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2 김윤민 : 불안한 20세기 한국의 현실 너머 꿈의 세계를 추구한 예술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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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2 김윤민
불안한 20세기 한국의 현실 너머 꿈의 세계를 추구한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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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성찰하는 일은 예술가의 가장 큰 화두 중의 하나이다. 김윤민은 자연을 그렸다. 그의 자연관은 다음의 문구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화가는 자연을 겸허하게 맞아야 한다. 오만한 자는 자연의 미를 노치고 마는 것이다.” 그는 예술하는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강조했다. 김윤민은 그러나 아카데믹한 풍경 그림에 머무르지 않았다. 김윤민의 독특한 감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그림은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960년 작 ‘나부’이다. 이 그림은 드물게 풍경을 전면 배제한 문제작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알몸의 여성이 앞으로 웅크린 채 두 손으로 푸른 기둥을 붙잡고 얼굴에 맞대고 있다.

성적인 메타포가 물씬 묻어나는 이 그림은 자연 속에서 동심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여느 그림들과 확실하게 차별화 한다. 1960년이라는 시대적 정황이 이 작가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할만한 비슷한 작품들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도발적인 도상은 당시의 정서에 비춰 매우 충격적인 내러티브를 던지고 있다. 푸른색과 적황색으로 강한 대비를 주고 있으며, 풍만한 육체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윤곽선과 노란색조의 흐름이 시선을 끄는 이 그림은 김윤민이 얼마나 격렬하게 초현실의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김윤민의 그림은 아카데미즘에 가까운 소재와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한 색채와 형태, 화면 배치 등의 신비주의 화풍을 유지함으로써 상투적인 재현회화의 틀을 벗어났다. 그의 그림들에는 대체로 청록색의 자연과 적황색의 인물 등장한다. 작은 그림을 많이 그린 그는 단순히 자연을 감상에 의존해 다루지 않았다. 풍경과 인물의 초현실성은 그의 독특한 형태와 색채 감각에서 나온다. 그는 둥글둥글한 형태와 그라데이션으로 재현회화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으로 격변하던 대혼란의 시기를 지나면서 김윤민은 일체의 사회적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회피했다. 월북작가 정종녀와 동창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기도 했던 그는 학창시절과 달리 풍경에 천착했다. 김윤민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학생시절에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지만 모델을 구하는 데 제한을 받아 자연을 그리는 것으로 바꿨다. 그는 ‘자연에서 느낀 가운데서 선악을 헤아려 가리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고자’ 했다.

김윤민은 경남미술교육연구회와 경남미술연구회를 거쳐 토벽 동인 활동을 했다. 미술평론가 이시우는 토벽 동인들의 면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김종식은 피난민의 슬픈 생활을 그렸고, 김영교는 싸늘한 사회상을 그렸다. 임호는 보릿고개 속의 애가(哀歌)를 그리고, 김경은 이념의 분노가 분출하듯 군상을 그렸다. 이렇듯 토벽 동인들이 제마다 강렬한 작의를 표출할 때 김윤민은 치졸한 수법으로 신비스런 자연(江山)을 그려 그 독특한 화풍으로 주목을 모았다.” 토벽 동인 대다수가 당시의 사회상이나 동시대성을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유독 김윤민은 자연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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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생 일관된 주제와 화풍을 유지했다. 그는 소박한 인성을 가진 작가였으며, 그림 또한 그것에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작의 작가로 잘 알려진 그가 적은 수의 작품을 일관되게 유지한 데는 남다른 까닭이 있다. 그는 그림을 게을리 한다고 말하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반박하면서 자신은 가장 오랜 시간동안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는 체질적으로 순발력보다는 성실함으로 살아간 작가이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활동 방법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했다. 30여년 화가 생활을 거친 후에야 1974년에 62점의 출품작으로 첫 개인전(부산탑미술관)을 열 정도였다.

미술평론가 김강석은 김윤민의 화풍에 대해 작품경향이 살롱풍이 대부분이지만, 원근법과 명암법에 의존하는 재현풍경화의 한계를 넘어 이차원적인 평면 공간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회화는 ‘삼차원과 이차원, 재현과 변형, 유머와 에로스, 상징과 감각’을 공유했다. 김윤민은 독특한 감성과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연풍경을 단순한 형상으로 집약한 후 그 형상 하나하나를 다시 환상적인 분위기의 색채로 가다듬었다. 김윤민 회화의 특징은 그라데이션(gradation)에 있다. 그는 붓질의 흔적을 남기는 데 매우 신중했다. 하나의 형상과 다른 형상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강한 콘트라스트를 주기도 했지만 한 형상의 내부에서는 가능하면 점진적인 색채와 형태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그라데이션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윤민의 그림이 요즘 유행하는 매끄럽게 넘어가는 얇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형태를 잡아내는 데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색채에 있어서도 어딘가 덜 다듬어진 듯 마무리했다. 김강석은 이 대목에 대해 ‘욕심 같으면 좀더 표현기술이 정리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김윤민은 평생 이 화풍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그림을 특징짓는 주요한 기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적 표현과 반추상적인 표현이 혼재된 화면은 그를 확연하게 차별화 하는 주요 요소이다.

그는 동시대를 몸으로 체득하며 시대정신과 사회현실을 관통하는 리얼리즘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가 갈망한 세계는 초현실의 세계였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과 인물은 꿈틀거리는 현실 속의 그것이 아니라 몽환적인 기억 속의 그것이었다. 동심 속의 강과 바다와 산과 들을 그리고 그 속에 동참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연을 재발견하고 삶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것이 김윤민 회화의 전략이다.

김윤민의 회화는 형태와 구조를 평면위에 배치하는 재현회화의 기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색면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대상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변형함으로써 재현회화의 틀을 넘어서고 있다. 김창섭은 김윤민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일제시대 자연주의 화풍, 토벽 동인 시절의 표현주의 경향, 그 이후의 초현실적인 경향 등으로 분류했다. 그의 작품 세계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재했다. 풍경 속에는 경제개발시대의 시멘트벽과 컬러풀한 양철지붕과 전통사회의 가옥형태인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동시에 등장한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인물과 나체의 아이들이 공존하는 화면 또한 이 작가의 독특한 체험과 감성코드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그림들은 역설적이게도 실재의 바탕 위에 서 있다. 들판에서 나물 캐는 처녀들과 염소, 아이의 모습을 담은 평범한 풍경 가운데 기와집과 담장을 보라색으로 처리한 그의 감성은 확실히 몽환적이다. 그러나 형태를 단순화 한 표현기법상의 문제를 떠나서보면 매우 충실하게 실재의 체험에 근거한 그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냇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소가 등장하는 풍경,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아이가 등장하는 농촌마을 등 ‘전원풍경과 아이들’이라는 소재를 끊임없이 반복, 변형했다.

‘그네’(1984) 또한 김윤민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그렸다. 그런데도 그를 아카데믹한 풍경화가로 볼 수 없는 것은 그의 표현 방법과 인물을 다루는 상징적인 수법 때문이다. 그네를 떠받히는 기둥 하나를 생략한 불균형한 화면에는 절반만 드러난 시소의 사선이 그려져 있다. 김윤민의 회화는 이렇듯 안정적인 구도와 체계적인 재현과 거리를 둠으로써 현실을 넘어선 현실, 몽환적인 상상으로 가득 찬 자연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김윤민은 왜 전원 풍경을 그리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화면을 구축했을까? 그것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의 현실인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불안한 20세기 한국의 현실 너머 꿈의 세계를 추구한 김윤민. 그는 부드러움 속에 불안함을 담았고, 초현실 속에 현실을 담았으며,  평온한 서정 속에 역사의 갈등과 욕망을 담아낸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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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민(金潤玟·1919~1999)

경남 남해 태생으로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한 후 한 해 동안 그곳 연구과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다가 귀국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 국전인 문전과 재야전인 신관서전에 출품해서 연 4회 입선해 명성을 얻었다. 해방 직전에 귀국했으며, 해방 후 경남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해방 이듬해에 김종식, 김원명 등과 함께 삼일절경축미전, 광복경축미전, 경남미술(교육)연구회 등에 참가했고, 민주중보사 주최 부산미술전람회 초대출품에 이어 전람회위원을 맡으면서 부산화단의 1세대 작가로 활동했다. 김영교, 김경, 서성찬,김종식, 임호 등과 함께 미술동인 토벽회 활동을 했으며, 한국근대미술 60년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했다. 그는 38년동안 교육자로 봉직했으며, 부산시교육미술연구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미술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부산시문화상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2008/06/26 09:02 2008/06/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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