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서사는 충분히 서사적인가 : 광시미 <봄날은 간다> 리뷰

critic & column | 2008/05/04 17:06


시각 서사는 충분히 서사적인가

서사의 과잉을 우려했더랬다. ‘봄날은 간다’라는 주제 자체가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서사들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이 전시 타이틀과 잘 맞을 법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센 작가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의외로 각각의 작품들은 유니크한 서사 아래 줄을 서기 보다는 각자 다른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시각예술 기획자는 어렵다. 아무리 강력한 서사체계를 내세워 작가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해도 작가들은 각자 수십년 동안 쌓아온 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내뱉곤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그래서 큐레이터는 더 할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를 말한다’는 타이틀로 여럿이 모여 뮤지움 토크를 했더랬다. 부시미 큐가 광시미에 가서 토론 사회를 본 색다른 자리였다. 토론에 참여한 나는 패널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시각 서사는 충분히 서사적인가? ‘봄날은 간다’라는 문장구조로부터 시각예술에 있어 서사성이라는 문제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와 큐레이터, 문학평론가, 기자 등으로 구성된 토론자들의 말은 교묘하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시각언어의 서사성을 이 전시에 빗대어 끄집어내는 일이 녹록찮았다. 문자언어에 비해서 시각언어의 언어성에 우리 모두가 낯설기 때문이었다.

토론 참가자의 생각은 분분했다. 봄날은 간다는 문장의 의미 맥락에서 80년 광주를 떠올릴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했지만, 그것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하는 발언도 이어졌다. 그러나 봄날 물오른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따라 광주의 트라우마는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부산이나 서울에서 봄을 이야기했을 때와 광주에서 봄을 이야기했을 때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역시 광주는 한국현대사에 있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도시임이 분명하다. 이 전시가 그러한 기억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넌지시 봄날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 기대반 우려반의 시선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이 전시는 노장들과 신진들이 ‘봄날은 간다’라는 서사 아래 한 자리 모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 또한 대중들에게 다가서고자 했다는 점 또한 봄이라는 간명한 테마 아래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웠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긍적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남는 문제는 있다. 과연 우리가 시각예술의 언어들이 서사적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어떤 경로로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일 텐데, 그렇다면 전시의 독해자들이 어느 수준에서 동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언어들인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출품작들은 관람동선을 따라 주도면밀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읽혀도 좋고 안 읽혀도 좋은 것이었다. 시각예술의 언어들은 소설에서 문장구조를 따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일목요연하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산만하게 흩어진 텍스트들이 개별적인 이미지들로 접수된다. 그 이미지들은 전시장 현장에서 즉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문득 산발적인 이야기들로 편집 당한다. 물론 관람동선을 따라 기승전결식의 이야기를 배치한 배려는 꼼꼼하고 섬세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시각언어란 어떤 경로로 작동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그 어떤 해명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이남과 권기수와 이병호 같은 젊은 작가들의 이미지는 봄을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과녁을 비켜나가는 시각언어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황록의 유연한 곡선은 시적이어서 좋았다. 차규선의 그림은 명쾌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꽃이라는 사물을 그려놓은 그림일 뿐인데, 그 그림의 회화적 매력 그 자체가 오랫동안 시선을 끌고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점은 역시 회화적 표현이 갖는 독특한 소통구조 때문일 것이다. 찬장 속에 피어있는 나무꽃 가지를 설치한 윤익의 감성은 고즈넉한 봄날의 전형 그 자체였다. 박영숙과 안현숙, 이순종 같은 누님들의 봄 이야기는 봄의 이미지를 도입하지 않고도 ‘봄날은 간다’라고 했을 때의 그 처연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안창홍의 세기 또한 동선의 끝자락에서 죽음보다 더 찬란한 꽃을 위한 향연의 새로운 버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전시의 핵심 개념은 청춘의 기억이다. 기획자 변큐의 ‘어느 맑은 봄날을 위하여’는 청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이 전시 최대의 소구대상으로 선정한 관람객층을 문학적으로 기술한 텍스트이다. ‘봄날은 간다’라는 문장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서사에 비해서 이 문장을 타이틀로 내세운 전시의 출품작들이 얼마만큼 봄날은 간다라는 서사에 근접하고 있는지는 단정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스무명의 작품들 가운데 그 누구도 봄날은 간다고 말하는 작가는 없다. 물론 전시의 타이틀이 지시하는 문장과 참여작품들 사이의 관계와 지시와 함의 관계 사이에서 매우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각예술 작품전시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출품작들의 내러티브가 서로 다른 출구를 바라보고 수군거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보였다. 이것이 시각 서사의 분명한 제 모습이 아니겠는가.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아트인컬쳐 2008년 5월호 기고문.
2008/05/04 17:06 2008/05/0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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