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1 : 프롤로그, 부산 미술의 초석을 놓았던 1세대 작고 작가들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4/12 20:42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1
프롤로그 : 부산 미술의 초석을 놓았던 1세대 작고 작가들
며칠 전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은 일본 후쿠오카의 한 큐레이터가 부산미술의 특성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부산미술은 없다." 부산미술을 다른 도시와 차별화해 해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개방성 정도.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후쿠오카미술이나 일본미술은 뭐냐고. 서울미술 혹은 한국미술, 아시아미술이 뭐냐는 질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미술은 없는 게 확실하다. 대구미술과 광주미술이 구상회화, 인상파회화와 같이 일부 주류를 중심으로 언급되는 것도 신화에 불과하다. 그 어디든 미술문화의 맥락을 한두 가지 흐름으로 단선화 하는 것은 미술사의 신화일 뿐이다.

종 다양성이 살아있는 문화예술 생태계에 있어 단일한 정체성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문화적 다원성을 계보의 신화보다 앞선 가치로 보기 때문이다. 단일한 정체를 단언하는 것은 권력의 논리를 앞세운 반문화이다. 공공미술관과 화랑, 대안공간이 활동하는 도시, 부산비엔날레를 통해 미술을 매개로 국제적인 그물망을 넓히는 도시, 관람객 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미술시장이 날로 커지는 문화의 도시 부산. 이와 같은 문화 지표를 이루기까지 80년이 걸렸다. 미술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착종하기 위해 반세기의 세월에 걸쳐 미술생태가 순환했다.
이 연재는 부산지역의 미술생태를 다룰 것이다. 근대적 개념과 제도를 만들어간 부산미술 5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기획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는 몇 가지 방법들 가운데서도 작가들을 중심에 두고 안팎의 구조를 파악해보는 인물학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대상은 대부분 1940년대 초반 이전에 출생한 작고 작가들로, 부산지역 미술생태를 기록하는 데 굵은 선을 남긴 이들이다. 활동시기로 보면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가 주요 대상이다.
1970년대까지를 하한선으로 잡은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역사적 시간거리를 확보하는 데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 시기 이전과 이후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근본적인 지형변화가 일어난다. 1980년대는 한국사회의 근현대 분기를 앞뒤로 가늠할만한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를 본격적인 분기로 보든 과도기로 보든 간에 대변동의 축선임은 분명하다. 부산미술에서 급격하게 다원화 현상이 일어난 1980년대 이전까지의 미술생태 지형도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1930~70년대 굵은 족적 찾아
일제강점기가 미술문화의 씨앗을 뿌린 여명기였다면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이후의 부산미술은 본격적인 착종기로 볼 수 있다. 미술의 개념과 방법, 제도, 관행 등을 만들어가던 시기에 부산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에 관한 기술과 분석이 함께할 것이다. 인물학이란 작품의 양식사에 밀려 소홀히 취급받는 인물에 관한 연구를 시도하는 태도이다. 양식사를 중심으로 기술하는 미술사는 역사적 관점에 따라 가감의 편견이 극심하다. 그렇지만 인물 중심의 야사로 가거나 인적 네트워크의 계보를 파악하는 데만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에 대한 비평적 성찰 또한 이 연재의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까지의 미술사가 양식계보학이었다면, 그것을 보완하거나 뒤집는 것이 인물계보학이다. 인물계보학은 인물을 중심으로 미술생태 전반을 꿰뚫는 것이 궁극의 관심사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술생태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싸이클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생태계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미술문화의 생산과 매개와 향유를 둘러싼 일련의 순환구조를 생태적 관점에서 파악해 보려는 시각이다. 미술사의 신화를 쫓기보다는 미술인물의 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양식분석 중심의 미술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부산지역의 미술생태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중요유산 - 김종식·김홍석·양달석
한국전쟁 이후에 등장한 본격 모더니즘은 김종식과 김홍석과 같은 거장을 낳았다. 김종식은 부산 근현대미술의 전사와 후사, 정사와 야사에 두루 걸쳐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김종식은 한국전쟁시기 피난처 부산에서 각지에서 온 미술인들과 교류했으며 이후에도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작품성향 또한 아카데미 회화에서 반추상과 비구상에 이르기까지 그 품이 너르기 그지없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작가이면서도 웬만하면 서울 가서 활동하는 관행과는 거리를 둔 부산지역 미술계의 느티나무였다. 한국 현대미술계의 숨겨진 진주인 김홍석은 재료선택과 화면처리 등에서 단연 돋보이는 모더니스트이다. 미술문화의 뿌리가 약한 상황에서 이 같은 작가들이 나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현대미술의 빗장을 연 작가들을 만난다. 양달석은 유화와 수묵채색화를 넘나들며 한국화단 전체에서도 잘 알려진 화가이다. 우신출은 미술관련 학제교육 없이 화가가 되었는데, 여러 가지 기법들을 두루 익혀서 그림이 매우 다채롭다. 김윤민은 초현실주의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오묘한 매력의 작품들을 남겼다. 김동규 같은 선구적인 작가는 50·60년대에 전위적인 실험미술을 했다. 그의 설치와 평면회화들은 초기의 전위미술을 증거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수묵채색화의 경우 허민이 전통사회의 맥락을 잇고 있는 드문 작가이다.
부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다가 출향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 작가도 많다. 부산에서 현직 교사생활을 했던 조양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북송선을 타기 전까지 중요한 재일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질곡의 역사 한 가운데에 뛰어든 예술가이다. 해방직전부터 6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서 활동한 박생광은 오랜 세월 예술에 대한 열정을 토대로 80년대 이후 말년에 꽃을 피운 작가이다. 마산 출신의 문신은 유럽으로 건너가 비례미를 꽃피운 대가이다. 이들 출향작가들 또한 부산미술생태의 중요한 맥락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예술로 부산을 들여다 보려는 본격적인 시도와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라는 두 가지 길로 갈린다. 이들의 활동은 구상과 비구상, 추상에 이르기까지 부산미술의 두께를 더한 중요한 유산이다. 특히 이들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는 역사 속의 미술생태 지형을 살피는 데 더 없이 중요한 자산이다. 그들의 생생한 증언이 생태지도를 구성하는 데 큰 힘을 줄 것이다.
종 다양성이 살아있어 건강한 부산미술
왜 부산지역에는 스타가 없는가? 과연 부산에는 한국사회가 공감할만한 근현대 시기의 빼어난 작가가 없다는 말인가?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했던 80년대에 부산에서 자란 필자는 국제적인 미술문화도시인 부산의 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절실하게 그 답을 찾고 있다.
해답은 스타를 만드는 것과는 정반대 쪽에 있다. 특정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문화권력을 휘두르는 미술계는 재미가 없다. 부산지역미술에 스타가 없다는 것은 문화권력을 장악한 강력한 힘의 집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특정스타가 없는 부산미술계는 그래서 오히려 건강하다. 종 다양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대구에 이인성이 있고 광주에 오지호가 있다면 부산에 김종식과 김홍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문화권력 구도는 향토색 논쟁을 관통한 이인성이나 오지호 정도만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주류미술사의 권력의지나 미술시장의 관심사에 따르자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권력의 중심에 진출하지 안/못했다고 해서 그 가치가 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더욱이 필자의 관심은 부산지역의 대가를 호명하는 데 있지 않다. 더 넓고 깊게 얽히고설킨 생태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서로 다른 가치와 감성의 차이가 공존하는 공간. 이것이 살아 움직이는 문화예술생태계 최고의 가치다. 예술은 종 다양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기 때문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필자 소개
1968년 생으로, 부산 대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술대학 예술학과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 2006년 부산비엔날레 조각프로젝트 전시팀장과 공공미술추진위원회 팀장의 일을했다. 2007년 석남미술상 '젊은 이론가상'을 받았다.
입력시간: 2008. 04.10. 14:21
부산일보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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