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을 빨아들이는 두 개의 눈
critic & column | 2009/05/19 08:43
사건을 빨아들이는 두 개의 눈
인사동과 사간동 사이에 자리잡은 갤러리175는 거창하게 떠벌리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기획전을 열곤 한다. 이번 전시 <춤추는 무뢰한>을 만났을 때도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전시는 노순택과 채승우 두 작가를 묶어서 보도사진이라는 같은 뿌리를 둔 두 작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관람 포인트는 역시 두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표층을 통해서 그 내부를 관통하는 저변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작가가 그 대상들을 다루는 방법론의 차이이다.
노순택과 채승우 두 사람은 보도사진가로서 서로를 알고 지내온 사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매체와 연관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정신적인 연대는 깊고 넓어 보인다. 새로운 매체환경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최근 국내외 미술계에서 사진예술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노순택과 영향력 강한 신문매체에 몸담고 있는 보도사진기자로서 여러 차례 전시경력을 가지고 있는 채승우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만남은 객관을 앞에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주관의 개입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의 깊이를 보여주곤 하는 카메라 매체의 특징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렌즈가 빨아들인 이미지들은 대상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듯하지만 사실은 카메라를 조작하는 주체가 선택한 시간과 공간의 완벽한 통어에 따른 산물이다. 두 작가의 사진은 카메라의 조작 가능성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그 사건들을 담아내는 사진가 주체는 사건을 목격한 경험을 주관적 체험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이후 정보를 활용하는 방법론에 달려있다. 우리는 그것을 특정한 성향이나 매체의 차이, 또는 언론이냐 예술이냐 하는 장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곤 한다. 이 전시는 주관적인 감성을 표현하거나 사실을 알리는 리포터 정체성의 틀을 넘어서 분석가 또는 행동가의 수준을 넘나드는 새로운 예술가 주체의 관점에서노순택과 채승우를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채승우는 21세기 첨단의 거대도시 서울에서 벌어지는 전통재현 프로그램들을 포착한다. 종묘제례 어가행렬은 광화문 제모습 찾기 공사 현장의 앞에서 벌어진 퍼포먼스 장면이다. 설치미술가 양주혜가 만든 가림막에는 경복궁도와 광화문 이미지가 등장하고 그 앞 광화문 실루엣 속에 바코드가 정렬해있다. 그 앞으로 길게 지나가는 어가행렬 주변으로 생략해도 무방할 장면들을 삽입하는 것이 채승우의 포인트이다. 석조 아치문 앞의 꽃들과 더불어 주변을 지키는 헌병들의 모습이 담긴 현충일 행사 현장의 주변도 그렇고, 숭례문 그림 앞의 노인을 담은 삼일절 포퍼먼스도 그렇다. 언제 어디서든지 벌어지고 있는 가지런함 주변의 어수선함, 선명한 것 옆의 불분명함을 들춰냄으로써 박제화한 의례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넓은 프레임으로 사건의 외연을 확장하는 채승우에 비해 노순택은 사건의 현장을 훨씬 더 좁게 집약하고 축약한다. 노순택은 어둠 속에서 비옷을 입은 채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배후설, 메가바이트산성의 비밀’을 들춰내고, 목탁을 들고 기자수첩을 든 사람들을 뒤에 두고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거리의 사람들을 통해서 ‘소장님의 교시’를 발견하기도 한다. 교복 입은 여고생의 뒤에서 마치 춤을 추듯 수류탄 던지기를 돕고 있는 군복 입은 조교의 모습에서 ‘좋은 살인’을 판매하는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안보관광 마케팅 현장을 포착하기도 한다.
노순택은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관련한 시위 현장에서 두 여중생의 초상 사진에 맺힌 빗방울을 포착한 사진을 흥국생명 본사 1층 로비에 전시했다가 그 회사 임원의 지적으로 철거당한 적이 있다. 이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한국사회의 촘촘한 검열기제는 그의 우회적인 진술에 대해 매우 불편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이 전시가 유의미한 이유가 여기 있다. 보도사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에 주목함으로써 무엇을 다루느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순택과 채승우는 응시와 관조의 두 가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건의 저변을 관통하는 성찰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형성한다.
사건을 좁고 깊게 들여다보는 노순택은 여중생 사건의 주한미군과 한미FTA, 노근리와 대추리, 촛불 등의 현장에서 섬세허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한다. 따라서 노순택은 거대한 스케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미세한 사건에 집중한다. 그는 바짝 들이댄 카메라 렌즈 속으로 사건의 내밀함과 진지함, 심지어는 은근함과 아름다움까지도 빨아들이곤 한다. 채승우의 카메라 렌즈는 좀 더 멀찌감치 떨어져있다. 그는 백화점이나 축구경기장, 전통행렬 재현행사장 등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조직적인 퍼포먼스에 주목한다. 매우 정갈하게 벌어지고 있는 듯한 이들 퍼포먼스가 사실은 매우 박제화한 이벤트의 연속이라는 점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 채승우 사진이 의도하는 역설의 힘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월간 포토넷 2009년 6월호 기고문 : 춤추는 무뢰한 리뷰
인사동과 사간동 사이에 자리잡은 갤러리175는 거창하게 떠벌리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기획전을 열곤 한다. 이번 전시 <춤추는 무뢰한>을 만났을 때도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전시는 노순택과 채승우 두 작가를 묶어서 보도사진이라는 같은 뿌리를 둔 두 작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관람 포인트는 역시 두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표층을 통해서 그 내부를 관통하는 저변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작가가 그 대상들을 다루는 방법론의 차이이다.
노순택과 채승우 두 사람은 보도사진가로서 서로를 알고 지내온 사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매체와 연관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정신적인 연대는 깊고 넓어 보인다. 새로운 매체환경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최근 국내외 미술계에서 사진예술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노순택과 영향력 강한 신문매체에 몸담고 있는 보도사진기자로서 여러 차례 전시경력을 가지고 있는 채승우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만남은 객관을 앞에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주관의 개입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의 깊이를 보여주곤 하는 카메라 매체의 특징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렌즈가 빨아들인 이미지들은 대상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듯하지만 사실은 카메라를 조작하는 주체가 선택한 시간과 공간의 완벽한 통어에 따른 산물이다. 두 작가의 사진은 카메라의 조작 가능성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그 사건들을 담아내는 사진가 주체는 사건을 목격한 경험을 주관적 체험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이후 정보를 활용하는 방법론에 달려있다. 우리는 그것을 특정한 성향이나 매체의 차이, 또는 언론이냐 예술이냐 하는 장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곤 한다. 이 전시는 주관적인 감성을 표현하거나 사실을 알리는 리포터 정체성의 틀을 넘어서 분석가 또는 행동가의 수준을 넘나드는 새로운 예술가 주체의 관점에서노순택과 채승우를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채승우는 21세기 첨단의 거대도시 서울에서 벌어지는 전통재현 프로그램들을 포착한다. 종묘제례 어가행렬은 광화문 제모습 찾기 공사 현장의 앞에서 벌어진 퍼포먼스 장면이다. 설치미술가 양주혜가 만든 가림막에는 경복궁도와 광화문 이미지가 등장하고 그 앞 광화문 실루엣 속에 바코드가 정렬해있다. 그 앞으로 길게 지나가는 어가행렬 주변으로 생략해도 무방할 장면들을 삽입하는 것이 채승우의 포인트이다. 석조 아치문 앞의 꽃들과 더불어 주변을 지키는 헌병들의 모습이 담긴 현충일 행사 현장의 주변도 그렇고, 숭례문 그림 앞의 노인을 담은 삼일절 포퍼먼스도 그렇다. 언제 어디서든지 벌어지고 있는 가지런함 주변의 어수선함, 선명한 것 옆의 불분명함을 들춰냄으로써 박제화한 의례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넓은 프레임으로 사건의 외연을 확장하는 채승우에 비해 노순택은 사건의 현장을 훨씬 더 좁게 집약하고 축약한다. 노순택은 어둠 속에서 비옷을 입은 채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배후설, 메가바이트산성의 비밀’을 들춰내고, 목탁을 들고 기자수첩을 든 사람들을 뒤에 두고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거리의 사람들을 통해서 ‘소장님의 교시’를 발견하기도 한다. 교복 입은 여고생의 뒤에서 마치 춤을 추듯 수류탄 던지기를 돕고 있는 군복 입은 조교의 모습에서 ‘좋은 살인’을 판매하는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안보관광 마케팅 현장을 포착하기도 한다.
노순택은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관련한 시위 현장에서 두 여중생의 초상 사진에 맺힌 빗방울을 포착한 사진을 흥국생명 본사 1층 로비에 전시했다가 그 회사 임원의 지적으로 철거당한 적이 있다. 이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한국사회의 촘촘한 검열기제는 그의 우회적인 진술에 대해 매우 불편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이 전시가 유의미한 이유가 여기 있다. 보도사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에 주목함으로써 무엇을 다루느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순택과 채승우는 응시와 관조의 두 가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건의 저변을 관통하는 성찰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형성한다.
사건을 좁고 깊게 들여다보는 노순택은 여중생 사건의 주한미군과 한미FTA, 노근리와 대추리, 촛불 등의 현장에서 섬세허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한다. 따라서 노순택은 거대한 스케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미세한 사건에 집중한다. 그는 바짝 들이댄 카메라 렌즈 속으로 사건의 내밀함과 진지함, 심지어는 은근함과 아름다움까지도 빨아들이곤 한다. 채승우의 카메라 렌즈는 좀 더 멀찌감치 떨어져있다. 그는 백화점이나 축구경기장, 전통행렬 재현행사장 등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조직적인 퍼포먼스에 주목한다. 매우 정갈하게 벌어지고 있는 듯한 이들 퍼포먼스가 사실은 매우 박제화한 이벤트의 연속이라는 점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 채승우 사진이 의도하는 역설의 힘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월간 포토넷 2009년 6월호 기고문 : 춤추는 무뢰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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