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2 : 양달석, 기록과 기억 너머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4/1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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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2 : 양달석

양달석, 기록과 기억 너머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


“나는 고통 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68세에 이른 노화가 양달석은 1975년에 한 일간지에 연재한 비망록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시대적 질곡과 개인사적 고통으로 가득 찬 이 풍진 세상을 예술가로 살았다. 50년간 2천6백 여점을 헤아리는 그림을 그려낸 전업화가이다. 20대 중반 이후 부산에 정주하면서 전국화단에 양달석이라는 이름을 남긴 20세기 한국 근대화단의 대표 작가이다. 1995년에 문화부가 주도한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는 전국의 근현대 미술 유적지를 선정해서 표석을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남 거제에 있다. “거제시 사등면 성내리 717은 양달석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그 역사성을 기념하여 여기에 표석을 세우다. - 문화체육부 95”. 양달석 생가 표석의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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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908년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조선 사람으로서 유년기에 부모를 잃고 큰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자랐다. 학창시절 국어교육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동경 유학길에 오르지만 병을 얻어 중도하차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생계가 막막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해방 후에는 미술단체 대표를 맡은 전력과 회색을 쓴 그림 때문에 모함을 받아 좌익으로 몰려 고문을 받기도 했다. 두 명의 어린 자식을 그림 때문에 먼저 보내야했던 뼈아픈 삶의 체험도 있었다. 1972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중풍을 얻은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양달석은 한국의 근대미술을 일군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자, 부산지역을 토대로 한 미술생태 형성과 성장의 주역이다. 그는 해방 후 국가공동체의 재건 과정에서 미술단체의 대표를 맡아 미술제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후 평생을 전업화가로서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을 오가는 화가로서 국전 초대작가의 영예를 얻었다. 지금이야 공모전의 권위가 나락으로 추락한 상태지만, 일제시대의 조선미술전람회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약칭 선전과 국전은 절대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활동을 승인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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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밑에서 소낙비를 피하는 아이. 소를 타고 낮잠 자는 아이. 양달석의 그림은 소와 목동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집결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소와 목동’ 이외에 주목할 대목들이 많다. 일제시대 이후 농촌의 실경을 그린 그림들이 초기작의 주요 모티프이다. <부활>(1950)이나 <판자촌>(1965)처럼 형태와 색채가 어울려 반추상의 린 강렬한 조형세계를 선보인 작품도 있다. 자화상 연작들은 자신을 광대에 비춰 생의 한가운데 선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꽃 모티프의 강렬함도 그의 명작들 가운데 손꼽히는 대목이다.

유년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선장수, 어촌 등의 풍경이나 장면들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1940년대에 그린 <나물 캐는 여인>이나 1950년대의 <생선장수>, 새참 먹는 장면을 그린 <농부들> 등의 그림은 농촌사회의 생생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관상보는 사람>(1963)은 수묵담채화 같은 그림으로 유머가 넘치는 표정들과 현장을 포착한 감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양달석은 다양한 관심사와 화풍으로 20세기 한국사회의 변천을 기록하고 기억한 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달석하면 소와 목동을 떠올리는 것은 그 양과 질이 월등하기 때문이며, 그 그림들이 작가의 체험과 진솔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달석의 소는 착한 소이다. 이중섭에서 사석원에 이르는 격렬한 모티프의 소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전에 그린 양달석의 소에 관한 비평적 언급들은 야수파 화풍을 가진 양달석의 소가 마냥 착한 소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관심사가 조선향토색 논쟁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1930년대 조선향토색 논쟁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농촌공동체를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관통한 조선화가들의 조선향토색풍의 그림들은 패배주의 젖어있던 1930년대말 이후 일반적인 경향성으로 나타났다.

선전은 당대의 현실을 들춰내기보다는 일본인 심사위원들에게 호소하는 이국취향의 그 무엇이었다. 예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하기보다는 조선반도라는 식민지 영토의 풍토색을 강조함으로써 겉으로는 지역성이나 종다양성을 용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예술을 박제화한 불구의 시선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그렇다면 1940년을 전후로 한 양달석의 소와 목동이라는 소의 그림들은 향토색 논쟁에 있어 어떤 위치를 가지는가? 양달석의 그림은 조선의 풍토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제의 문화정책이 요청한 향토색과는 다르다. 양달석의 그림은 자신의 어릴 적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 농촌사회를 이상향이 아닌 현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백부 댁에서 자라면서 소 먹이러 나갔다가 잠시 조는 사이에 소를 잃어버리고 쫓겨나서 밤새 울다 새벽에 소를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일화는 훗날 소와 목동을 그리는 화가 양달석의 자전적 체험으로 자주 거론되곤 한다. 양달석이 주목한 농촌 풍경은 농경사회의 전통적 감성이 해방 이후 산업사회로 이행하던 시기까지 지속되었음을 알려준다. 그가 많은 작품을 남긴 20세기 후반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던 근대화 시기이다. 그는 전업화가였다. 자신의 그림을 구입해주는 콜렉터들의 취향이 전원생활, 목가풍경 등이었으며 양달석은 기꺼이 그러한 도상들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주요한 모티프로 활용했고 다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박수근이 나목과 아낙네를 그렸듯이 양달석은 소와 목동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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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석과 조선향토색을 변별하는 또 한 가지 결정적인 단서는 양달석 자신이 밝힌 선전 출품작 낙선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고향’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에 어긋나 기대했던 특선이 아닌 낙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일제가 기대했던 조선향토색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에 제국주의 시각으로 박제화한 조선향토의 미감, 차이가 아니라 차별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던 근대주의의 ‘내려깐 눈(down cast eyes)’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감성의 표현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와 해방공간의 갈등, 한국전쟁의 뼈아픈 상처를 넘긴 현실 삶 너머의 이상향을 지향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은 일제의 문화정책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일러스트 풍의 화면 구성과 간략한 표현으로 이어진 채색들은 민화의 특성과 일치한다. 민화 전통과 연계한 양달석의 그림은 요즘 우리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중진 이희중의 민화풍 그림이나 민화를 차용해 감각적인 회화를 보여주는 젊은 작가 홍지연으로 이어지는 작풍의 선례로 언급할만하다. 박제화한 전통 소재의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 매우 세련된 감각의 동시대성을 획득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이다. 후반기의 그의 그림은 윤곽선이 살아있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으로 나뉜다. 1972년 중풍을 얻어 정교한 붓놀림이 어려워진 이후에 양달석은 오른 손이 아닌 왼손으로 그리거나 손에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현실과 이상향을 동시에 담고 있다. 풍경의 부분을 포착해서 그 위에 소와 아이를 배치하거나, 저 푸른 초원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와 목동을 조망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실경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실재 풍경을 통해서 당대의 삶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강한 원색이나 미색 계열의 색채를 구사함으로서 밝고 맑은 이상향을 화면 속에 구현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생긴 판자촌의 야경을 그려낸 수채화 <판자촌>이 그 예이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빛과 사람들의 실루엣이 묻어난다. 당대의 애환이자 낭만을 진하게 담고 있다. 1954년 작 <목동>은 풀꽃이 만발한 들판에 작은 둔덕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전경과 원경의 원근법적인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화면 전체를 수평적인 요소의 나열로 채운 그림이다. 전면회화의 특성을 보이는 양달석의 대표작이다.

소와 목동의 화가 양달석. 고통 속에서도 목가적인 이상향을 그려 예술적 영예를 획득한 불굴의 화가 양달석. 이러한 수사는 현대적 의미의 예술을 개척하며 살아온 그에 삶에 비해 다소간 부족한 말들이다. 그가 부산에서 예술가로서 살았다는 것. 그것도 예술로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제도와 관행이 부재한 시대에 태어나 미술문화를 만들고 길러내며 한 평생을 살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양달석의 그림은 근현대기 부산과 20세기 한국의 트라우마를 담고 있는 삶의 기록이자 역사의 기억이다. 나아가 그것은 자기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이다. 양달석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세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자신의 자기극복, 즉 구원의 세계’라고 말했다. 예술은 작가 자신의 자기 구원이며 한 시대와 동행하는 시대정신이다. 부산미술 다시 읽기의 출발점에 서서 기록과 기억 너머 치유와 구원으로서의 예술을 다시 생각한다.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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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달석(梁澾錫, 1908-1984)은 경남 거제 출생으로 본관은 남원이며 호는 여산(黎山)이다. 거제의 유명한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큰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에 통영의 사립청년학원을 거쳐 진주농업학교에 진학해서 그림을 시작했다. 1932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로 입선한 후에 동경에 건너가 제국미술학교를 다녔지만 병을 얻어 마치지 못하고 돌아와서 부산에 정착했다. 1930년대부터 자신의 성장기를 바탕으로 한 농촌의 풍경과 장면을 그렸는데, 면서기를 하면서 1932년, 38년, 39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입선했고, 1940년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과 춘광회 동인활동을 했다. 1940년 부산미술전 서양화부 최고상을 수상했으며, 1945년부터 약 2년간 경남상고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미술동맹에서 출발해 이내 바뀐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맡았으며(1946-1949년), 한국전쟁동안 종군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3년 경남 문화상을 수상했고, 197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출품했으며 1984년 작고할 때까지 화업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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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부산일보에서 편집한 글임.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② 양달석 (梁澾錫·1908~1984)

소와 목동의 화가 근·현대기 역사를 담다


"나는 고통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1975년 67세에 이른 노화가 양달석은 한 일간지에 연재한 비망록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시대적 질곡과 개인사적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예술가로 살았다. 50년간 2천600여 점을 헤아리는 그림을 그려낸 전업화가이며, 20대 중반 이후 부산에 정주하면서 전국 화단에 이름을 남긴 20세기 한국의 작가이다.

그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908년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부모를 잃고 큰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성장했다. 학창시절 국어교육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병을 얻어 중도하차하고 귀국했다가 생계가 막막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해방공간에서는 좌익으로 몰려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72년에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중풍을 얻었다. 두 명의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뼈아픈 체험도 있었다. 그러나 양달석은 그런 고단한 삶의 고통 속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양달석은 한국의 근대 미술을 일군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자, 부산지역을 토대로 한 미술생태 형성과 성장의 주역이다. 평생을 전업화가로서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을 오가는 화가로서 국전 초대작가의 영예를 얻었다. 일제시대 조선미술전람회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절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활동을 승인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소 밑에서 소낙비를 피하는 아이. 소를 타고 낮잠 자는 아이. 양달석의 그림은 소와 목동이라는 단일한 모티프로 집결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소와 목동' 이외에도 주목할 대목들이 많다. 일제시대 이후 농촌의 실경을 그린 그림도 많다. 1965년작 '판자촌'처럼 형태와 색채가 어울린 강렬한 조형세계도 있다. 자화상 연작들은 자신을 광대에 비춰 그린 인물 연작들이다. 꽃 모티프의 강렬함도 그의 명작들 가운데 손꼽히는 대목이다. 바다 연작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선장수, 어촌 등의 풍경이나 장면들을 그렸다.

특히 1940년대에 그린 '나물 캐는 여인'이나 1950년대의 '생선장수', 새참먹는 장면을 그린 '농부들' 등의 그림은 생생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1963년 작 '관상보는 사람'은 수묵담채화 같은 그림으로 유머가 넘치는 표정들과 장면을 포착한 감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양달석은 다양한 관심사와 화풍으로 20세기 한국사회의 변천을 기록하고 기억한 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론할 때마다 소와 목동을 떠올리는 것은 그 양과 질이 월등하기 때문이며, 그 그림의 진정성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달석의 소는 착한 소이다. 이중섭에서 사석원에 이르는 격렬한 모티프의 소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전에 그린 양달석의 소에 관한 비평적 언급들은 야수파 화풍을 가진 양달석의 소가 비상하게 보였음을 증거한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관심사가 조선 향토색 논쟁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1930년대 조선 향토색 논쟁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민속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서 조선 향토색 풍의 그림들은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1930년대 말 이후 조선의 화가들에게 일반적인 경향성으로 나타났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당대의 현실을 들춰내기보다는 일본인 심사위원들에게 호소하는 이국 취향의 그 무엇이었다. 예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하기보다는 조선 반도라는 식민지 영토의 풍토색을 강조함으로써 겉으로는 지역성이나 종다양성을 용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예술을 박제화한, 불구의 시선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그렇다면 1940년을 전후로 한 양달석의 소와 목동의 그림들은 향토색 논쟁에 있어 어떤 위치를 가지는가? 변별점을 찾을 수 있다. 양달석의 그림은 자신의 어릴 적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백부 댁에서 자라면서 소 먹이러 나갔다가 잠시 조는 사이에 소를 잃어버리고 쫓겨나서 밤새 울다 새벽에 소를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일화는 훗날 소와 목동을 그리는 화가 양달석의 자전적 체험으로 자주 거론되곤 한다.

그는 일제시대에 제국주의 시각으로 박제화한 조선향토의 미감, 차이가 아니라 차별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던 근대주의의 '내려깐 눈(down cast eyes)'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감성의 표현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해방공간의 갈등, 한국전쟁의 뼈아픈 상처를 넘긴 현실 삶 너머의 이상향을 지향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이다. 이는 농촌 모티프가 농경사회의 전통적 감성이 해방 이후 산업사회로 이행하던 시기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가 많은 작품을 남긴 한국전쟁 이후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던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 시기이다.

그는 전업화가였다. 자신의 그림을 구입해주는 콜렉터들의 취향이 전원생활, 목가풍경 등이었으며 양달석은 기꺼이 그러한 도상들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주요한 모티프로 활용했고 다수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박수근이 나목과 아낙네를 그렸듯이 양달석은 소와 목동을 그렸다.

일러스트 풍의 화면 구성과 간략한 표현으로 이어진 채색들은 민화의 특성과 일치한다. 민화 또는 전통과 연계한 양달석의 그림은 요즘 우리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중진 이희중의 민화풍 그림이나 민화를 차용해 감각적인 회화를 보여주는 젊은 작가 홍지연을 연상하게 한다. 박제화한 전통 소재의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 매우 세련된 감각의 동시대성을 획득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이다.

후반기의 그의 그림은 윤곽선이 살아있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으로 나뉜다. 1972년 중풍을 얻어 정교한 붓놀림이 어려워진 이후에 양달석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그리거나 손에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실재 풍경을 바탕으로 당대의 면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강한 원색이나 미색 계열의 색채를 구사함으로서 밝고 맑은 이상향을 화면 속에 구현하기도 했다. 1950년 작 '판자촌'은 전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생긴 판자촌의 야경을 그려낸 수채화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빛과 사람들의 실루엣이 묻어난다. 풀꽃이 만발한 들판에 작은 둔덕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전경과 원경의 원근법적인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화면 전체를 수평적인 요소의 나열로 채운 전면회화의 특성을 보인다.

소와 목동의 화가 양달석. 고통 속에서도 예술적 영예를 획득한 불굴의 화가 양달석. 이러한 수사는 현대적 의미의 예술을 개척하며 살아온 그에 삶에 비해 다소 부족한 말들이다. 그가 부산에서 예술가로서 살았다는 것. 예술로써 대화하고 소통하는 제도와 관행이 부재한 시대에 태어나 미술문화를 만들고 길러내며 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양달석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세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자기극복, 즉 구원의 세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예술은 작가 자신의 자기 구원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와 동행하는 시대정신이다. 그의 그림은 자기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였으며, 나아가 근현대기 부산과 20세기 한국의 트라우마를 담고 있는 역사의 기억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양달석 (梁澾錫·1908~1984)
호는 여산(黎山)이다. 경남 통영의 사립청년학원, 진주농업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를 다녔다. 부산에 정착한 1930년대부터 자신의 성장기를 바탕으로 농촌의 풍경과 장면을 그렸다. 1932·1938·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고, 1940년 부산미술전 서양화부 최고상을 수상했다.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과 춘광회 동인활동을 했으며, 1945년부터 2년간 경남상고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맡았으며(1946~1949), 6·25전쟁 당시에는 종군화가로 나서기도 했다. 197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로 출품했다.


2008/04/15 11:34 2008/04/1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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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8/05/13 15:24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김피디 2008/05/13 23:13

    ㅎㅎ
    센스있는 선택!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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