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7 송혜수 : 평양출신 피란민으로 부산에 정착한 평생의 재야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5/20 09:40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7 송혜수
평양출신 피란민으로 부산에 정착한 평생의 재야화가

평양출신의 일본 유학파로서 한국전쟁 이후에 부산에 정착해 반평생 이상을 부산에서 살다간 화가 송혜수. 훤칠한 키에 백발의 꽁지머리와 빨간 양말로 일관했던 외형처럼 송혜수는 평생을 야인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그의 삶은 성장기부터 파란만장한 이주의 연속이었다. 1913년에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도쿄, 평양, 다시 도쿄, 만주, 서울 등으로 옮겨 다니며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평양에서 태어나 소학교와 서당, 보통학교, 중학교 등을 다니며 당시의 혼란스러운 교육체계를 겪은 후 일본에 건너가 일년 동안 독학하다가 돌아왔다. 이후 서울에서 일하면서 독학하던 그는 20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진관 일을 하면서 고학으로 도쿄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유학시기에 그는 재동경미술협회와 백우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부터 당시 젊은 미술인들이 모여 활동했던 독립전에 출품했다. 이후 자유전과 창작가협회전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젊은 작가들의 활동공간을 만들었는데, 송혜수는 이 시기 매우 왕성하게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1943년에는 자유전에서 본상을 수상하여 평론가로부터 ‘이중섭과 함께 민족성이 강한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독립전은 당시 일본의 주류미술제도인 문전(文展)에 반기를 들고 나온 재야미술인들의 활동공간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소나 말을 주제로 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통해서 일제시대의 절망 속에서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는 암시와 상징을 담기도 했다.
송혜수는 일본 유학 시절에 여러 작가들과 교류했다. 1936년 당시 쓰다에게서 사숙하던 송혜수는 두 살 연상의 이중섭을 만났다. 당시 일본 유학중이던 조선의 화가 또는 화가지망생들은 조선민족이라고 하는 차이를 뚜렷한 차별로 경험했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은 일본과의 공통분모와 더불어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차별은 소수자를 만들고 소수자들의 결속을 가속화한다.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조선 화가들은 소를 많이 그렸다. 송혜수는 조선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소를 만났다.
근대시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이 소 모티프이다. 일제시대 말기에 소를 통해서 생활상과 정서를 표현했던 화가는 이중섭 뿐만 아니라 김경이나 문학수, 진환 등 다수였다. 이러한 경향은 소나 말과 같은 동물 그림을 통해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의 주요한 운송수단이 우마차였던 점을 생각해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젊은 이중섭, 이쾌대, 진환, 최재덕, 한묵 등의 화가들은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서 1944년까지 활동하면서 민족적인 소재에 탐닉했다. 이 시기의 이중섭이 소와 여인, 소와 아이 등의 제목으로 작품을 남기는가 하면, 특히 진환은 소를 집중적으로 그려서 소를 통한 생활정서의 표현, 소를 통한 민족적 정서의 표현을 시도했다.
일제말기에 나타난 소 모티프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조선 화가들 고유의 특성으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제국주의 문화정책이 지향했던 동아시아적 가치, 다시 말해서 당시의 패권국가인 일본이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문화적 가치로 공유하고자 했던 모티프라는 시각이다. 향토색 논쟁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여러 작가들이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 속에서 민족적 정서 표현을 주요한 관심사로 삼았다는 점이다.
노동과 교통수단으로서의 소는 일제에 의해 억압받던 민족적인 정서를 표출하는 소재로 인식되었다. 송혜수는 소를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일본 수레의 말에 비해서 한국 수레의 소가 꾸준한 품성의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소 그림을 통해서 식민지 청년의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송혜수와 그의 시대 대다수 작가들이 공유했던 대목이다. 송혜수의 소는 큰 틀에서 동아시아 전체가 공유했던 정황과 더불어 민족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문제에 함께 걸쳐 있다.
일본 사람들이 황토색을 쓰지 않았던 데 비해 조선의 화가들은 향토색이라고 부르면서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김주경의 비평은 이것을 ‘로컬 컬러’라고 부른 당시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다. 송혜수는 월간미술의 동경제국미술학교 출신 작가들의 좌담에서 황토 흙바닥에서 사는 주거문화나 황토색의 소, 황토색의 제주도 갈옷 등으로 봐서 황토색과 친근한 주변 환경을 가지고 있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생각했던 황토색과는 매우 다른 색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초기작 이후 많은 작품들에서 송혜수 작품의 주된 색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로 피신해 있다가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해방공간의 서울은 김만형, 이쾌대 등의 미술동맹, 고희동의 대한미협으로 나뉘어 있었다. 송혜수는 김환기, 김병기, 장욱진, 박고성, 김영주, 남관 등과 일종의 재야파 미술가들의 써클인 50년미술협회를 결성했다. 전쟁 발발로 이 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그의 활동 반경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한국전쟁은 그를 운명적으로 부산과 만나게 했다. 1.4후퇴 때 부산에 자리잡은 그는 전란의 혼란기를 거치며 부산 작가로 자리잡았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산에 머물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로서 장욱진, 한묵과 함께 종군 스케치 3인전(1951)을 열었다. 휴전 시기에 외국 기자 숙소인 내자아파트에서 열린 현역작가초대전에 출품하고, 중앙공보관 개관기념 한국 현대대표작가 초대전에 출품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는 격동하는 시대의 불안하고 참담한 시대상을 반영했다. ‘암울, 반골, 비극’ 등의 정서를 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동안 구상과 반추상을 오가며 소와 여인을 다루었다.
송혜수의 소 그림은 평생에 걸쳐 실재의 세계에서 관념의 세계로 옮겨갔다. 송혜수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평생 소와 여인을 그렸다. 자연스럽게 소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카데미즘과 차별화 한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초기에는 불상이나 말, 소, 수렵도 등을 그렸으나 이후 소와 여인으로 소재를 좁히면서 한 길을 깊게 팠다. 초기의 소 그림이 민족성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라면, 후기의 소 그림은 소라는 대상의 실재성보다는 그 대상의 골기를 파악하여 강렬한 색채와 선묘를 통해서 회화적인 맛을 찾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기작에서 말년작에 이르기까지 송혜수의 주된 색감은 단색조였다. 초기작에 비해서 후기작들은 선묘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초기작들은 자유분방한 선묘로 작가 내면의 갈등상황을 격렬하게 표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에 들어 옛것에 심취하는 탐미적 경향으로 이어졌다. 초기의 주제의식이 민족적 정서나 생활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후기의 작품들은 소와 여인의 골기를 파악하고 그것을 간략하면서도 대담한 필치의 선묘로 처리하면서 미적 탐구의 과정으로 삼은 것이다.
부산미술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재야파에 속한 그는 송혜수미술연구소를 차려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문하의 제자들이 국전에 입선과 특선하면서 그의 고단한 부산미술정착활동이 점차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충무동, 부영극장 뒤 청운장 여관 4층, 부평동, 대청동 등 송혜수미술연구소는 부산 시내 곳곳을 옮겨 다녔다. 수십년동안 그의 문하로 전준자, 김정명, 허황, 안창홍 등 수많은 제자들이 거쳐 갔다. 미술평론가 김창섭은 그의 저서 ‘미의 사제들-부산의 미술인과 그 주변’(1972)의 송혜수편에서 후진을 양성한 그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송혜수는 2005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에 그는 사재를 털어 미술상 기금을 마련했다. 살던 집을 팔아 후진에게 힘을 주는 일이 그가 부산미술계에 마지막 남긴 일이다. 그의 유지를 이어 2005년에 송혜수미술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주정이, 서상환, 차경복, 안세홍 등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평생을 풍운아로 떠돌며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으로, 화단의 주류 권력과 비켜서 살아왔던 재야화가 살았던 그가 마지막 남긴 뜻은 부산미술계의 반듯한 중진들을 독려하는 일이었다.

송혜수(宋惠秀)
1913년 평양출생으로 그곳 서당과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학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사진관 일을 하면서 고학을 했다. 이후 20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제11회 일본 동경독립미술전에 입선했으며(1941), 이듬해에 제6회 동경미술자유전에 입선했다. 1943년에는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5년 과정을 졸업했으며, 자유전의 후신인 일본동경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유학을 마치고 만주에 머물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한 그는 1950년에 50년미협을 창립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정착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양달석, 조동벽과 함께 독립작가 3인전(1959)을 열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60년전’(1967), 한국현대화가 100인전(1967)에도 출품했다. 2001년에 동다송문화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 타계했으며, 그해 송혜수미술상이 제정되었다
.유학시기에 그는 재동경미술협회와 백우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부터 당시 젊은 미술인들이 모여 활동했던 독립전에 출품했다. 이후 자유전과 창작가협회전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젊은 작가들의 활동공간을 만들었는데, 송혜수는 이 시기 매우 왕성하게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1943년에는 자유전에서 본상을 수상하여 평론가로부터 ‘이중섭과 함께 민족성이 강한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독립전은 당시 일본의 주류미술제도인 문전(文展)에 반기를 들고 나온 재야미술인들의 활동공간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소나 말을 주제로 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통해서 일제시대의 절망 속에서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는 암시와 상징을 담기도 했다.
송혜수는 일본 유학 시절에 여러 작가들과 교류했다. 1936년 당시 쓰다에게서 사숙하던 송혜수는 두 살 연상의 이중섭을 만났다. 당시 일본 유학중이던 조선의 화가 또는 화가지망생들은 조선민족이라고 하는 차이를 뚜렷한 차별로 경험했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은 일본과의 공통분모와 더불어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차별은 소수자를 만들고 소수자들의 결속을 가속화한다.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조선 화가들은 소를 많이 그렸다. 송혜수는 조선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소를 만났다.

일제말기에 나타난 소 모티프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조선 화가들 고유의 특성으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제국주의 문화정책이 지향했던 동아시아적 가치, 다시 말해서 당시의 패권국가인 일본이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문화적 가치로 공유하고자 했던 모티프라는 시각이다. 향토색 논쟁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여러 작가들이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 속에서 민족적 정서 표현을 주요한 관심사로 삼았다는 점이다.
노동과 교통수단으로서의 소는 일제에 의해 억압받던 민족적인 정서를 표출하는 소재로 인식되었다. 송혜수는 소를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일본 수레의 말에 비해서 한국 수레의 소가 꾸준한 품성의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소 그림을 통해서 식민지 청년의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송혜수와 그의 시대 대다수 작가들이 공유했던 대목이다. 송혜수의 소는 큰 틀에서 동아시아 전체가 공유했던 정황과 더불어 민족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문제에 함께 걸쳐 있다.
일본 사람들이 황토색을 쓰지 않았던 데 비해 조선의 화가들은 향토색이라고 부르면서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김주경의 비평은 이것을 ‘로컬 컬러’라고 부른 당시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다. 송혜수는 월간미술의 동경제국미술학교 출신 작가들의 좌담에서 황토 흙바닥에서 사는 주거문화나 황토색의 소, 황토색의 제주도 갈옷 등으로 봐서 황토색과 친근한 주변 환경을 가지고 있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생각했던 황토색과는 매우 다른 색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초기작 이후 많은 작품들에서 송혜수 작품의 주된 색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로 피신해 있다가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해방공간의 서울은 김만형, 이쾌대 등의 미술동맹, 고희동의 대한미협으로 나뉘어 있었다. 송혜수는 김환기, 김병기, 장욱진, 박고성, 김영주, 남관 등과 일종의 재야파 미술가들의 써클인 50년미술협회를 결성했다. 전쟁 발발로 이 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그의 활동 반경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한국전쟁은 그를 운명적으로 부산과 만나게 했다. 1.4후퇴 때 부산에 자리잡은 그는 전란의 혼란기를 거치며 부산 작가로 자리잡았다.

송혜수의 소 그림은 평생에 걸쳐 실재의 세계에서 관념의 세계로 옮겨갔다. 송혜수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평생 소와 여인을 그렸다. 자연스럽게 소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카데미즘과 차별화 한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초기에는 불상이나 말, 소, 수렵도 등을 그렸으나 이후 소와 여인으로 소재를 좁히면서 한 길을 깊게 팠다. 초기의 소 그림이 민족성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라면, 후기의 소 그림은 소라는 대상의 실재성보다는 그 대상의 골기를 파악하여 강렬한 색채와 선묘를 통해서 회화적인 맛을 찾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기작에서 말년작에 이르기까지 송혜수의 주된 색감은 단색조였다. 초기작에 비해서 후기작들은 선묘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초기작들은 자유분방한 선묘로 작가 내면의 갈등상황을 격렬하게 표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에 들어 옛것에 심취하는 탐미적 경향으로 이어졌다. 초기의 주제의식이 민족적 정서나 생활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후기의 작품들은 소와 여인의 골기를 파악하고 그것을 간략하면서도 대담한 필치의 선묘로 처리하면서 미적 탐구의 과정으로 삼은 것이다.
부산미술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재야파에 속한 그는 송혜수미술연구소를 차려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문하의 제자들이 국전에 입선과 특선하면서 그의 고단한 부산미술정착활동이 점차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충무동, 부영극장 뒤 청운장 여관 4층, 부평동, 대청동 등 송혜수미술연구소는 부산 시내 곳곳을 옮겨 다녔다. 수십년동안 그의 문하로 전준자, 김정명, 허황, 안창홍 등 수많은 제자들이 거쳐 갔다. 미술평론가 김창섭은 그의 저서 ‘미의 사제들-부산의 미술인과 그 주변’(1972)의 송혜수편에서 후진을 양성한 그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송혜수는 2005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에 그는 사재를 털어 미술상 기금을 마련했다. 살던 집을 팔아 후진에게 힘을 주는 일이 그가 부산미술계에 마지막 남긴 일이다. 그의 유지를 이어 2005년에 송혜수미술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주정이, 서상환, 차경복, 안세홍 등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평생을 풍운아로 떠돌며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으로, 화단의 주류 권력과 비켜서 살아왔던 재야화가 살았던 그가 마지막 남긴 뜻은 부산미술계의 반듯한 중진들을 독려하는 일이었다.

송혜수(宋惠秀)
1913년 평양출생으로 그곳 서당과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학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사진관 일을 하면서 고학을 했다. 이후 20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제11회 일본 동경독립미술전에 입선했으며(1941), 이듬해에 제6회 동경미술자유전에 입선했다. 1943년에는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5년 과정을 졸업했으며, 자유전의 후신인 일본동경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유학을 마치고 만주에 머물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한 그는 1950년에 50년미협을 창립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정착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양달석, 조동벽과 함께 독립작가 3인전(1959)을 열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60년전’(1967), 한국현대화가 100인전(1967)에도 출품했다. 2001년에 동다송문화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 타계했으며, 그해 송혜수미술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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