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읽기 6 김남배 : 근대화단의 네트워커, 양 할아버지 김남배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5/1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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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읽기 6 김남배

근대화단의 네트워커, 양 할아버지 김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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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배는 차분한 성품이면서도 부산화단을 두루 꿰뚫은 네트워커였다. ‘온화하고 공손한 성품과 맑고 깨끗한 인격과 어울려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일제시대부터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일본어판 부산일보사가 주최한 공모전인 부산미술전람회에서 특선했으며, 1943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했고, 이듬해에도 같은 공모전에 입선했다. 입선작의 화제는 각각 ‘소녀’와 ‘양’이다. 언론의 기록에 따르면, 김남배는 한 살 터울의 화가인 서성찬(1907-1958)과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성찬이 정물화로 명성을 얻었다면 김남배는 양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양은 ‘미술(美術)’의 ‘미(美)’ 자를 있게 한 동물이다. ‘양(羊)’과 ‘크다(大)’를 결합해 만든 글자가 ‘미(美)’가 아니던가. 단순하게 말뜻만 가지고 풀이하자면 커다란 양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신석기사회에 들어 유목민족을 탄생시킨 양은 인류의 삶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다. 김남배는 양을 통해서 풍요와 평화와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조선화가들이 민족적인 모티프로 소를 많이 그렸던 것에 비해 김남배의 선택은 특이했다.

‘백양(白羊)’은 김남배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해방공간에서 김남배가 부산역 앞에서 운영한 다방이름도 백양이다. 백양다방은 부산지역 뿐만 아니라 경남 일대 미술가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서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카페는 부산의 근대화단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많은 전람회가 다방에서 열린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카페는 근대의 산실이다. 카페는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하는 공론의 장이었다. 카페문화를 공유한 근대인들은 그곳에서 예술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이상을 꿈꾸었다. 해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부산지역 예술가들이 새로운 꿈을 꾸던 곳이 김남배의 백양다방이다.

예술생태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예술활동을 자신의 주업으로 삼고 사람들, 즉 예술가들이 상호 인정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나온다. 전문가집단이 그들 자신의 재생산 구도를 만드는 것이 느슨한 개념이지만 강력하게 서로를 얽어매는 동인활동이다. 초기의 예술가들은 예술적 지향이 같거나 또는 처지가 비슷해서 함께 활동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동인활동을 많이 했다. 미술가들 뿐만 아니라 문학의 역사 속에서도 동인활동을 통해 함께 책을 펴내는 일이 잦았던 것처럼 동인들이 함께 전시를 여는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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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의 중요한 미술동인으로 손꼽히는 그룹이 부산의 네 작가가 주축이 된 춘광회이다. 1930년대 말에 결성한 이 그룹은 김남배, 서성찬, 양달석, 우신출 등을 오랫동안 동행하도록 해주었다. 이름하여 봄빛(春光)이다. 이듬해 한 차례 더 전시를 연 이들 춘광회 동인들은 해방 이후 부산의 근대화단을 일군 눈부신 주역으로 성장한다. 우신출의 구술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과 함께 경남미술회를 만든 것이 부산최초의 동인활동으로 보인다. 김남배는 경남미술회와 더불어 부산지역 미술동인 그룹으로써 매우 독보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춘광회 창립멤버로서 여느 동인들과 함께 부산지역 화단의 형성에 있어 일제시대 이후 발군의 공로를 쌓았다.

해방조국을 맞은 김남배와 그의 벗들은 격동기를 겪으며 부산의 중진 미술가로 거듭났다. 1946년에 열린 ‘3.1절기념미술전’에는 김남배를 비롯해 양달석, 서성찬, 우신출 등과 해방 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종식과 김윤민이 함께 했다. 같은 해에 열린 광복경축미전에서도 같은 작가들이 참가했다. 1947년에는 부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미술가들이 조선미술가동맹부산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미술동맹이 한국미술협회와 갈라지면서 부산지부는 한국미술협회부산지부로 고쳐 부르면서 양달석을 회장으로 뽑았다. 이해 부산역 앞 백양다방에서는 경남미술현구회가 결성되었다. 김남배는 서성찬, 우신출, 김윤민, 김원갑 등의 부산작가들과 마산의 이준, 이림, 임호, 통영의 전혁림, 그외에도 김해, 진주 등의 미술가들과 함께 협회와는 차원이 다른 전문적인 미술가그룹을 만든 것이다. 이듬해에는 ‘제1회 경남미술연구회전’을 열었다. 1950년에는 경남미술연구회를 혁토사(爀土社)로 고쳐 부르면서 사진 분야를 포괄하는 그룹으로 진화했다.

민주중보사가 주최한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1948)에 초대작가로 참가한 김남배는 심사위원으로써 41명의 젊은 작가를 미술계에 등단시키는 데 일조한다. 1950년대에 들어 김남배는 3.1절기념미술전, 혁토사 동인전이나 부산미술협회 초대전, 민주신보 초대전 등에 지속적으로 출품하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민주신보가 주최한 제1회 경남미술전(1958)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58년에 김남배는 부산미술협회 회장을 맡았다. 회원전 출품작가 수가 20여명을 헤아리던 시절, 김남배는 엘리트 미술가 집단의 네트워커로서 동분서주하며 부산지역의 미술계가 자리 잡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을 벌였을 것이다. 그해에 김남배는 절친한 벗을 먼저 보냈다. 30년대 말 이후 동인활동을 해왔던 서성찬이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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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59년에 그는 문화회관에서 ‘김남배 동양화전’이라는 뜻밖의 전시를 연다. 같은 해에 열린 ‘제40주년3.1절기념예술제’에서 그는 이윤재나 이석우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동양화부에 올린다. 같은 해의 ‘부산미술협회원전’에는 서양화부에 출품하기도 했지만 그 후 몇 년간 김남배는 서양화가가 아니라 동양화가로 살았다. 1960년 부산미술협회가 주최한 3.1절과 광복절 기념전에 출품한 김남배는 같은 해 ‘제9회 동명회화원전’ 동양화부에 출품했다. 1961년에는 ‘제10회 동명서화원작품전’에 출품한 것을 제외하면 부산미협단체전을 비롯한 주요 전시에서 김남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이듬해에도 ‘동명서화원전’과 ‘516혁명 1주년기념예술전’ 동양화부에만 출품했다. 전통회화와 서구에서 유래한 회화 사이의 구분이 엄격했던 당시 정황을 고려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남배 그림에서는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학습한 초기 부산화단의 특성과 수묵화에 심취한 그의 개성을 동시에 목격할 수 있다. 50년대에 그린 ‘풍경(돛단배)’는 절묘한 필치로 그린 전형적인 인상파 화풍이지만, 서성찬과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정물’(1959)은 날렵한 필선의 윤곽선이 돋보이는 표현주의 화풍이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공존이다. 김남배는 경쾌한 붓질로 대상의 특징을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또는 격정적으로 평면 위에 옮겨놓은 솜씨가 빼어났다. 한국의 근대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김남배는 서구를 배운 일본으로부터 서구의 그림자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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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1950년대 말에 들어 수묵화에 심취해서 각종 전람회의 동양화부에 출품했다. 서구를 학습한 김남배는 한국의 회화전통을 결합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자 했다. 서양화와 동양화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동서양을 구분하던 화단의 출품 관행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연도 미상의 그림 ‘양’은 풀이나 나무를 몰골 필선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양은 대상을 묘사하는 윤곽선을 뚜렷하게 남기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구륵 필법에 가깝다. 1974년작 ‘어린 시절’은 검은 윤곽선으로 인물을 묘사하고 그 안쪽을 강한 원색으로 메우고 있어 마치 채색목판화를 보는 듯하다. 수묵화를 볼 수 없어 김남배 그림의 회화양식 전모에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김남배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었다는 점이다.

1962년 김남배는 하와이로 떠났다. 그 이후 김남배의 이름은 공식적인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일제시대 말기부터 부산작가로서 공모전에 등장하고, 미술동인을 꾸렸으며, 해방정국 부산화단의 주역으로써 새로운 미술동인을 꾸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전후 혼란기에 부산미협회장을 맡아서 숨은 공로자로 부산화단을 견인해왔던 그가 사라진 것이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바꿔가며 팍팍한 현실을 넘어서고자했던 20세기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는 근대기 부산화단의 주역 김남배에게도 걸쳐있다.

사료에 등장하는 전람회 참가자 명단은 여타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미국행을 선택한 시기가 5.16 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의 혼란기였다는 점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 식민지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에 이어 국가재건의 시기까지 지난한 시대를 거쳐왔던 김남배의 삶은 군부독재의 암울한 터널이 길게 드리우기 시작한 길목에서 새로운 길을 맞는다. 하와이에서 작품활동을 계속 했다고는 하나, 조국을 등지고 이국에서 새 삶을 꾸린 김남배의 행적과 작품세계는 아득히 멀리 있다.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어떻게 유화와 수묵화를 오갔는지, 왜 부산을 등지고 하와이로 떠났는지. 우리 부산미술계가 더 늦기 전에 챙겨야할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김남배(金南培, 1908-1980(?))
경남 김해 출생으로 부산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특선에 올랐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1943년과 ’44년에 입선했다. 부산지역의 동인그룹으로 잘 알려진 춘광회의 창립멤버로서 양달석, 우신출, 서성찬 등과 활동하면서 부산지역의 근대화단 형성에 역할을 했다. 이후 경남미술연구회, 혁토사, 토벽 등의 동인활동을 했다. 해방 후 부산역 인근에 백양다방을 운영하면서 부산과 경남 지역의 미술가 네트워커 역할을 했으며 부산미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유화와 수묵화를 병행한 독창적인 화법으로 양 그림을 비롯해 다수의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를 남겼다. 1962년에 하와이로 이민한 이후 꾸준히 활동하다가 1980년경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05/13 01:28 2008/05/1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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