷심을 잃었다. 당시의 중견과 중진 작가들이 소외감을 느꼈던 것은 한국미술계 전체의 커다란 실수 가운데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우리미술이 걸어온 과정에 대해 균형감각을 가지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대와 영역에 걸친 풍부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가 쌓아온 ‘여성전업구상조각가’라는 정체성이 갈등과 분열을 통합과 조화로 변화시키는 데 있어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작동할 시점이다.

김준기(미술비평)
2006/05/09 08:16 2006/05/09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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