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5 한상돈 : 한국전쟁이 만든 부산작가, 최고령원로화가의 신화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5/07 17:25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5 한상돈
한국전쟁이 만든 부산작가, 최고령 원로화가의 신화
감시의 시선과 공존하는 조선방직 여공들의 휴식

피난민 화가로서 조선방직에 취직한 한상돈은 편안한 휴식을 주문받고 그런 장면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결코 평온하지 않다. 칙칙한 작업복에 흰색 두건을 두른 여공들 뒤편에서 뒷짐을 지고 서있는 남성을 주목해 보라. 여공들은 식사시간에도 이 남성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 휴식과 감시의 공존이다. 한상돈이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이 남성의 존재는 당시 조선방직의 현실을 집약하고 있다. 부산에서 조선방직은 매우 각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후대들에게는 조방앞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조선방직은 1917년 설립 이래 부산의 근대 경제를 지탱해온 중요한 축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위상 아래는 20세기 한국 여성들의 질곡을 대변하는 여공들의 삶이 깔려있다. 여느 노동현장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조선방직 공장은 새벽부터 한밤까지 살인적인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피와 땀을 짜는 살인적인 공간이었다. 여공들은 가난과 전쟁을 거치며 곤궁해진 삶을 벗어나고자 이주한 농촌출신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제시대 이래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지난한 역사의 단면이다. 한상돈이 이 그림을 그리기 두 해전인 1952년에 조선방직 여성노동자 투쟁으로 잘 알려진 여공들의 파업이 있었다. 해방 이후 조선방직은 공공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를 꺾고 민간기업으로 돌려버렸다.
격변의 사회상과 동행하는 예술
권력의 폭압이 휩쓸고 간 후 여공들의 노동과 휴식은 여전히 하루하루 이어지고 있었다. 그림 속 여공들은 한가로운 포즈를 취다. 그러나 결코 밝고 경쾌하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다. 이 그림에 흐르는 음울함은 그러나 분노나 비극적 정서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뒷짐 진 남성은 이 그림을 해석학적 지평으로 유인하는 알레고리이다. 감시원과 공존하는 여공들의 휴식은 그 이면에 한국근대여성의 지난한 삶의 그림자 드리우고 있다. 이 그림이 전쟁 직후 조선방직의 지난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온하고 나른한 일상으로만 읽히지는 않는 이유이다.
1966년 작 <적기 채석장>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적기는 이중섭 가족과 함께 피란 직후 머물렀던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그곳 채석장에 앉아서 정으로 돌을 쪼고 있는 인물과 어깨에 돌을 들고 나르고 있는 두 인물을 포착한 그림이다. 여공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노래하며 살다간 한상돈이라는 전원화가가 그린 그림 치고는 매우 이례적인 도상과 장면이다. 한상돈이 방직공장과 채석장에서 그곳의 전형적인 인물을 회화작품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유학까지 마친 원산 유지의 아들 한상돈. 엘리트 미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처한 처참한 현실은 사회의 관행에서 이탈하려는 예술가의 본능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년의 한상돈은 피난민 신분으로 부산에 정착하며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어렵사리 얻은 조선방직 일자리로 그나마 여유를 찾았지만 과연 그 시절의 한상돈에게 목가적인 전원풍경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격변하는 사회상과 동행하는 예술가 한상돈의 시선은 늘 삶 속에 있다. 그가 100% 전원화가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전쟁이 만든 부산화가

해방 이후 한상돈의 작가 생활은 다소간 특수상황에 놓여있었다. 미술평론가 강선학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들은 남과 북의 서로 다른 미술 시스템을 확인하게 한다. 그는 조선미술동맹의 멤버로서 예술가 신분증을 발급 받아서 기차여행을 하거나 물감을 살 때 무료로 했다고 한다. 미술동맹은 그에게 주문을 내렸다. 특정 장소에 가서 어느 정도 크기의 그림을 그리라는 구체적인 내용의 주문이었다. 가령 이중섭과 동행해서 평북 신천의 노동자 휴양지에 가서 두달 동안 50호 두장씩을 그리는 식이었다. 이중섭, 한묵과 함께 금강산에 가서 농부가 밭갈이하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주문은 예술가를 지치게 만든다. 한상돈은 이중섭과 함께 남한을 선택했다.
1951년 가을 이중섭의 가족과 함께 피란 내려온 그는 일거리가 없어 소일하다가 동아극장 영화간판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피란지 부산에서 한상돈은 안정된 원산 생활과는 정반대의 곤궁한 삶을 살아야했다. 양달석 우신출 임호 김남배 서성찬 송혜수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에술가로서의 삶은 막막했다. 이후 경남도청에 근무하던 우신출의 주선으로 차트 도안 일을 하기도 했다. 조선방직이라는 직장은 한상돈이 부산에 정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돼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문 받지 않는 그림 그리기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한국 최고령 원로화가의 신화와 근대성

<풍경(송정)>이나 <부산항> 같은 ‘70년대 풍경화들은 기억을 자극한다. 해안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송정 해변과 작가 자신이 피란지 부산에 처음 도착한 부산항 5부두가 보이는 풍경화는 시간을 고정한다. 회화란 기억을 물질화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사라진 과거의 풍경은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회화라는 기술은 그 기억을 가시적인 형태의 물질로 만드는 일이다. <남해사장>(1981)은 모래사장과 바다와 하늘이 삼분된 안정적인 구도의 전형적인 풍경화다. 미색계열의 밝은 색채도 색채지만 특히 나이프에 물감을 찍어서 바르는 기법으로 회화적인 맛이 짙게 묻어나는 질감을 구사한 한상돈의 전형성이 잘 보이다. 그는 풍경과 정물을 통해 근대를 완성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아직도 서구의 근대를 바라보고 있다. 서구의 19세기의 대가들을 이른바 블록버스터 전시를 통해서 만나는 데 열광하며 아직도 서구지향의 열병을 앓고 있다. 한상돈과 같은 화가가 그려놓은 부산과 부산인근의 풍경화. 기명절지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유와 서정을 두루 갖춘 정물화. 우리 주면의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 그 많은 유산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21세기의 우리는 여전히 서구를 갈망하고 있다. 서구로부터 근대성을 발견하고 음미해온 우리에게 이제 또 다른 시각으로 근대를 재발견하는 일이 남겨져있다. 격변의 세월을 관통하며 지난한 삶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은 한상돈의 근대 유산들을 차분히 살펴볼 일이다.

수원출생으로 원산에서 성장했다. 원산상업학교를 나온 후 독학으로 그림을 하다가 1930년 일본미술학교 회화과를 나온 후 백일회, 춘양회전에 참여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입선했다. 귀국해서 원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 정착했다. 조선방직에 근무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작업을 했으며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이후 평생 전업 작가로서 그림을 그렸다. 부산시전 심사위원, 부산대, 동아대 강사, 부산미협 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미술 50년전>을 비롯한 다수의 기획전에 출품했다. 부산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말년까지 당시 최고령화가로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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