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1   다음 

김원용의 '모멘트' 연작

critic & column | 2010/04/30 10:54


자신이 겪은 일들을 떠올리는 일을 기억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예전에 보았던 것을 떠올리는 일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정보를 수용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음 속에 무언가를 떠올리는 기억이라는 표상작용은 인간의 사유와 감성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기억은 심상(心像, image)의 뿌리이다. 하나의 기둥 위에 가지를 뻗고 잎을 피우는 나무들은 그 아래 수없이 갈래를 뻗은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 가지다 무수한 가지와 잎을 피우는 우리 마음의 아래에는 미세하게 뻗쳐있는 기억이라는 뿌리가 있다. 따라서 기억이란 가변적인 조각들의 연쇄이다. 고정불변의 기억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단편적인 기억 조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떠돌 뿐이다.

김원용은 기억의 편린(片鱗)을 포착한다. 그는 '모멘트'라는 주제어로 기억의 편린을 시각화 했다. 그것은 물고기의 비늘(鱗) 한 조각처럼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존재하는 기억 조각들을 담는 일이다. 그는 인간의 자아를 생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기억의 존재 방식을 형상화하기 위해 찢겨진 종이의 형상을 도입한다. 사진을 찢어놓은 것 같은 모습을 거대한 부조 패널로 만든 그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이 지난 세월동안 쌓아온 만남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2010/04/30 10:54 2010/04/30 10:54

기준김

lense & world | 2010/04/29 16:0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직 한글을 체계적으로 학습하지 않은 김구가 내 이름을 써주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내 이름 '기준김'. 그 글씨를 스캔받고 뽀샵해서 만든 타이포그라피. 기준김이라...


2010/04/29 16:00 2010/04/29 16:00

방정아, 김순임 :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critic & column | 2010/04/21 21:33


방정아 : 아메리카-방정아의 여행스케치
2010.4.8-4.21, 미광화랑

지난 해에 미국과 멕시코에 채류한 방정아가 캔버스에 담아온 이국 풍경들이 신문사 연재를 거쳐 전시장 공간에 펼쳐졌다. 거대한 대륙을 떠도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포착한 낯선 풍경 속에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현실이 담겨있다. 방정아는 전지구의 패권국가인 미국의 이면에 존재하는 모순을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시각으로 비판한다. 여성, 노인, 이민지, 원주민 인디언 등 아메리카의 소수자들을 발견하는 그림들 속에는 세계체험을 비판적 성찰로 토해내는 예술가의 통찰력이 생생히 살아있다.

김순임 : 길 잃은 나무의 숲
2010.43.-5.9, 오픈스페이스배

김순임은 노동집약적인 설치작업으로 생명과 기억의 문제를 다루었다. 바닥에는 가로세로 10cm짜리 흑경타일 6천385장을 깔았다. 그 위에 기장군청에서 가지치기한 3톤 분량의 나뭇가지들을 엮어서 숲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생명체로부터 제거당한 존재들을 반사경 위에 설치함으로써 공간을 떠도는 생명을 연출한다. 이어지는 공간에는 이불들을 설치하고 아기를 안고 있는 할머니를 솜으로 만들었다. 자연과 인간을 따뜻하게 품는 그의 섬세한 손길에서 소박한 숭고를 발견할 수 있다.

* 서울아트가이드 2010년 5월호 기고문

2010/04/21 21:33 2010/04/21 21:33

경계와 위계를 넘나드는 아나키스트 펑흥치

critic & column | 2010/04/14 02:19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계와 위계를 넘나드는 아나키스트 펑흥치

효율적 통치를 위해 등장하는 국가나 아니면 종족 공동체에 근거하는 이른바 민족의 개념이 생활공동체의 유기적인 틀로 순환하지 않고 민족 이데올로기나 국가 이데올로기로 굳어있을 때의 한계 상황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13억 인구의 중국이 처한 국가주의 통제와 훈육의 필요성은 종종 아메라카라는 패권 국가와의 대결국면으로 인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은폐하곤 한다. 그것은 뉴욕의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는 전지구화와 맞물려서 또 다른 중심의 탄생, 또는 중심의 이동으로 읽히는 지역의 블록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이 의제는 오늘날 중국의 팽창과 전지구적 차원의 권력이동의 문제와 관련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 출신의 예술가 펑흥치의 시각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대결 너머에 머물고 있다.

펑흥치는 동북아시아의 문제들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와 전지구의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제들을 다룬다. 그는 전쟁, 환경, 종교, 에너지, 제국주의, 국가주의, 자본 등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그의 현실비판은 지역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전지구적인 문제이며, 국가 패권과 개인의 자유의 관계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는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인간의 존재방식 자체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시각은 반자본이나, 반국가주의, 평화와 생태의 관점 등과 같은 몇몇 가지 이념으로 특정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적 관점을 아우르는 사유체계는 인간 존재와 인류 문명 등과 같은 매우 깊은 뿌리로 환원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펑흥치의 관점은 아나키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아나키스트의 시각은 사회붕괴의 위기, 전지구적 환경파괴의 위기, 그리고 핵무기와 같은 전쟁폭력 확산의 위기를 현대문명의 총체적 위기 상황으로 진단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체제를 넘어 현대문명의 위계적 권력구조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도자 없이’ 서로 도와서 공존할 수 있는 개인들의 창의적인 연대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의 관점은 여타의 경계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타이완에서 나고 자랐으며, 미국에 유학해서 활동했고, 지금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로서 그는 국가라는 틀 속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사유와 감성이 억압당할 수 있는지를 실존적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펑흥치의 성장과 활동 배경은 아나키즘의 가치와 결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의 아나키스트 시각은 국가 단위를 넘어선 규율과 지배에 대한 대안적 성찰이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곤 하는데, 이것은 종종 아나키즘의 진의를 벗어나 국가라는 기구만을 염두에 둔 이념으로 아나키즘의 사유 폭을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아나키즘은 폭력기구로서의 국가를 주도하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궁극적인 인류 평화공존의 길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포인트는 국가가 아닌 개인의 창의적인 발상과 실천을 통해서 상호성에 입각해 삶을 꾸리는 일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을 그 배경으로 하는 펑흥치의 현실비판은 국가주의 비판을 넘어 개인의 자유를 향한 예술적 상상력으로 그 해석의 지평을 넓힌다.

아나키즘은 고대 인도의 석가모니나 중국의 노장 사상에서부터 유럽의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지지한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나키즘은 일체의 지배를 부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재발견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사유하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구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그것은 문명구조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는 상부구조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이 상황으로부터 탈피하여 아래로부터 위로 사회를 재구조화 하고자 한다. 아나키즘은 강압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가진 창의적인 개인들의 연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종교와 국가, 민족, 자본, 정치, 문화 등 이 모든 영역에 걸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를 갈구한다.

이미 20세기 초에 시작된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은 정치운동과 결합하여 선구적인 자취를 남겼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Koutoku Syusui),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Osugi Sakae), 중국의 리스쩡(李石曾), 스푸(師復), 그리고 한국의 신채호(申采浩, SIN Chae-ho) 같은 선구자들이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는 잘못된 번역어 개념을 넘어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 또는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 입장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을 펼쳤다. 한 세기의 간극을 넘어 펑흥치라는 예술가의 작품에서 동아시아 문명권의 국가 패권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아나키즘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를 넘어 전지구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우리시대를 성찰하는 데 있어 매우 유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의 세계는 19세기 유럽에서 본격화한 아나키즘 논의가 20세기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탈제도, 탈가치, 탈권력 등의 문제는 인간 삶에 관한 자유로운 사유와 감성을 토대로 집단이 아니라 개체의 가치를 중요시한 노장사상과 만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펑흥치의 비디오 클립 <200년>은 미국 영화 네쉬빌(NASHVILLE)의 사운드트랙 '200 YEARS'를 번안한 노래이다. 아메리카의 건국 초기 200년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노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삶터를 빼앗은 침략자의 반성적 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작가와 그의 친구 샤우허가 함께 노랫말을 새로 만들고, 그 친구가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홍군, 한국전쟁 참전, 기아와 내란, 지진, 홍수, 가뭄 등을 이겨온 고난의 세월이 미래의 영광을 위한 길임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인민을 위해, 당과 조국을 위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여 200년 더 강성하자’는 후렴구를 반복한다. 원곡과 마찬가지로 강대국 中華人民共和國이라는 국가 정체성 속에서 일로매진할 것을 촉구한다. 펑흥치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국가 패권을 강화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담긴 메시지는 여러 작품들의 문맥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 작가를 통해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200년>의 내러티브를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게 하는 것은 그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 작품과 함께 놓인 다른 작품들과의 문맥 때문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펑흥치의 국가주의 비판은 다국적 자본의 문제로 이어진다. <煤炭做的悍馬>(Hummer Made of Coal)는 이라크 전쟁에서 활약한 미국의 군사용 다목적 다기능 차량인 험비(Humvee)를 응용한 트럭으로써 중국의 중공업회사인 쓰촨텅중(四川騰中)에 매각 합의했다가 스캔들이 일기도 한 브랜드이다. 펑흥치는 중국의 주요 에너지인 석탄으로 미국이 주도한 오일 전쟁의 상징인 이 차량을 만듦으로써 국가 사이를 넘나드는 에너지 문제의 실상을 풍자하고 있다. 생태자연을 거스르는 인류문명의 거래가 국경과 이념을 넘나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주의 차원을 넘어 다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임을 폭로하는 작업이다.

전쟁 폭력의 문제들을 다루는 펑흥치의 시선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동서고금을 두루 꿰뚫는다. 그는 조각상의 특정 부분을 변형하거나 왜곡하는 치환의 방식으로 충격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皆因南京大屠殺而死>(Both Died of the Nanjing Massacre)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시기의 수상을 지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얼굴을 난징 대학살의 여성 신체와 결합하여 잔인한 제국주의 폭력을 비판하고 있다. 의자에 손발이 묶인 채 둔부를 드러낸 여성의 누드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의 얼굴로 치환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DU-Baby>는 걸프전에서 사용된 열화우라늄탄의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은 기형아를 대중적인 캐릭터와 종교적 도상에 덧씌운 작품이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신의 아들 너짜(nezha)와 불교 조각인 반가사유상의 심하게 일그러진 두상을 통해서 2차 피해까지 유발하는 살상무기의 위험성을 비판한다.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문명으로 치닫는 당대 사회에 있어 종교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제이다. <Farfur, the Martyr>는 치환의 방식으로 성속(聖俗)의 문제를 다룬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신체에 얼굴을 미키 마우스 얼굴로 전치한 이 조각은 성스러운 희생과 전지구적인 차원의 문화제국주의를 한 몸으로 만듦으로써 여기에서 발생하는 역설을 이용해 종교와 대중문화, 성스러움과 세속의 가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 <God Pound>는 도교의 조각신상 수백 개를 바닥에 설치함으로써 개인들의 사소한 기복을 위해 소비되는 신앙의 대상들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복신앙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開光後的耶像-1>(Jesus in Jesus-1)은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도상을 뒤섞음으로써 인간이 가진 욕망의 유사성이 종교에 투영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落難神明像("Misfortune God)>은 버려진 (로또 당첨 기원용) 신상들을 이용한 사진 작업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인간 존재와 가장 밀접한 동물인 개를 등장시켜 인간 존재를 은유한다. 10개의 비디오 클립으로 이뤄진 <犬僧>(Canine Monk)은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개별적으로 선보였던 작품을 모은 것이다. 텍스트 위에 개 사료를 입혀서 개가 핥아먹게 한 후 이것을 리와인드(rewind)해서 마치 개가 혀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작업이다. 펑흥치는 동서고금의 다국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개를 개입시켜 개가 쓰는 글을 주의깊게 관찰하게 만든다. 2006년 작 비디오 작업인 <道教符籙選<(Excerpts from the Taoist Protective Talisman) 역시 개가 쓰는 글씨이다. 개가 쓰는 도교 부적 텍스트의 유머와 시니시즘은 펑흥치 작업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2002년 작 <小丹尼- 奧地利製造 >(Little Danny)는 300개의 개인형으로 만든 설치 작품이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개체의 가능성을 상실해가는 인간 존재의 메커니즘을 성찰하는 작품이다.

펑흥치의 작품에서 아나키스트의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가 사회과학자의 시각으로 구조를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고, 생활인의 자세로 일상을 들여다보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폭력에 노출된 나약한 개인의 상처를 드러내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구조와 개인의 상호관계를 성찰할 수 있다. 폭력에 노출된 인간은 국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사회체제의 구조를 위로부터의 위계적 조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상호부조하는 구조로 파악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상호’라는 개념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개별적 주체들이 서로 공존하고 동행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한 배려와 성찰을 담고 있다. 그것은 국가체제 속의 국민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시민사회 속에서 개인을 발견하는 일이다. 진정한 아나키즘은 사회구조 안에서 개인을 들여다보는 일과 생활세계에서 개인을 발견하는 일을 병행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가와 시민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연구자나 예술가가 들여다보는 사회와 일상에 비해서 시민 자신들이 스스로 성찰하고 사유하는 생황세계 사이에는 모종의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예술가 주체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발상을 표출하는 데 의미를 두는 존재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태생적으로 아나키스트이다. 예술가는 우리사회의 현실에 관한 새로운 성찰과 사유를 생산하는 지식인이다. 아나키스트의 태도를 가진 펑흥치의 작품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술적 소통은 당대의 현실과 미래의 비전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패권주의의 위기에 처한 동북아시아와 전지구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제시하는 펑흥치의 지식생산을 각별히 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준기(金俊起, GIM Jun-gi, 미술평론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0/04/14 02:19 2010/04/14 02:19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artpd clip | 2010/04/13 19:49


타이완 출신으로 쫑꿔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펑홍쯔 작가론을 쓰다가 아나키스트들을 뒤졌더니, 신채호가 나온다. 더불어서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 이들이 줄줄이 나온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Koutoku Syusui),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Osugi Sakae), 중국의 리스쩡(李石曾), 스푸(師復), 그리고 한국의 신채호(申采浩, SIN Chae-ho) 같은 선구자들이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는 잘못된 번역어 개념을 넘어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 또는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 입장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을 펼쳤다. 그 가운데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단연 매력적인데, 그 이름 "의열단"을 낳은 선언이기 때문이다. 아! 아찔하다. 만약 내가 20세기 초반에 이 땅에서 살았어야 했다면... ㅠㅠ

《조선혁명선언》, 흔히 《의열단 선언》이라고 하는 이 선언서는 한국의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신채호가 1923년에 쓴 것이다. 신채호는 독립 운동에서 평화적·외교적 방법을 배척하고 폭력적 투쟁을 주장했으며, 이 문건에서는 신채호의 이런 관점들이 현저히 드러나 있다. 한국의 무정부주의 결사 단체 의열단은 이것을 인쇄·배포하고 단원들의 필독서로 지정했다. - ko.wikisource.org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저자: 신채호 (초안)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민중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년내 소득으로 일신(一身)과 처자의 호구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끝내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여 딸각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배고픈 귀신이 아니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 학교로 보내고, 조선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소전오존의 형제" 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 한 일본놈들 적은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일본화(半日本化)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절망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 채우기,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 매는, 콧구멍에는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가진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옥문에서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 활발의 기상은 경우(境遇)의 압박에서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채찍질·구박·압제를 받아 환해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로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거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욕보인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일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존〉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 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인민 생명·재산·자유 보호" "조선인민 행복증진" 등을 거듭 밝힌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2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 보느냐?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 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개연히 이러한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일반의 배고픈 귀신이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 개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아사의 화를 면하겠는가?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종류의 자치임을 묻지 않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지배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는가 ?

설혹 강도 일본이 불보살(佛菩薩)이 되어 하루 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환부하며, 내정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헛된 이름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종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쇄망한 인도족·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금전의 힘으로 그 조상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하나는 그 토지의 넓음 과 인구의 많음으로 상고(上古)에 자유롭게 발달한 문명의 남은 혜택을 지킴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 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 혹 지켰던 전례가 있더냐?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어 대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써 호국의 좋은 계책으로 삼아 더욱 그 말세에 대단히 심하여 갑신(甲申)이래 유신당(維新黨)·수구당(守舊黨)의 성쇠가 거의 외원의 도움의 유무에서 판결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을 끌어당겨 을국을 제압함에 불과하였고, 그 믿고 의지하는 습성이 일반 정치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갑신 양 전역에 일본이 수십만 명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노 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일검일탄으로 어리석고 용렬하며 탐욕스런 관리나 국적에게 던지지 목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 청원서 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哀訴)하여 국가 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 -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년만에 처음 당하던 치욕에 대한 조선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 십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 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고도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日美戰爭)·일로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의 당시에 열국공관에 빗발돋듯 하던 종이쪽지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헤이그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메,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에 성패를 생각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아관대의로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사냥 포수의 총든 무리를 몰아가지고 조일전쟁(朝日戰爭)의 전투선에 나섰지만 신문 쪽이나 본 이들 -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아니 난다. 이에 "금일 금시로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이나 사졸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감각되어,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 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 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 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다. 경술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 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몰하여 십여 년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 만치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이 없는 단체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 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 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는가?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 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세력 곧 신·구 양 상전의 누가 더 어질며,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요,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종지의 장으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 들인다"가 혁명사의 유일미담이 되었거니와,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 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팽창의 열도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진 판단에서 이탈하여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 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일반 민중이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 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여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활잔포한 강도 일본이 필경 쫓겨 나가는 날이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천장 신문 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 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궐 안 한 때의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폭력〉 양자의 그 하나만 빠지면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를 내며 장열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이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였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쫓아내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 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후면에는 어두운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전면에는 광명한 활기이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정탐꾼·매국적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 할 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 로 쫓아낼지니라.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민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족통치를 파괴함이니라.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함이니라.

제4는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 강자가 있고 천한 자 위에 귀한 자가 있어 모든 불평등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탈, 서로 질투·원수시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말경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필경 숫자상의 공(空)이 되고 말 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함이니라.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통적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이바지하던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화하게 했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 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 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를 반항치 못함은 전혀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니,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 사상이 박약하며 자유 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1923년 1월

2010/04/13 19:49 2010/04/13 19:49

끝나지 안은 현장미술의 재해석을 꿈꾸는 사람들 : 구마담과 김삐기 인터뷰 [민족21] 2003년 3월

artpd clip | 2010/04/13 19:48


구글은 네이버보다 나와바리가 넓은 것 같다. 구글 들어가서 웹써핑하다가 이런 걸 발견했다. 얼마전인가... 저 때만해도 뭔가 청춘의 삘이 살아있는 것 같은데... 사진들 남겨 놓은 것도 변변이 없어 어쩌다 웹에서 만나면 반가운 것들... 청춘의 편린들...


끝나지 않은 현장미술의 재해석을 꿈꾸는 사람들
사람들|‘A4反戰’ 전시 기획한 카페 시월의 ‘마담과 삐끼’
[26호] 2003년 05월 01일 (목) 이경수 기자 subbu@minjog21.com

서울 홍대 앞 카페 ‘시월’에서는 작은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4월 30일까지 열릴 전시회 ‘A4反戰’을 기획한 것은 카페의 주인이자 전시기획자인 구정화  김준기 부부. ‘A4反戰’의 이모저모와 이들 부부의 삶을 함께 전한다.

서울 홍대 앞 거리는 무언가  다를 것만 같다. 술집과 밥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살림집이 있는 것은 여느 거리와 마찬가지건만 ‘홍대 앞’이란 말에는  무언가 예술적인 것, 독특한 것이 있을 것만 같은 ‘표상’이 숨어 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유통되는 클럽들,  여성주의 카페 등 같은 용도라도 무언가가 결합되어 있는 ‘이탈적’ 거리가 홍대 앞이다. 사회적인 쟁점보다는 개인적 문화취향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곳.

그런 홍대 앞에서도 ‘反戰’을 외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홍대 앞’이라는 이미지에 맞게 변형된 채로 말이다. 홍익대학교 앞 극동방송국 맞은편  골목에 자리잡은 카페 ‘시월’에서는 4월 한달 동안 ‘현장2003 : A4反戰-Art For No  War’이 열린다. 이 전시회는 카페 주인 구정화(31), 김준기(34) 씨가 기획, 여러 미술인들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A4反戰-Art For No War’은 지난 3월 중순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을 무렵 기획된 전시회이다.  전쟁을 앞두고 미술인들이  “우리도 무언가 해야  되지 않느냐”며 엉덩이를 들썩이다 탄생한 것이다.

구정화 씨는 이를 가리켜 “자기 영역 안에서 가장 익숙한 형태로 반전 목소리를 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미술인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메세지를 전하는 데’ 동참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A4反戰이 한 차례 열리는 ‘전시’라기보다는 ‘운동’에 가깝다고 한다.


A4反戰-‘전시’ 아닌 미술인들의 ‘운동’을 선언하다

“아쉬운 점은 전시물의 질이 높지  않다는 부분이 아니에요. 순발력 있게  동참할 수 있는 매체를 택한 거니까요. A4反戰이  여러 매체에 소개된 이후에도  오로지 전시를 보기 위해 카페 시월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지는 않았어요. 관객보다는 오히려 기자분들이 많이  찾죠. 어떤 ‘세태’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해서 좀 씁쓸하네요. 그런  거 있잖아요? 언론에서는 촛불시위나 반전운동을 크게 다루지만 정작 시위현장에 시민들은 많지 않은 거.”

김준기 씨는 이라크에 다녀온 미술가 최병수 씨가 카페에 들렀을 때 낯이 뜨거웠다고 한다.
직접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 앞에서 “이런 전시합니다.  한 번 찾아 주세요”라고 이야기하기가 미안해 초대도 못했단다.

“A4라는 사이즈가 이미지의 예술적 밀도는 떨어진다고 봐야죠. 기존 전시회처럼 농익지는 못하더라도 참여한 작가 60명이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 종이 안에 무얼 담을까’하고 고민을 하면서, 반전 생각을 했겠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죠. 30대 후반의 작가와 통화하면서 박노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어요.  반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안 하다가 우리도  시류에 편승하는 거 아닌가. 구정화  씨가 지적한 대로 ‘미술인들이 면피한 거다’라고 볼 수도 있어요.”

지난 4월 9일 바그다드 함락으로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A4反戰은 허망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김준기 씨는 예술의 ‘치유 역할’을 강조하며 ‘반전’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전쟁의 본질이 사라진다거나 미술인들이 할 일이 없어진다거나  그렇지는 않잖아요? 미술이 예언자적 기능과 치유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잖아요. 지금은 이라크의 여성, 어린이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발언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요. A4반전은 그래서 진행형인 거죠.”


카페 시월-배타적이지 않은 ‘사랑방 문화’를 꿈꾸다

‘A4反戰’은 카페 시월에서 열린 두 번째 전시이다.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이후 2월 20일∼3월 2일까지 젊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기획해 ‘안티 아라키전’을  연 바 있다. 시월에서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현장2001 : 건너간다’와 ‘현장2002 : Locul Cup’도 이들이 기획한 작업. ‘현장’이란 이름답게 각각 시대적인 이슈였던 1990년대를 반추하며, 2002년의 월드컵 열기를 되돌아 보기 위한 전시였다.

두 사람은 모두 미술계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전시기획자들이다. 구정화 씨는 쌈지스페이스에서, 김준기 씨는 가나 아트에서 일했다. 지난해 문을 연 카페 ‘시월’은 이들이 함께  만든 공간이다.

“우리나라의 카페는 굉장히 인공적으로  꾸며진, 가짜로 만들어진 공간이  대부분이잖아요. 카페에 온 손님 중 한 분이 그러더라구요. ‘외국처럼 200∼300년씩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는, 이야기가 있고 논쟁이 있고 토론이  있는 카페가 되면 좋겠다.’ 시월이 그런  모습을 가졌음 좋겠어요. 예를 들면 이 테이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맘에 들면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이 끼어들 수 있는, 즉석에서 토론이 이뤄지는 곳 말이죠.”

구정화 씨가 바라는 카페의 모습은 예전의 ‘사랑방’처럼 자유롭게 의견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사랑방이 남성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열려 있던 공간이란 점을 빼고, 여성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켜서 말이다.

대안공간이냐는 질문에 김준기 씨는 “사람들이 알맹이 없이 껍질만 ‘대안공간’이라고 붙인다”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앞으로  카페 ‘시월’을 통해 활동을  펼칠 생각은 분명하지만, ‘레테르 붙이기’에 좌우되지는 않겠다는 선언인 듯 하다. 앞으로 카페 시월이 어떤 ‘단단한’ 알맹이를 만들어 갈 것인가는 이들 주인 부부의 꿈에 따라 하나씩 채워지지 않을까.


아내 구정화 씨-“민중미술가를 다시 불러내고 싶다”

   
  [사진/유수]  
“민중미술이 199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 전시회를 통해 외부에서 ‘정리’됐잖아요. 민중미술의 문제의식을  갖고 미술운동과 작업에  열중하던 후배 미술가들이 황당해 했다고 들었어요.”

구정화 씨는 짧은 시간에 묻혀 버린 민중미술의 진지한 문제의식, ‘조형탐구의 시도들,  공동체적 활동방식, 사회에 대한 대자적 발언’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1980년대의 미술을 되살리면 끊어진 듯 보이는 한국미술의 맥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단다.

A4反戰에 전시된 몇몇 작품들도 미술인들의 ‘활동상’을  담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2등신 전투경찰, 부시, 노무현 인형은 전시회 이전, 작가 박건웅 씨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집회 현장을 들고 누볐던 것으로 김준기 씨가 아끼는  것이다. 구정화 씨가 의미있는 작품으로 꼽은 ‘포스터’도 마찬가지. 이 포스터는 전시회 홍보 포스터가 아니다.

“사실은 작년 9·11 테러 직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면서 만들었던 포스터에요. 이승민, 한성원, 이지영 세 명의 젊은 친구들이 포스터를 만들어서 매일 아침 7시에 홍대 지하철 역에 나와서 나눠주는 활동을 했더라구요. 벽에 붙여 놓은 것을 떼어 내면 몇 번이고 다시 붙이고. ‘포스터 운동’이라고 할까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 거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퍼포먼스로, 애니메이션 등 새 매체에 대한 시도로, 혹은 지역의 환경 공동체로 현장미술의 정신을 이어가는  미술인들의 ‘현장’활동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아직도 현장미술의 명제가 유효하다는 말이 다만  구호에만 그치지 않음을 말이다. 이들을 불러모아 포럼, 강연회 등을 이어가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아직까지는 카페 운영에 치이는 형편이죠. 조금 정리가 되고  하드웨어가 단단해 지고 나면 소프트웨어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겠죠.  곳곳에 계시는 현장 활동가들을 불러와서 묻혀 있던 것들을 발굴해서 목소리를 들어  봐야죠. 그걸 토대로 현장미술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거구요.”


남편 김준기 씨-“문화사회, 문화개혁을 꿈꾸다”

   
  구본주 씨의 목각작품 '날으는 부시맨'. 김준기 씨는 '여전히 미술가들의 미덕 중 하나는 잘 깎고, 잘 만든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손'이라 말한다.[사진/유수]  
“심광현 씨가 ‘근대사회는 잘 먹고 잘 사는 욕망의  시대다, 21세기는 근대사회를 뛰어넘어 사회적 시스템과 개인의 욕망이 합해져서 만나는 문화사회다’라고 했잖아요. 저는 노동, 통일 이런 큰 화두보다는 문화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노짱’이 대통령 된 다음에는 미술인들의 움츠러들었던 자신감도 커지고 있구요. 정책  입안자가 바뀌면 아래에서도 열심히 뒷받침해 줘야 되잖아요.”

김준기 씨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기보다는 ‘문화가 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꾼다. 문화적인 개혁을 위해 구체적인 실천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그는 그 실천이 30년쯤 후에는 사회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일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미술과 운동, 문화와 사회, 80년대의 세례에 강박되어 있는 것 아니예요?

“요즘엔 전시장 미술도 바깥 미술이라고 해서 시민들과 직접 만나는 방식을 취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무조건 나온다고 해서 의미있을 리 없죠. 관객들과 교감을 나누는 건 의미 있지만 시민들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가 빠져있었다는 거죠. 여기에  현장미술이 가졌던 기본적인 태도를 덧붙인다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공공미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미술운동은 소중한 유산이죠.”

김준기 씨는 자신같은 전시기획자가  할 일은 이러한 과제가  가능하도록 연구자, 작가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구심 역할을 하는 그를 증명하듯이 인터뷰 내내 김준기 씨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그는 지금 머리 속에 또 하나의 새로운 전시를 담아 두고 있다. 정전 50주년을 맞아 7월 24일에 ‘반전평화전’을 열었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그는  그렇게 시대를 반영하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열 예정이라고 한다.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카페 시월에서 열릴 전시회는 그가 한번씩 걸러낸 의미있는 전시회가 되리란 생각이 스친다.


‘마담’과 ‘삐끼’, 그들의 꿈

   
  카페 시월의 주인 구정화, 김준기 씨 부부.[사진/유수]  
김준기 씨는 구정화 씨를 구 마담이라고, 자신을 삐끼라고 부른다. 구정화 씨가 카페의 주인으로 집안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자신은 사람을 불러모으는  일을 한다는 얘기다. 구정화 씨는 김준기 씨를 가리켜 ‘프로그래머’라고 한다. 카페  시월에서 열리는 행사 때마다 사람들을 섭외하고, 전시를 기획해 온 것이 그의 활동이었다는 거다.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요? 당연히 있죠. 디스플레이를 해도 저는 펼치자, 정화 씨는  모으자. 결국 그런 것은 실천력 있는 사람이 하는 거예요.”(김준기)

“김준기 씨는 전시하는 것 좋아하니까 하라고 하면 되고, 저는 프로그램 운영하는 데 몰두하고 그래요. 그래도, 최종 결정권은 저한테 있어요.”(구정화)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 만난 이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각각 따로 만난 이들이지만, 이들은 다른 듯 닮았다. 묘하게 유쾌하고 달변인 점도, 전시기획자에 그치지 않고 현장미술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역할 분담이 뚜렷하다는 이들은 각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 꿈이 카페 시월에도 구석구석 스며들어, 언젠가는 카페 시월이 현장미술의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잡길 바래본다.  [2003년 5월]


=> http://www.minjog21.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08


2010/04/13 19:48 2010/04/13 19:48

釜市美の春, 女心と男心 そして ヨーロッパの心

lense & world | 2010/04/07 14:16


釜市美に花がぱっと開きました。

사용자 삽입 이미지

釜市美の春

사용자 삽입 이미지
女心

사용자 삽입 이미지


男心

사용자 삽입 이미지
そして ヨーロッパの心
2010/04/07 14:16 2010/04/07 14:16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