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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집단지성,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07

artpd clip | 2010/07/19 17:41


큐레이터 집단지성,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07

행사명 :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07
주최 : 한국큐레이터협회
주제 : “미술관 교류와 큐레이터의 협업”
스페셜 게스트 : 조이스 판(Joyce Fan, 싱가포르)
장소 : 덕수궁미술관 세미나실
일시 :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오후3시-

한국큐레이터협회는 정기적인 토론 프로그램으로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월례행사로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을 엽니다. 이 행사는 해외 큐레이터들을 스페셜 게스트로 초청해서 다양한 주제의 토론을 벌임으로써 국내외 큐레이터들 사이의 공통 의제를 개발하고 상호 이해증진과 교류 증진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큐레이터들의 집단 지성을 활성화하기 위한 7월의 월례포럼 자리에 싱가포르의 큐레이터 조이스 판을 초청하여 대화의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이번 행사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으로 열리는 기획전 <아시아의 리얼리즘>전을 준비해온 조이스 판을 통해서 국제적인 미술관 교류 과정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는 자리입니다. 특히 그와 함께 일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의 김인혜 큐레이터가 사회를 봄으로써 더욱 밀도있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 2010.2.20 동북아시아의 현대미술 네트워크 형성의 전망과 과제,
             차이 짜오이(국립타이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2010.3.27 이가라시 리나(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큐레이터)
* 2010.4.10 리춘펑(독립큐레이터, 홍콩)
* 2010.5.15 한스 D. 크리스트(슈트트가르트 쿤스트페어라인 디렉터)
* 2010.6.12 하정웅(재일교포 콜렉터)
* 2010.7.24 조이스 판(싱가포르현대미술관 큐레이터)

 

July 2010 KorCA Forum for Curators' Collective Intelligence


Event Name: KorCA Forum

Host Organization: Korea Curators' Association

Collaborative Organization: Art-sociological Forum, Topic: 'Art Exchange and Collective Curating'

Special Guest: Joyce Fan, Curator at the Singapore Art Museum

Location: Seminar Room in Deoksugung Art Museum

Date: July 24th (Sat), 2010 @ 3 P.M.


The Korea Curators' Association is a regularly held discussion program and is holding an event, "KorCA Forum 2010", for its members' active participation. This event seeks to promote mutual understanding and international art exchange by discussing various topics with the special guests.


Joyce Fan, curator at the Singapore Art Museum, is joining KorCA Forum in order to enhance intellectual knowledge of the curators. She has worked on 'Realism in Asia', a special exhibition that KorCA Forum has collaborated with th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Through this special event, the members of Korea Curators' Association will hear about the process of international art exchange. Her work partner, Kim In-hae, at th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will be emceeing the event.


02.22.2010 Chai Chaoi, Curator at the National Palace Museum

03.27.2010 Igarashi Rina, Curator at the Fukuoka Asian Arts Museum

04.10.2010 Lee Chunfung, Freelance curator in Hong Kong

05.15.2010 Hans D. Christ, Director of the 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

06.12.2010 Ha Jung Woong, Art collector residing in Japan

07.24.2010 Joyce Fan, Curator at the Singapore Art Museum

2010/07/19 17:41 2010/07/19 17:41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artpd clip | 2010/04/13 19:49


타이완 출신으로 쫑꿔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펑홍쯔 작가론을 쓰다가 아나키스트들을 뒤졌더니, 신채호가 나온다. 더불어서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 이들이 줄줄이 나온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Koutoku Syusui),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Osugi Sakae), 중국의 리스쩡(李石曾), 스푸(師復), 그리고 한국의 신채호(申采浩, SIN Chae-ho) 같은 선구자들이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는 잘못된 번역어 개념을 넘어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 또는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 입장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을 펼쳤다. 그 가운데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단연 매력적인데, 그 이름 "의열단"을 낳은 선언이기 때문이다. 아! 아찔하다. 만약 내가 20세기 초반에 이 땅에서 살았어야 했다면... ㅠㅠ

《조선혁명선언》, 흔히 《의열단 선언》이라고 하는 이 선언서는 한국의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신채호가 1923년에 쓴 것이다. 신채호는 독립 운동에서 평화적·외교적 방법을 배척하고 폭력적 투쟁을 주장했으며, 이 문건에서는 신채호의 이런 관점들이 현저히 드러나 있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결사 단체 의열단은 이것을 인쇄·배포하고 단원들의 필독서로 지정했다. - ko.wikisource.org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저자: 신채호 (초안)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민중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년내 소득으로 일신(一身)과 처자의 호구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끝내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여 딸각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배고픈 귀신이 아니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 학교로 보내고, 조선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소전오존의 형제" 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 한 일본놈들 적은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일본화(半日本化)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절망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 채우기,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 매는, 콧구멍에는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가진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옥문에서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 활발의 기상은 경우(境遇)의 압박에서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채찍질·구박·압제를 받아 환해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로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거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욕보인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일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존〉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 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인민 생명·재산·자유 보호" "조선인민 행복증진" 등을 거듭 밝힌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2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 보느냐?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 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개연히 이러한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일반의 배고픈 귀신이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 개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아사의 화를 면하겠는가?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종류의 자치임을 묻지 않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지배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는가 ?

설혹 강도 일본이 불보살(佛菩薩)이 되어 하루 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환부하며, 내정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헛된 이름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종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쇄망한 인도족·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금전의 힘으로 그 조상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하나는 그 토지의 넓음 과 인구의 많음으로 상고(上古)에 자유롭게 발달한 문명의 남은 혜택을 지킴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 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 혹 지켰던 전례가 있더냐?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어 대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써 호국의 좋은 계책으로 삼아 더욱 그 말세에 대단히 심하여 갑신(甲申)이래 유신당(維新黨)·수구당(守舊黨)의 성쇠가 거의 외원의 도움의 유무에서 판결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을 끌어당겨 을국을 제압함에 불과하였고, 그 믿고 의지하는 습성이 일반 정치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갑신 양 전역에 일본이 수십만 명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노 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일검일탄으로 어리석고 용렬하며 탐욕스런 관리나 국적에게 던지지 목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 청원서 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哀訴)하여 국가 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 -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년만에 처음 당하던 치욕에 대한 조선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 십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 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고도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日美戰爭)·일로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의 당시에 열국공관에 빗발돋듯 하던 종이쪽지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헤이그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메,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에 성패를 생각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아관대의로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사냥 포수의 총든 무리를 몰아가지고 조일전쟁(朝日戰爭)의 전투선에 나섰지만 신문 쪽이나 본 이들 -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아니 난다. 이에 "금일 금시로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이나 사졸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감각되어,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 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 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 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다. 경술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 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몰하여 십여 년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 만치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이 없는 단체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 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 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는가?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 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세력 곧 신·구 양 상전의 누가 더 어질며,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요,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종지의 장으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 들인다"가 혁명사의 유일미담이 되었거니와,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 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팽창의 열도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진 판단에서 이탈하여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 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일반 민중이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 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여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활잔포한 강도 일본이 필경 쫓겨 나가는 날이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천장 신문 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 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궐 안 한 때의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폭력〉 양자의 그 하나만 빠지면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를 내며 장열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이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였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쫓아내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 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후면에는 어두운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전면에는 광명한 활기이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정탐꾼·매국적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 할 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 로 쫓아낼지니라.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민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족통치를 파괴함이니라.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함이니라.

제4는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 강자가 있고 천한 자 위에 귀한 자가 있어 모든 불평등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탈, 서로 질투·원수시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말경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필경 숫자상의 공(空)이 되고 말 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함이니라.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통적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이바지하던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화하게 했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 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 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를 반항치 못함은 전혀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니,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 사상이 박약하며 자유 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1923년 1월

2010/04/13 19:49 2010/04/13 19:49

끝나지 안은 현장미술의 재해석을 꿈꾸는 사람들 : 구마담과 김삐기 인터뷰 [민족21] 2003년 3월

artpd clip | 2010/04/13 19:48


구글은 네이버보다 나와바리가 넓은 것 같다. 구글 들어가서 웹써핑하다가 이런 걸 발견했다. 얼마전인가... 저 때만해도 뭔가 청춘의 삘이 살아있는 것 같은데... 사진들 남겨 놓은 것도 변변이 없어 어쩌다 웹에서 만나면 반가운 것들... 청춘의 편린들...


끝나지 않은 현장미술의 재해석을 꿈꾸는 사람들
사람들|‘A4反戰’ 전시 기획한 카페 시월의 ‘마담과 삐끼’
[26호] 2003년 05월 01일 (목) 이경수 기자 subbu@minjog21.com

서울 홍대 앞 카페 ‘시월’에서는 작은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4월 30일까지 열릴 전시회 ‘A4反戰’을 기획한 것은 카페의 주인이자 전시기획자인 구정화  김준기 부부. ‘A4反戰’의 이모저모와 이들 부부의 삶을 함께 전한다.

서울 홍대 앞 거리는 무언가  다를 것만 같다. 술집과 밥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살림집이 있는 것은 여느 거리와 마찬가지건만 ‘홍대 앞’이란 말에는  무언가 예술적인 것, 독특한 것이 있을 것만 같은 ‘표상’이 숨어 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유통되는 클럽들,  여성주의 카페 등 같은 용도라도 무언가가 결합되어 있는 ‘이탈적’ 거리가 홍대 앞이다. 사회적인 쟁점보다는 개인적 문화취향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곳.

그런 홍대 앞에서도 ‘反戰’을 외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홍대 앞’이라는 이미지에 맞게 변형된 채로 말이다. 홍익대학교 앞 극동방송국 맞은편  골목에 자리잡은 카페 ‘시월’에서는 4월 한달 동안 ‘현장2003 : A4反戰-Art For No  War’이 열린다. 이 전시회는 카페 주인 구정화(31), 김준기(34) 씨가 기획, 여러 미술인들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A4反戰-Art For No War’은 지난 3월 중순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을 무렵 기획된 전시회이다.  전쟁을 앞두고 미술인들이  “우리도 무언가 해야  되지 않느냐”며 엉덩이를 들썩이다 탄생한 것이다.

구정화 씨는 이를 가리켜 “자기 영역 안에서 가장 익숙한 형태로 반전 목소리를 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미술인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메세지를 전하는 데’ 동참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A4反戰이 한 차례 열리는 ‘전시’라기보다는 ‘운동’에 가깝다고 한다.


A4反戰-‘전시’ 아닌 미술인들의 ‘운동’을 선언하다

“아쉬운 점은 전시물의 질이 높지  않다는 부분이 아니에요. 순발력 있게  동참할 수 있는 매체를 택한 거니까요. A4反戰이  여러 매체에 소개된 이후에도  오로지 전시를 보기 위해 카페 시월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지는 않았어요. 관객보다는 오히려 기자분들이 많이  찾죠. 어떤 ‘세태’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해서 좀 씁쓸하네요. 그런  거 있잖아요? 언론에서는 촛불시위나 반전운동을 크게 다루지만 정작 시위현장에 시민들은 많지 않은 거.”

김준기 씨는 이라크에 다녀온 미술가 최병수 씨가 카페에 들렀을 때 낯이 뜨거웠다고 한다.
직접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 앞에서 “이런 전시합니다.  한 번 찾아 주세요”라고 이야기하기가 미안해 초대도 못했단다.

“A4라는 사이즈가 이미지의 예술적 밀도는 떨어진다고 봐야죠. 기존 전시회처럼 농익지는 못하더라도 참여한 작가 60명이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 종이 안에 무얼 담을까’하고 고민을 하면서, 반전 생각을 했겠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죠. 30대 후반의 작가와 통화하면서 박노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어요.  반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안 하다가 우리도  시류에 편승하는 거 아닌가. 구정화  씨가 지적한 대로 ‘미술인들이 면피한 거다’라고 볼 수도 있어요.”

지난 4월 9일 바그다드 함락으로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A4反戰은 허망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김준기 씨는 예술의 ‘치유 역할’을 강조하며 ‘반전’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전쟁의 본질이 사라진다거나 미술인들이 할 일이 없어진다거나  그렇지는 않잖아요? 미술이 예언자적 기능과 치유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잖아요. 지금은 이라크의 여성, 어린이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발언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요. A4반전은 그래서 진행형인 거죠.”


카페 시월-배타적이지 않은 ‘사랑방 문화’를 꿈꾸다

‘A4反戰’은 카페 시월에서 열린 두 번째 전시이다.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이후 2월 20일∼3월 2일까지 젊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기획해 ‘안티 아라키전’을  연 바 있다. 시월에서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현장2001 : 건너간다’와 ‘현장2002 : Locul Cup’도 이들이 기획한 작업. ‘현장’이란 이름답게 각각 시대적인 이슈였던 1990년대를 반추하며, 2002년의 월드컵 열기를 되돌아 보기 위한 전시였다.

두 사람은 모두 미술계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전시기획자들이다. 구정화 씨는 쌈지스페이스에서, 김준기 씨는 가나 아트에서 일했다. 지난해 문을 연 카페 ‘시월’은 이들이 함께  만든 공간이다.

“우리나라의 카페는 굉장히 인공적으로  꾸며진, 가짜로 만들어진 공간이  대부분이잖아요. 카페에 온 손님 중 한 분이 그러더라구요. ‘외국처럼 200∼300년씩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는, 이야기가 있고 논쟁이 있고 토론이  있는 카페가 되면 좋겠다.’ 시월이 그런  모습을 가졌음 좋겠어요. 예를 들면 이 테이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맘에 들면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이 끼어들 수 있는, 즉석에서 토론이 이뤄지는 곳 말이죠.”

구정화 씨가 바라는 카페의 모습은 예전의 ‘사랑방’처럼 자유롭게 의견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사랑방이 남성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열려 있던 공간이란 점을 빼고, 여성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켜서 말이다.

대안공간이냐는 질문에 김준기 씨는 “사람들이 알맹이 없이 껍질만 ‘대안공간’이라고 붙인다”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앞으로  카페 ‘시월’을 통해 활동을  펼칠 생각은 분명하지만, ‘레테르 붙이기’에 좌우되지는 않겠다는 선언인 듯 하다. 앞으로 카페 시월이 어떤 ‘단단한’ 알맹이를 만들어 갈 것인가는 이들 주인 부부의 꿈에 따라 하나씩 채워지지 않을까.


아내 구정화 씨-“민중미술가를 다시 불러내고 싶다”

   
  [사진/유수]  
“민중미술이 199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 전시회를 통해 외부에서 ‘정리’됐잖아요. 민중미술의 문제의식을  갖고 미술운동과 작업에  열중하던 후배 미술가들이 황당해 했다고 들었어요.”

구정화 씨는 짧은 시간에 묻혀 버린 민중미술의 진지한 문제의식, ‘조형탐구의 시도들,  공동체적 활동방식, 사회에 대한 대자적 발언’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1980년대의 미술을 되살리면 끊어진 듯 보이는 한국미술의 맥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단다.

A4反戰에 전시된 몇몇 작품들도 미술인들의 ‘활동상’을  담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2등신 전투경찰, 부시, 노무현 인형은 전시회 이전, 작가 박건웅 씨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집회 현장을 들고 누볐던 것으로 김준기 씨가 아끼는  것이다. 구정화 씨가 의미있는 작품으로 꼽은 ‘포스터’도 마찬가지. 이 포스터는 전시회 홍보 포스터가 아니다.

“사실은 작년 9·11 테러 직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면서 만들었던 포스터에요. 이승민, 한성원, 이지영 세 명의 젊은 친구들이 포스터를 만들어서 매일 아침 7시에 홍대 지하철 역에 나와서 나눠주는 활동을 했더라구요. 벽에 붙여 놓은 것을 떼어 내면 몇 번이고 다시 붙이고. ‘포스터 운동’이라고 할까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 거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퍼포먼스로, 애니메이션 등 새 매체에 대한 시도로, 혹은 지역의 환경 공동체로 현장미술의 정신을 이어가는  미술인들의 ‘현장’활동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아직도 현장미술의 명제가 유효하다는 말이 다만  구호에만 그치지 않음을 말이다. 이들을 불러모아 포럼, 강연회 등을 이어가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아직까지는 카페 운영에 치이는 형편이죠. 조금 정리가 되고  하드웨어가 단단해 지고 나면 소프트웨어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겠죠.  곳곳에 계시는 현장 활동가들을 불러와서 묻혀 있던 것들을 발굴해서 목소리를 들어  봐야죠. 그걸 토대로 현장미술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거구요.”


남편 김준기 씨-“문화사회, 문화개혁을 꿈꾸다”

   
  구본주 씨의 목각작품 '날으는 부시맨'. 김준기 씨는 '여전히 미술가들의 미덕 중 하나는 잘 깎고, 잘 만든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손'이라 말한다.[사진/유수]  
“심광현 씨가 ‘근대사회는 잘 먹고 잘 사는 욕망의  시대다, 21세기는 근대사회를 뛰어넘어 사회적 시스템과 개인의 욕망이 합해져서 만나는 문화사회다’라고 했잖아요. 저는 노동, 통일 이런 큰 화두보다는 문화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노짱’이 대통령 된 다음에는 미술인들의 움츠러들었던 자신감도 커지고 있구요. 정책  입안자가 바뀌면 아래에서도 열심히 뒷받침해 줘야 되잖아요.”

김준기 씨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기보다는 ‘문화가 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꾼다. 문화적인 개혁을 위해 구체적인 실천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그는 그 실천이 30년쯤 후에는 사회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일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미술과 운동, 문화와 사회, 80년대의 세례에 강박되어 있는 것 아니예요?

“요즘엔 전시장 미술도 바깥 미술이라고 해서 시민들과 직접 만나는 방식을 취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무조건 나온다고 해서 의미있을 리 없죠. 관객들과 교감을 나누는 건 의미 있지만 시민들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가 빠져있었다는 거죠. 여기에  현장미술이 가졌던 기본적인 태도를 덧붙인다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공공미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미술운동은 소중한 유산이죠.”

김준기 씨는 자신같은 전시기획자가  할 일은 이러한 과제가  가능하도록 연구자, 작가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구심 역할을 하는 그를 증명하듯이 인터뷰 내내 김준기 씨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그는 지금 머리 속에 또 하나의 새로운 전시를 담아 두고 있다. 정전 50주년을 맞아 7월 24일에 ‘반전평화전’을 열었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그는  그렇게 시대를 반영하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열 예정이라고 한다.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카페 시월에서 열릴 전시회는 그가 한번씩 걸러낸 의미있는 전시회가 되리란 생각이 스친다.


‘마담’과 ‘삐끼’, 그들의 꿈

   
  카페 시월의 주인 구정화, 김준기 씨 부부.[사진/유수]  
김준기 씨는 구정화 씨를 구 마담이라고, 자신을 삐끼라고 부른다. 구정화 씨가 카페의 주인으로 집안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자신은 사람을 불러모으는  일을 한다는 얘기다. 구정화 씨는 김준기 씨를 가리켜 ‘프로그래머’라고 한다. 카페  시월에서 열리는 행사 때마다 사람들을 섭외하고, 전시를 기획해 온 것이 그의 활동이었다는 거다.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요? 당연히 있죠. 디스플레이를 해도 저는 펼치자, 정화 씨는  모으자. 결국 그런 것은 실천력 있는 사람이 하는 거예요.”(김준기)

“김준기 씨는 전시하는 것 좋아하니까 하라고 하면 되고, 저는 프로그램 운영하는 데 몰두하고 그래요. 그래도, 최종 결정권은 저한테 있어요.”(구정화)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 만난 이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각각 따로 만난 이들이지만, 이들은 다른 듯 닮았다. 묘하게 유쾌하고 달변인 점도, 전시기획자에 그치지 않고 현장미술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역할 분담이 뚜렷하다는 이들은 각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 꿈이 카페 시월에도 구석구석 스며들어, 언젠가는 카페 시월이 현장미술의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잡길 바래본다.  [2003년 5월]


=> http://www.minjog21.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08


2010/04/13 19:48 2010/04/13 19:48

문화인류학과 학예연구 :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03

artpd clip | 2010/03/15 18:12


행사명 :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03
주최 : 한국큐레이터협회
주제 : “문화인류학자로서의 큐레이터”
스페셜 게스트 : 이가라시 리나 (五十嵐理奈,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큐레이터)
장소 : 아르코미술관 세미나실
일시 :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오후3시-

한국큐레이터협회는 정기적인 토론 프로그램으로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월례행사로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을 엽합니다. 이 행사는 해외 큐레이터들을 스페셜 게스트로 초청해서 다양한 주제의 토론을 벌임으로써 국내외 큐레이터들 사이의 공통 의제를 개발하고 상호 이해증진과 교류 증진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큐레이터들의 집단 지성을 활성화하기 위한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03> 자리에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큐레이터 이가라시 리나를 초청하여 대화의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문화인류학자가 학예원이 될 때 : 방글라데시 미술계 조사로부터”라는 발제를 토대로 심도 깊은 토론을 벌이는 이 자리에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2010.2.20 동북아시아의 현대미술 네트워크 형성의 전망과 과제, 차이 짜오이(국립타이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0.3.27 이가라시 리나(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큐레이터)
2010.5.15 한스 D. 크리스트(슈트트가르트 쿤스트페어라인 디렉터)
2010.7.24 조이스 판(싱가포르현대미술관 큐레이터)

******************************************

* 다음은 발제자가 보내온 발제 아웃라인입니다.

문화인류학자가 학예연구원이 될 때 : 방글라데시 미술계의 조사로부터

이가라시 리나 五十嵐理奈(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두꺼운 묘사(thick description)"라고 하는 것은 문화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아츠의 표현이며, 어떤 인간의 행동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그 행동이나 발화(이야기 함)가 그 사회 속에 놓여있는 문맥까지 포함하여 설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류학이 이러한 인간과 사물을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와도 겹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조사의 자세이다.
후쿠오카 미술관은 설립 당초(1999년, 전신 후쿠오카시미술관 1979년 설립)부터 현지에서의 조사를 중요시 해 왔다. 미술관의 전람회라고 하는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 현지조사를 하는것도 있지만, 이번에 내가 행했던 것처럼 학예연구원 개인이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현지조사를 하기도 한다.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이 지금까지 가능한 한, 현지에서 작가가 속해있는 현장과 함께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려고 해왔던 태도가 아시아 미술계와의 네트워크를 가꾸며, 또한 미술업계 뿐만 아니라 기타 학문 영역까지 관심을 불러 일으켜 왔다.

본 보고에는 2010년 1월~2월 중순에 걸쳐서, 1개월 반 동안 방글라데시의 미술형성사 및 현대미술동향의 조사경험에 근거하여, 학예연구원이 조사자로서의 중요성과 '두꺼운 묘사'가 아닌,'두꺼운 조사(thick research/ fieldwork)'에 의거한 전람회나 미술관활동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 Geertz, Clifford. "Thick Description: Toward an Interpretive Theory of Culture". In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Selected Essays. (New York: Basic Books, 1973)


文化人類学者が学芸員になる時:バングラデシュ美術界の調査から」

五十嵐理奈(福岡アジア美術館)

 「厚い記述(thick description)」とは、文化人類学者のクリフォード・ギアーツの言葉で*、ある人間の行動だけを記述するのではなく、その行動や発話がその社会の中で置かれている文脈まで含めて説明することをさす。人類学のこうした人間や物事を理解していこうとする態度と重なる姿勢をもっているのが、福岡アジア美術館の調査のあり方である。

 福岡アジア美術館(以下、アジ美)は、その設立当初(1999年、前身の福岡市美術館は1979年設立)から、現地での調査を重要視してきた。美術館の展覧会という特定の目的のために現地調査をすることもあれば、今回私が行ったように学芸員個人が、比較的長期の現地調査を行うこともある。アジ美がこれまで、できうる限り現地におもむき、作家がおかれている現場とともに作家や作品を理解しようとしてきた姿勢が、アジアの美術界とのネットワークを培い、また美術業界だけではない他の学問領域からの関心を引きつけてきた。

 本報告では、2010年1月〜2月半ばにかけて、一ヶ月半行ったバングラデシュの美術形成史、および現代美術動向の調査の経験に基づき、学芸員がよき調査者であることの重要性と「厚い記述」ならぬ「厚い調査(thick research / fieldwork)」に基づいた展覧会や美術館活動の可能性について述べたい。

* Geertz, Clifford. "Thick Description: Toward an Interpretive Theory of Culture". In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Selected Essays. (New York: Basic Books, 1973)

2010/03/15 18:12 2010/03/15 18:12

호우에이 콜렉션 특선전 : 베트남 현대미술

artpd clip | 2010/03/03 14:16


호우에이 콜렉션 특선전 : 베트남 현대미술
Houei collection special : Modern art of Vietnam

       
     전 시 명 : 호우에이(豊英) 콜렉션 특선전 : 베트남 현대미술
                           Houei collection special : Modern art of Vietnam
            주    최 : 부산시립미술관
            전시기간 : 1부 : 2010.3.6-4.25 / 2부 : 2010.5.1-7.11      
            전시개막일 : 2010.3.12.금 오후5시
            전시장소 : 3층 소전시실
            출품작 : 기탁 및 기증 작품 100점

이 전시는 일본인 콜렉터 이토 토요키치가 부산시립미술관에 기탁 및 기증한 호우에이(豊英) 콜렉션 가운데 베트남 미술 작품 100점을 엄선하여 베트남 근현대 미술을 소개하는 장이다. 서구 미술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국의 전통을 접목한 베트남 현대미술은 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이 전시의 출품작 100점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선보인다. 1부에서는 베트남 현대미술 작가 25인의 작품을 한두 점씩 소개하고, 2부에서는 그 가운데 10인의 작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1부가 폭넓게 베트남 현대미술 전반을 소개하고 있는 반면, 2부는 투두엔, 린치, 루반신 등 대표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보여준다.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는 매우 특수하다. 한국이 20세기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식민지와 내전전쟁을 겪었듯이 베트남도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은 베트남 참전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양국의 역사를 넘어서려는 치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들을 부산시립미술관에 기탁 및 기증한 주체가 일본인 콜렉터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콜렉터 이토 토요키치는 이번 전시의 출품작을 통해서 한국과 베트남, 나아가 한국과 일본의 20세기 역사를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세기 베트남의 풍경과 일상, 사건, 역사 등을 담고 있는 100점의 예술작품들을 만나는 이번 전시는 21세기 평화의 시대를 여는 공론장이다.

2010/03/03 14:16 2010/03/03 14:16

새들이 겨울 창밖에서 기다리네 - 브레히트

artpd clip | 2010/02/24 15:39


새들이 겨울 창밖에서 기다리네

브레히트

1
나는 참새란다.
얘들아, 먹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작년에 나는 채소밭에 까마귀가 내려앉을 때마다
짹짹거리며 너희들에게 알려 주었지.
조금만 도와다오.
 참새야, 이리로 오너라.
 참새야, 여기 네가 먹을 낟알이 있다.
 좋은 일을 해주어서 참으로 고맙다!

2
나는 청딱다구리란다.
얘들아, 먹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여름 내내 나무를 쪼아대며 나는
모든 해충들을 없애 버렸지.
조금만 도와다오
 청딱다구리야, 이리로 오너라.
 청딱다구리야, 여기 네가 먹을 벌레가 있다.
 좋은 일을 해주어서 참으로 고맙다!

3
나는 지빠귀란다.
얘들아, 먹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여름동안 한결같이 이웃집 정원에서
새벽녘에 노래부른 것이 바로 나였단다.
조금만 도와다오
 지빠귀야, 이리로 오너라.
 지빠귀야, 여기 네가 먹을 낟알이 있다.
 좋은 일을 해주어서 참으로 고맙다!

2010/02/24 15:39 2010/02/24 15:39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 - Ver.1

artpd clip | 2010/02/16 18:12


큐레이터 집단지성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 - Ver.1

행사명 :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 - Ver.1
주최 : 한국큐레이터협회
주제 : 동북아시아의 현대미술 네트워크 형성의 전망과 과제
스페셜 게스트 : 차이 짜오이(국립타이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장소 : 성곡미술관 세미나실
일시 :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오후3시-

한국큐레이터협회는 정기적인 토론 프로그램으로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월례행사로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을 시작합니다. 이 행사는 해외 큐레이터들을 스페셜 게스트로 초청해서 다양한 주제의 토론을 벌임으로써 국내외 큐레이터들 사이의 공통 의제를 개발하고 상호 이해증진과 교류 증진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큐레이터들의 집단 지성을 활성화하기 위한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 첫 번째 자리에 국립타이완미술관의 학예연구실장인 차이 짜오이를 스페셜 게스트로 초청하여 대화의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동북아시아의 네트워크를 주제로 한 차이 짜오이의 발제를 토대로 심도 깊은 토론을 벌이는 이 자리에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2010.2.20 동북아시아의 현대미술 네트워크 형성의 전망과 과제, 차이 짜오이(국립타이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0.3.27 이가라시 리나(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큐레이터)
2010.5.15 한스 D. 크리스트(슈트트가르트 쿤스트페어라인 디렉터)
2010.7.24 조이스 판(싱가포르현대미술관 큐레이터)

2010/02/16 18:12 2010/02/16 18:12

I Ga-yeong, who was taken by Seo Sang-ho

artpd clip | 2010/02/05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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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5 01:17 2010/02/05 01:17

노순택, 그날의 남일당 : 다시 보기

artpd clip | 2010/01/15 10:20


노순택 개인전이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대추리와 서울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걸리지 않았다. 얼마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보여준 것이라서...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분들 장례식 마친 이 즈음에, 다시 이 작품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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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남일당. 2009년 노순택의 역작이다. 그가 그날 거기에 있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는 여느 예술가들과 남다르다. 더불어 블랙앤화이트로 이 상황을 전달하는 감성 또한 남다르다. 흑백의 논리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야만 하는 우리에게 과연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느 정도 선상에 와 있는지를 이 사진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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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5 10:20 2010/01/15 10:20

虎視牛行

artpd clip | 2010/01/05 12:46


 

虎視牛行
호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되 소처럼 우직하게 움직여라

한 선배가 신년 문자를 보냈다.
"호랑이 해. 호시우행이라 걸음 걷되 눈은 호랑이 눈으로. 바른 곳이 아니면 눈길도 발길도 주지 않는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나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호시탐탐 우측보행. 좌측보행에서 우측보행으로 바뀌었으니 우행을 잘 하는 한 해가 되어야 겠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그는 답이 없다.

2010/01/05 12:46 2010/01/0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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