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근호의 조각, 질료와 오브제 사이

critic & column | 2007/03/1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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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호의 조각, 질료와 오브제 사이


고근호의 근작전 ‘즐거운 상상-The Park’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할 수 있는 조각공원 개념의 놀이시설이자 낱낱의 조각작품 전시이다. ‘동화적 상상력’을 동원한 고근호의 이러한 작품들에는 그의 낙천적인 품성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그가 보여주는 동화같은 세상은 어린아이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이다. 화려한 원색으로 눈길을 잡아끄는 도심 속 갤러리의 상상공원은 복잡한 도심 속에 작은 쉼터를 제공한다. 일상의 공간을 꿈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작은 축제의 장이다. 갤러리 외벽은 일종의 벽면 부조 형식으로 구성된 유영의 공간이다. 마치 바닷 속을 연상케 하듯 유려한 곡선의 식물성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고근호 특유의 형상이 돋보이는 말 위에 올라탄 아이들이 작렬하는 태양아래서 환호한다. 다른 쪽에는 현대인의 얼굴 연작으로 한 벽면을 가득 채웠다. 종이박스 위에 오래된 물건들, 버려진 쓰레기들, 채집한 물건들 등 각종 오브제들을 붙여서 만든 현대인의 초상들이다. 고근호는 이렇듯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종이박스 위에 오브제’라는 동일율을 적용함으로써 사소하게 흩어지는 낱개의 서사를 엮어서 동시대인의 초상으로 변모시켰다.

고근호는 1990년대 초반에 리얼리즘 조각의 계보를 잇는 젊은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의 그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력을 바탕으로 하되 묘사의 완급조절로 견고한 볼륨과 역동적인 동세를 만들어냈고, 노동과 풍요를 담아내는 형상조각이었다.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캐릭터와 동세 설정을 통한 서사구조를 매우 전형적인 수준에서 풀어내는 성실한 형상조각가의 방식으로 출발했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일러스트조각풍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 시기부터 그는 세상을 보는 특유의 유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자나 전화기로부터 권위와 논쟁이라는 주제의식을 캐내는 감각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성은 2000년을 전후한 소조 작업에서도 여전히 이어질 뿐만 아니라 더욱 심플하게 내러티브를 압축하는 경향으로 전환한다. 한편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간간히 기성품을 조합해서 매우 전쟁과 평화나 골초와 같이 매우 함축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는 작품을 선보인다. 보다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든 2000년 이후에는 규모 면에 있어서나 작업 양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오브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명백하게 고근호 스타일을 정리했다.

질료에 인공적인 변형을 가해서 특정한 형상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루전 효과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고근호의 오브제 작업은 형상보다는 오브제 그 자체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다. 수많은 박스 속의 얼굴은 두 눈과 코와 입을 가진 동일성의 반복이지만, 그 속에 담긴 개별 사물들에 대한 기억은 무궁무진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오래된 물건을 이용해 형상을 만드는 일은 고근호의 주된 작업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는 사소하고 자잘한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어디선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주워서 보관했다가 마치 보물창고를 열어서 보물을 다듬듯이 하나씩 하나씩 그 물건에 얽힌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그 물건에 새로운 생명, 동시대의 내러티브를 불어넣는다. 이것이 고근호가 오브제 작업에 관심을 갖는 원인이자 결과이다. 쓰레기를 이용해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이 정크아트(Junk art)의 구상은 조립이나 집합을 뜻하는 앗상블라주(Assemblage)와는 다소간 차이를 가지고 있다. 정크아트는 폐품, 쓰레기, 잡동사니 등을 모아서 예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오브제의 맥락과 새로 탄생한 작품의 맥락이 상호연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반면에 앗상블라주는 자건거의 핸들과 안장을 결합해서 소의 머리를 만들 듯이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을 결합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드는 작업이다.

따라서 전자가 오브제를 서사적인 맥락에서 끌어들인다면 후자는 오브제의 형상들의 조합을 통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미묘한 온도차이가 있다. 앗상블라주가 결합과 조합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정크아트는 재활용, 재생 등의 메시지를 중요시 한다. 고근호의 앗상블라주는 정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오브제들이 맹목적으로 형상에 복무하지도 않는다. 고근호의 이러한 전략은 전시장 안쪽과 바깥 쪽에서 다른 맥락을 보이는데, 몇 년전 그는 출판이라는 미디어를 이용해서 ‘폐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화가 주홍과 함께 <고물자전거>와 <아기 고양이 미로>라는 두 권의 정크아트 책을 만들어냈다. 깡통, 생선 판자, 고물자전거 등에 새생명을 불어 넣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순환적인 구조아래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고근호의 오브제들은 이 두 갈래 맥락의 중간에 서 있다. 그는 매우 사적인 차원의 경험들을 토대로 그 오브제에 담긴 과거의 기억들을 현재의 것으로 끌어 올린다. 그것은 사사(私事)성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언어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정크아트의 전략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동시에 앗상블라주의 형상화 전략에 경도되지도 않는다. 예컨대 종이위에 오브제들을 붙여서 만든 현대인의 초상에서, 두 눈과 코와 입을 지칭하는 이들 오브제들은 하나하나 각각의 사연을 지닌 물건들이다. 플라스틱 숟가락, 면도기, 주사기, 표주박, 시계, 마이신, 조개껍질 등 그 물건의 숫자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이 다양한 오브제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거의 동일한 패턴의 반복을 보인다. 그만큼 형상보다는 오브제 자체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철판을 자르고 구부리고 색을 입혀서 만든 판재 조각은 조각적 질료의 문제에 함의를 던져준다. 두꺼운 철판을 레이저 컷팅 기법으로 잘라서 동식물과 인체 이미지를 만든 후에 이 철판을 휘거나 이어 붙여서 만든 조립식 판재조각들은 오브제의 맥락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취한다. 여기서의 쇠는 조형작업에 복무하는 조각의 질료 그 자체이다. 그의 판재 조각은 덩어리를 덧붙여서 볼륨감 있는 입체조형을 만들어내는 기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입방체로부터 매스를 추출해내는 방식도 아니다. 드로잉으로부터 판재 조각을 도출해내는 그의 작업방식에는 조각의 일반적인 어법과는 다른 절차가 포함되어 있다. 두꺼운 철판은 그 자체로 어떠한 형상도 가지지 않고 있다. 그 철판에 드로잉과 컷팅으로 형상을 부여하고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차고 단단한 철판을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숙한 물질로 전환해놓았다. 이렇듯 차가운 질료를 친숙한 오브제로 여겨 만지고 올라탈 수 있게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가능해지는 것인가? 예술가 주체 고근호의 어떠한 행위가 딱딱하고 차가운 오브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인가?

고근호는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판타지의 역장을 유용하게 활용할 줄 아는 작가이다. 고근호의 판타지는 매우 간명한 내러티브를 가지면서도 친숙하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조각은 회화에 비해서 훨씬 질료의 특성과 강한 유착 관계에 놓여있다. 하여 조각은 때로는 특정한 형상의 문제보다도 질료 그 자체의 매력을 전면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고근호의 조각은 조각의 근본 문제를 질료로 삼지 않고 형상이나 서사로 삼고 있다. 고근호의 조각은 각종 동물과 식물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철판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동물과 식물을 대하듯 하게 만드는 일종의 환영 효과를 주고 있다. 두꺼운 철판이 형태를 입고 그 형태가 다시 입체로 거듭한 후에 갖가지 색을 입었다. 형태와 색채를 가진 이들 조형물들은 조각공원이라는 모토 아래 일관된 서사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늘 고래', '여행나무', '항해' 등과 같은 제목들이 고근호가 조각공원에서 보여주는 서사들을 대변한다. 부엉이며 악어, 나비, 꽃 등은 이 서사 구조에 복무하는 여러 가지 텍스트들이다.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예술창작의 변화를 견인하는 주요동인 가운데 하나이다. 고근호의 철판 작업들은 그런 의미에서 컷팅의 미학이다. 두꺼운 철판을 칼이나 가위로 오려내듯 정교하게 절단해 낼 수 있는 기술력의 발달은 쇠라고 하는 물질을 전혀 다른 차원의 조각재료로 변모시킨다. 고근호가 이용한 레이저 컷팅은 작가의 상상력을 질료에 실현하는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테크놀로지가 아닐 수 없다. 우레탄 도색 또한 마찬가지로 작가의 수작업으로 진행하던 일반 도료에 비해 훨씬 더 안정적인 결과도출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날 조각은 개념적 전환을 통해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보폭만큼이나 질료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다양성을 구현하는 변화의 걸음을 널찍하게 펼치고 있다. 질료와의 대립, 심지어는 중력과의 투쟁을 조각 본연의 것으로 생각하는 모더니즘 미술 시대의 조각 개념은 이러한 질료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변화하고 있다. 예술가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과의 투쟁이 아니라 질료의 속박을 벗어나서 창의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일이다. 고근호는 흙으로 형상을 빚는 대신 형상을 드로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나간다. 물론 드로잉을 실현해주는 레이저 컷팅은 작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컷팅한 철판을 밴딩하고 조립해서 도색하는 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F.R.P.에 청동 분위기 나는 안료를 칠하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 조각의 변모는 도색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서 그 어법과 용례를 현격하게 넓혀왔다. 하여 색채는 조각의 주변부에서 조각의 중심 축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구조물들의 결합은 평면화한 형상과 형상의 단순한 결합에서부터 평면과 입체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려는 복합적인 구조체의 단초를 보이는 것들까지 있다. 철판 작업들은 크게 보자면 벽에 걸어두는 부조작업들과 바닥에 놓여 벤치 역할을 하는 입체구조물로 나뉜다. 본체로부터 뻗어 나와 연장된 철판의 길이를 고려해서 안정적인 하중 분산을 위해서 정밀하게 고안된 조형물 겸 구조물의 구조적 안정성이 돋보인다. 여섯 칸으로 이뤄진 창문 형식을 도입한 작업에서는 평면을 90도 각도로 구부려 입체공간을 형성하고 그 위에 인물과 화분을 배치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계단과 건물을 구성하고 개와 나무를 배치한 작품도 있다. 개구리, 거북이, 새, 악어 등의 형상을 만들어 바닥에 놓음으로써 하나의 독립적인 입체 구조물로 드러난 것도 여럿 있다. 달팽이와 날개 달린 고래가 기하학적인 평면 구조물 사이를 연결하기도 한다. 실물의 구조물만큼이나 벽면에 비친 그림자 또한 독자적인 의미작용을 가진다는 점도 관람자에게 흥미를 더한다. 이것이 의미를 사용하는 관람객의 반응이다. 시각예술작품이 관람의 대상이고 관람객은 관람을 통해서 작가와 감성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 전시장에서의 소통방법이다. 고근호는 여기에 구조물의 기능성을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 예술작품의 가치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의미와 기능 양자 모두에게 권능을 부여하고 있다. 관객들은 이 작품들을 의미를 가진 오브제로서만 인식하고 감상용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용가능한 오브제라는 점에 공감해서 실재 놀이기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컨대 고근호의 상상공원은 의미와 기능을 동시에 사용하는 심미적 오브제들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감상과 사용의 혼합’이나 ‘감상에서 사용으로의 전환’까지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준기 (미술비평, www.gimjung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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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17:22 2007/03/1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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