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개념 문화공간과 미술관의 대응 : 한국큐레이터협회 세미나 발제문

critic & column | 2008/05/30 04:47


신개념 문화공간과 미술관의 대응

1.
전시장은 근대를 매개한 공간이다. 전시장이라는 소통 공간을 체험한 관객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과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과 더불어 이른바 공공의 영역을 형성하는 공중(le public)으로 자리 잡았다. 전시장과 공연장과 소설 등과 같은 공공연한 논의 장이 생김으로써, 다시 말해서 문화예술의 수취인으로 진화한 시민계급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공공영역이 태동했다. 따라서 전시장은 근대정신을 전취하는 데 커다랗게 기여한 제도공간이다. 한국사회가 전시장이라는 제도 공간을 만들고 키워온 지 어느새 1백년이 지났다. 제도나 관행에 있어서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한국의 전시장은 수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 그러나 체계적인 학습과 체험을 결여한 채 서구문물 수용의 일환으로 출발한 전시공간은 아직 시민사회 속에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서구 사회처럼 초기형태의 공공영역을 매개하는 진화단계를 제대로 밟지 못한 채 제도의 이름으로 대중을 호명하는 공간으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자생적인 미술문화공간을 경험한 역사가 짧다보니, 문화제국의 신화를 학습한 시민들은 아직도 서구의 근대 유명작가들로 구성된 서구미술의 퍼레이드에 길게 줄을 서서 대중을 호명하는 상업주의 전시 콘텐츠에 빨려들어 가고 있다. 부끄럽지만 우리의 자화상이다. 서구로부터 들여온 전시공간이라는 제도는 서구의 콘텐츠를 반복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서구를 학습함으로써 근대와 조우했던 한국의 미술문화 공간은 근대성을 전취하기도 전에 탈근대적 징후와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 어느 집단보다도 신속하게 압축성장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광주와 부산, 그리고 서울로 이어지는 대규모 비엔날레를 보라.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날로 늘어가는 국공립미술관들 또한 빠르게 양적 팽창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공공미술관이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립미술관들도 있다. 화폐가치의 자기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미술시장의 성장에 따라 화랑들의 전시공간 또한 폭발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들이 어떠한 문화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데 있다. 근대적 문화정치의 장으로서 기능해온 전시공간이 향후 어떻게 진화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예술적 실험을 통해서 진화하는 전시공간의 꼼꼼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다른 대부분의 문제도 그렇지만, 전시공간이라는 제도영역을 과연 우리사회의 어떠한 위치에 배치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문화정치적 관점이 부재한 상황이 문제다. 특정소수의 하비투스에 초점을 맞춰 문화권력을 재생산해왔던 전시공간이 대형화 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근자의 대형 전시공간들이 19세기 버전의 서구문화 콘텐츠의 권위를 빌어 21세기 한국사회에 문화식민의 골을 깊게 각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기존의 예술제도와의 싸움을 위한 제도비판의 지위와 역할을 갖기에 이르렀다. 근대적 제도에 대한 도전과 실험. 그것은 탈근대를 통해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고자하는 시대정신이다.

2.
전근대와 근대, 근대와 탈근대가 뒤엉킨 한국의 전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성찰적인 문화정치를 위한 상징투쟁들이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 한 시대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절대 기록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희망은 거기 작고 낮은 목소리들 속에 숨어 있다. 한국의 전시공간들은 기성의 제도공간과 차별화한 새로운 실험을 관통하면서 탈근대적 문화정치를 매개하는 문화생산의 전초기지로 진화하고 있다. 전시회라는 장을 중심으로 양적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의 미술문화공간은 대안공간의 출현으로 제3섹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안공간마저도 또 하나의 기성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갈 무렵 또 다른 대안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미술문화공간의 대안성을 실험하고 있는 신개념 문화공간은 복합문화공간의 확산, 소규모 공간의 활성화, 미술시장의 다각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증대 등과 같은 근간의 주목할 만한 현상들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전시공간의 진화를 매개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단연 복합문화공간의 확산이다. 복합문화공간은 이미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대세이다. 전시장을 비롯해서 아카데미, 공연장, 카페, 레스트랑, 아트숍, 연구소 등이 공존하는 모델이다. 생산과 향유를 동시에 매개하는 곳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여기에 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작품 생산과 전시와 판매를 연동하는 흐름도 강세다. 작업실과 전시장, 공연장, 소비와 휴식공간 등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막강한 자본력을 동원한 공격적인 경영 전략, 복합문화공간을 통한 이윤창출의 다각화와 안정화, 컬렉터에서 갤러리스트로의 일대 변신 등이 갤러리 공간 전략의 핵심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지금 같은 몸불리기가 시장의 변동에 따른 유연성을 떨어트릴 위험이 있다는 점, 미술문화의 종다양성을 잠식할 수 있다는 점, 전문 인력의 부족에 따른 콘텐츠의 부실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 등 많은 우려를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비평적 언술에서는 비켜나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미술시장의 활황을 배경으로 한 실재상황이라는 점이다.

소규모 공간의 활성화 또한 중요한 현상이다. 신개념 문화공간은 대규모일 수도 있지만 수규모일 때 더 빛이 난다. 소규모 문화공간의 매력이 복합문화공간의 진짜 묘미를 살릴 수도 있다. 한 공간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힘은 역시 규모보다는 마인드에서 나온다. 대규모 공간도 좋지만 작은 공간의 묘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정말 따뜻한 감동과 안식을 주는 일상 속의 미술문화공간은 규모와 무관하다. 거대한 규모로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경우보다는 특성있는 작은 공간을 꾸리는 일이 복합문화공간의 개념에 더 맞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 도심의 고궁 담장 옆에 있는 한 대안공간과 그 옆의 작은 카페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서울 홍대앞에서는 다원예술매개공간이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문화플래닛 상상마당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 제도공간의 성패여부 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 홍대앞이 번성해지자 홍대옆에 더 재미난 작은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다. 작지만 의미있는 새로운 문화생산의 동력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얘기다. 이미 자본화 한 홍대 앞은 스스로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홍대옆의 작은 문화공간의 종다양성과 공존하면서 동반생존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은 여러 장르의 공존을 매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장르 파괴나 혼융을 주선하면서 탈근대적인 문화정치를 매개하는 일. 이것이 진화하는 전시공간의 당면 과제이다.

미술시장의 다각화 양상 또한 미술계 전체의 공간 개념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미술문화공간의 변화를 주도하는 흐름 가운데 하나가 한 단계 진화한 공간 개념으로 진화하는 커머셜 갤러리들의 변모이다. 서울에서는 강북에서 강남으로의 중심이동 추세가 완연하다. 청담동의 한 빌딩으로 유수의 갤러리와 옥션 회사들이 동거에 들어가거나 강북 화랑이 강남에 분점을 내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공공연하게 새로운 힘의 구심으로 언급되고 있다. 전통문화의 외피를 두른 채 문화적 포퓰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인사동에 비해서 호젓하게 미술문화의 매니아들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종다양성의 이치를 거스르며 동종교배를 거듭할수록 건강한 흐름을 상실할 것이라는 문화생태적 비판이 교차하고 있다. 부산의 경우에도 해운대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옥션과 갤러리가 대형공간을 새로 여는 추세다. 천혜의 공간 조건과 신생공간의 장점을 안고 영남동 문화벨트의 허브로 떠오르고 있지만, 미술문화의 저변이 약한 상황에서 소수의 고공행진이 미칠 한계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탄탄한 미술시장을 가진 대구에서도 신생 공간의 등장과 옥션과 같은 시장의 다각화 추세가 완연하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미술문화공간을 향유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문화생산을 매개하는 기관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공기관의 문화정치도 예술생산을 담보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광역지자체와 기초단체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문화예술정책을 펴고 있다. 충북 청주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하이브는 대규모 복합문화체험장 속에 창작스튜디오를 만들어 젊은 작가들의 작업 공간과 더불어 새로운 소통의 채널을 만들었다. 청주시는 또한 지자체로서는 최초로 독자적인 미술창작스튜디오를 만들어 운영을 본격화하고 있다. 쌈지와 영은 등과 같은 사설 기관으로부터 출발해서 창동과 고양의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로 이어진 레지던시 공간은 서울과 광주 등의 시립미술관이 가세하면서 궤도에 올랐다. 장흥에 들어선 대규모 작업실 단지는 전시공간 일변도의 흐름을 깨고 새로운 생산과 매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한 대도시에서 베이징의 따산즈를 벤치마킹하는 대규모 미술문화공간을 준비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도심의 유휴공간을 활성화하여 예술의 생산과 향유를 매개하고자 하는 이 프로젝트는 수만평 규모의 대형 건물에 수백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본격적인 공간활성화 개념의 문화정책사업을 펼칠 예정이서 그 향배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3.
복합문화공간 및 소규모 지향, 미술시장의 팽창,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증대 등과 같이 신개념 문화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비평적 의미를 생산해 내고 있다. 담론생산 기능의 강화, 의제 특성성의 발견, 작업실 담론의 활성화, 근대적 공간분할 개념을 넘어선 탈분화 개념 등이 그것이다. 전시공간은 물질기반의 미학적 소통의 공간에서 담론생산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전처럼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화이트 큐브를 지향하는 공간은 갤러리 공간들의 변함없는 추세이긴 하지만, 다수의 공간들이 기성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틀에 박힌 사각공간을 고집하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창의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외형상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신개념 공간들은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관람객들에게 감성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물질기반의 시각 정보 소통 공간일 뿐만이 아니라 예술 생산과 매개, 나아가 향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담론을 유포하고 토론하며 격렬하게 논쟁하는 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들 공간은 아카데미를 열고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며 온라인 공간을 활성화하는 등 공간의 개념과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하고 있다. 정보와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은 미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전시공간 개념까지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신개념 문화공간을 추동한 또 하나의 모티프는 장소 특정성을 넘어서는 의제 특정성의 발견에 있다. 광주에서는 대인시장 인근의 창고 공간을 개조해서 새로운 개념의 미술문화공간을 여는 일이 진행 중이다. 광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와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이 공간은 인근 시장을 중심으로 도시공간 자체를 대상으로 문화생산에 직접 개입하고 참여하는 장소특정적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인천의 스페이스 빔 또한 유휴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공간을 옮기면서 새로운 문화생산 기지로 상승무드를 타고 있다. 안양의 대안공간 스톤앤워터는 대안공간들 가운데서도 해당 지역의 장소특정성(site specific) 뿐만 아니라 의제특정성(issue specific)을 살린 대표적인 공간으로 손꼽힌다. 해당 지역의 생생한 이슈를 발굴하고 예술적 실천의 목표로 설정하며 예술생산과 매개, 그리고 향유의 과정을 공유해 나가는 과정은 진화하는 미술문화생산이다.

안산의 ‘국경없는 마을’에 위치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는 경기문화재단의 공간재생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발했다. 이 공간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이곳의 장소특정성을 의제특정성으로 확장해서 주변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과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신개념 문화공간은 단일한 건축물로부터 벗어나 마을 전체와 동행하기도 한다. 공간의 맥락을 읽고 장소성에 기반한 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뻔한 공간이 아니라 지역성과 역사성, 장소성을 십분 고려한 건축과 배치, 구조 등이 동반해야 가능하다. 역동적인 예술창작과 문화적 종다양성이 존재하는 마을에는 작은 규모이지만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특성을 갖춘 작은 공간들이 많이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시장과 공연장, 도서관, 방송국 등이 공존했던 경기도 평택의 작은 마을 대추리의 문화공간들도 마을과 호흡하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작업실 담론의 활성화 또한 신개념 문화공간을 견인하는 중요한 모티프이다. 수년전부터 담론 수준에서 꾸준히 대안을 모색해오던 작업실에 관한 논의가 실질적인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작업실 담론의 여파는 전시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던 미술문화공간의 개념을 크게 뒤바꿔 놓고 있다. 최근의 작업실 논의는 유럽의 스쾃운동을 나름대로 벤치마킹하고 있다. 예술의 탈장르화 경향이 뚜렷한 프랑스의 경우 매우 급진적인 형태의 공간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는 수십개의 점거 아틀리에가 있는 도시이다. 빈 공간을 접수해서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로베르네집이나 알테나시옹과 같은 공간은 각종 장르의 예술가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들 공간에서는 예술창작과 향유가 공존한다. 유럽 미술관들의 멋들어진 새 건축 또는 재건축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듬고 꾸며도 점거 아틀리에의 역동성만큼은 못하다. 우리에게 점거를 관용할 만한 여유가 아직 없다는 게 아쉽지만, 유휴 공간 재활용 논의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예술점거는 실질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지만 작업실이라는 공간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성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점거아틀리에 논의는 작업실 담론에 따끈따끈한 논점을 제공했다. 스쾃운동이 공론화 하면서 미술문화를 매개하는 공간 개념이 전시장 일변도에서 미술문화의 생산지인 작업실 영역으로까지 확산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스쾃 운동은 작업실이 폐쇄적인 작품 생산의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향유와 담론 생산 공간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목동예술인회관 점거 퍼포먼스에 이어서 서울 대학로의 문화예술회관 점거로 이어진 일련의 행보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어 있던 전시장 공간의 정치학을 유동적인 탈공간의 정치학으로 전환시키는 인식의 전환을 매개했다. ‘오아시스 동숭동 720 프로젝트’는 움직이는 전시라는 개념의 실험으로서 짧은 기간동안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긴 여운을 남겼다. 그것은 백화점 쇼윈도의 상품 같은 예술작품의 운명에 짙게 드리운 암운을 걷어내려는 시도이며,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일대혼란을 통해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고자하는 행동주의 실험이었다.

근대적인 공간분할 개념을 넘어선 탈분화 개념은 신개념 문화공간의 핵심적인 논점이다. 분화는 근대성을 실현한 중심 개념이다. 근대사회는 개념과 실재 모두에 있어 체계적인 영역분할을 통해서 합리성을 획득했다. 미술문화공간 또한 예외없이 근대적인 영역분할 개념으로부터 파생한 공간이다. 미술이라는 예술제도 자체가 독자적인 영역으로 성립하면서 여타의 예술 장르들과 분화했던 상황은 공간 개념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술의 처소를 건축이나 도시공간에 두었던 상황으로부터 이탈해서 독자적인 처소를 발견한 것. 바로 그것이 미술문화공간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근간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대목 중의 하나가 미술문화공간을 공론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의 태동은 문화향유의 공화주의에 있다. 공공의 이름으로 예술생산을 매개하고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미술관과 같은 미술문화공간을 잉태했다.

앞서 언급한 현상들은 근대적인 문화공간이 탈근대적인 개념의 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복합문화공간이나 소규모 공간의 활성화, 미술시장의 다각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증대 등과 같은 현상은 탈근대 개념과 직접적으로 조우한다. 단일한 장르나 공간의 고립과 자폐로부터 벗어나 다차원적인 문화생산을 매개한다는 점, 이에 따른 자본의 이윤창출 방식도 단일성으로부터 복합성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 예술생산을 개별 예술가들의 것으로 방기하지 않고 적극적인 교류와 새로운 문화생산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 등 이 모든 것들이 단일한 것으로부터 다차원적인 것으로, 자족적인 것으로부터 상호적인 것으로, 닫힌 것으로부터 열린 것으로, 분화로부터 탈분화로 전환하려고하는 탈근대의 맥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탈근대적인 맥락의 통합의 정치학은 문화공간의 변화를 읽어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장르 혼융과 같은 대외적인 수준의 통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술문화 내부에서도 통합의 맥락은 마찬가지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 생산과 향유를 분할하는 공간 배치, 생활공간과 예술향유공간의 엄격한 구분, 고급예술과 하위문화를 둘러싼 계층 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 동시대와 가까운 미래의 일이다.

4.
여타의 모든 제도나 관행과 마찬가지로 신개념 문화공간은 완성태가 아닌 가능태로 존재한다. 신개념 문화공간은 한국사회가 인정하고 있는 기성화한 제도공간이 아니라 이제 막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 태동하는 단계에 있거나 지속적으로 변화발전하는 진화의 과정에 놓여있다. 따라서 미술관과 같이 근대적 합리성에 입각해서 나름의 체계를 갖춰나가야 하는 보수적인 기관과는 다른 범주영역에 존재한다. 더욱이 한국사회와 같이 미술관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라면 더욱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근대적인 개념의 미술관 문화를 성립하는 데 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선형적이지는 않다. 특히 식민지와 압축성장과 같은 독특한 배경을 가진 한국사회의 미술관문화는 매우 특수한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신개념 문화공간의 열린 가능성을 신중하게 살펴서 미술관이라고 하는 노회한 제도공간이 한 걸음 진화하는 데 논의의 초점을 모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한다.

신개념 문화공간의 여러 현상들에 비추어 봤을 때 한국의 미술관은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소규모 문화공간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공미술관을 비롯해서 다수의 사립미술관이 소규모의 특성화한 미술관 문화를 풀뿌리문화의 수준에서 정상적인 미술관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다. 근대적 개념의 미술문화는 상당부분 미술작품이라는 물건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그 효용성은 점점 한계에 달하거나 아니면 기형적으로 왜곡되고 있다. 나날이 팽창하고 있는 미술시장의 기능과 차별화하며 시민사회에 미술문화를 뿌리내리려면 미술관의 지위와 역할은 지금과 달라야 한다. 예술작품의 수집과 보존, 연구, 전시, 교육 등과 같은 전통적인 미술관 개념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생산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검토해야 한다.

나아가 미술관 제도는 탈근대적인 현상을 목도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 기능을 재검토할 수 있다. 미술현상에 후행하는 기구인 미술관의 보수성 또는 후진성을 넘어 보다 전향적인 의미에서의 담론생산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특정성을 넘어서 의제특정성을 획득하는 수준에서 동시대를 호흡하며 순발력 있는 문화생산을 수행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국가 수준과 국제적 수준에서의 교류와 연대가 중요한 만큼 지역 수준의 교류와 연대를 통한 상호지역주의를 개발견하는 일도 필요하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문화적 지역성을 토대로 상호지역성의 관점을 만들어서 수평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 전지구화나 국가(민족)주의와 같이 극단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가 지금가지의 관심사였다면 앞으로는 지역과 지역의 교류와 연대를 통해서 그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전지구화와 국가 사이의 길항작용은 각 개체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국제적인 것(the international)으로부터 상호지역적인 것(the interlocal)로의 전환을 야기한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근대성을 획득하기 위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면서 동시에 탈근대 개념을 두루 관통하는 새로운 미술관 개념과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김준기(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2008년 5월 17일 한국큐레이터협회 세미나 발제문 (
월간미술 2008년 4월호 기고문인 <탈근대 문화정치의 전초기지로 진화하는 미술문화공간>을 세미나 주제에 맞게 고쳐쓴 것임)

2008/05/30 04:47 2008/05/30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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