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뿌리내리는 공공미술을 위하여 : 래미안의 경우
critic & column | 2008/11/11 01:35
삶 속에 뿌리내리는 공공미술을 위하여 : 래미안의 경우
명품 아파트를 지향하는 래미안의 공공미술은 과연 명품인가? 누구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질문이다. 미술작품에 있어서의 명품 개념이 어떤 것인지, 특히 아파지 분야의 명품이 20세기 버전의 미술 개념과 어느 정도 일치할지에 관한 명확한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파티와 마찬가지로 미술작품에 관한 개념도 변화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21세기 초반의 한국사회에서 미술계를 대표하는 이슈는 공공미술이다. 공공미술은 공공장소에서 이뤄지는, 공공기금으로 조성된, 공공의 이해와 요구에 수렴하는 미술작품을 말한다. 건축물 미술장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단지에 조성되는 공공미술 작품들은 생활공간이라는 장소성을 가지는 매우 중요한 공공미술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사회의 미술장식품 제도의 문제점을 반추해보고, 아파트 단지의 미술장식품이 차지하는 공공미술로서의 위치를 파악한 후에 공공미술의 개념 속에서 예술과 생활 영역을 매개하는 예술적 기능을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공공미술의 방향성을 얘기해보는 것이 이 글의 수순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를 둘러싼 수많은 불협화음과 제도적 모순과 미학적 결핍에 관해서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의 도시에 들어선 공공장소의 미술작품들의 면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개별 작가들의 예술적 역량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 한계와 미학적 인식 등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할 몇몇 문제들이 특정 지역이나 장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에게 해당한다.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는 이미 미학적 결여를 지적 받았고, 제도적 파산을 선고받았다.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이렇게 존폐여부까지 언급되고 있는지를 알기위해서는 건축물 미술장식 이라는 제도의 출발과 진행과정 전체를 면밀히 분석해보는 것이 첫걸음일 것이다.
도심 속의 환경공해조각이라는 비난을 받기까지 하는 미술장식품에 관한 비관적 리포트는 이제 상식을 넘어 식상한 얘기가 됐다. 근대성의 덫에 걸린 미술장식품의 미학적 결여 때문이다. 미술장식이라는 개념은 근대성의 분화(分化) 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더니즘 예술의 이념으로부터 탄생했다. 특히 ‘건축물’ 미술장식이라는 명명은 이러한 정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축물을 미술품으로 장식하겠다’는 개념은 근대성의 본질인 체계적인 영역분할에 따른 기능적인 합리성일 뿐이다. 이것은 건축물이라는 선행 결과물에 미술장식품이라는 후행 첨가물을 부가하는 절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건축과 미술의 만남을 상호 협업의 개념이 아닌 주종관계나 선후관계로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심각한 장애요소를 만들고 있다.
미술장식이라는 개념은 근대적 미술개념의 오류에 입각해서 공공 영역에서의 미술을 소외시키고 있다. 광화문 네거리 한쪽에 있는 고종황제칭경기념비각은 기념비를 둘러싼 건축과 조각의 결합으로 구성되어있다. 그곳에는 서예와 전각과 목조건축과 조각이 한데 어우러져있다. 이것이 전근대적인 인식과 감성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 통합의 시선이다. 반면에 그 앞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거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조각 오브제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동해서 서울역으로 이동해보자. 신축 서울역사 앞의 공공미술 작품은 역사 내부의 벤치들과 달리 인근 공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벤치의 기능성을 넘어서 미술작품의 예술적 자율성에 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은 스트리트 퍼니처와 결합한 조형물의 좋은 사례로 손꼽힌다. 작품의 의미와 더불어 사용의 맥락이 결합함으로써 근대적 미학 개념을 넘어 탈근대적인 예술의 맹아를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미술장식품이 미학적으로 조야한 것은 개별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술장식이라는 설정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건축과 미술의 협업, 미술과 장소의 만남, 역사와 작품의 동행, 생태와 미술의 공존, 예술과 의제의 결합을 가로막고 있는 악의 근원이다. 따라서 미술장식이라는 개념은 예술의 공공성을 오도하고 있다. 그것은 공공장소에서 공적인 재정으로 공적인 의제를 다루는 예술적 공공성과는 다른 논리로 움직이면서 건축물과 미술작품(장식품) 양자 간의 어색한 만남을 주선하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술장식의 결여는 근대적 예술개념의 결여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술장식이 이념적으로 결여한 통합의 정치학을 갈구하는 일일 것이다.
예술가 지원과 도시환경 미화. 이 두 가지 목표는 미술장식제도를 만든 가장 큰 명분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목표는 미술장식의 미학적 결여와 제도적 파산으로 인해 실종상태에 이르렀다. 분배의 정의를 상실한 부조리한 시장논리로 인해서 증발해버린 예술가 지원이라는 취지는 이 제도의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가장 큰 당위 가운데 하나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현실은 미술장식에서도 마찬 가지다. 도시의 시각환경을 미화한다는 애초의 목표는 이미 실효를 상실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미술계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잘 만든 작품일지라도 작품의 보존과 관리 수준에 따라 죽고 산다. 동일한 작가의 작품도 관리 측의 관심 여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래미안의 공공미술 작품들도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2006년 이후 3년간 설치된 작품들을 통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미술장식품-공공미술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재료 면에 있어서 매우 다양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석재와 철재 또는 브론즈 등의 전통적인 재료를 선택하는가 하면 그 밖의 재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수퍼 밀러와 같이 최근의 건축 경향과 어울리는 소재를 쓰기도 한다. 유리나 모자이크나 도자기와 같이 친밀감을 더해주는 재료도 많다. 컬러링 기법도 점점 다양해져서 우레탄 도장과 같은 특수한 재료로 마감을 해서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조각 재료에 LED 조명을 사용해서 디지털 미디어를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재료뿐만 아니라 작품의 기본 개념에 있어서도 진화하고 있다. 아파트 거주민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안락하고 친숙한 이미지를 채택함으로써 예술가의 일방통행을 견제하고 있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주민들이 그저 바라보는 감상용 작품뿐만 아니라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스트리트 퍼니처 형식의 작품들은 새로운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넓혀주고 있다. 근대적 미학에 기초해서 관람자 위에 군림하는 권위적인 작품은 수직 상승의 조형성을 위주로 한다. 이에 비해 수평과 확장 개념의 낮은 공공미술은 관람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생활 속 미술의 성찰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제도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과정으로서의 공공미술이 부재한 것이 아쉽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고 관람자는 그 작품을 감상한다는 일방적인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작가와 주민이 함께 예술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통해 과정으로서의 공공미술을 실현하는 것이 향후 과제이다.
조명은 작품을 죽이고 살리는 매우 결정적인 요소이다. 도시의 경관은 야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특히 생활공간에서 작품을 대하는 거주자들의 입장에서는 낮보다는 밤에 작품을 대할 일이 많다. 따라서 야간 조명을 통해서 어둠 속에서도 살아있는 작품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는 뉴데코레이션의 관점도 중요하다. 미술장식품이 건물과 공간을 장식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는 설정이 보다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 작품은 장소나 공간의 기본 개념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그곳에 자리잡을 수 있는 명확한 공간 개념을 가져야 한다. 많은 작품들이 전시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와 공공장소에 놓일 때가 확연하게 다른데, 공공장소에 놓이는 작품은 장소나 공간의 맥락을 유연하게 타고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 방향은 미술장식품을 공공미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지름길이다. 기존의 미술장식품 프로세스는 거주자들의 면면과는 완전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이것은 현 제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만약 방법이 있다면 사전에 입주자들의 정서와 관심사를 고려해서 작업 방향을 정하는 게 정말 필요하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작품 설치 후에 거주민들이 그 작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미술에 관한 막연한 관행에 입각해서 미적 가치를 담고 있는 거대한 조형물을 정원 어딘가에 설치해두었다고 해서 그 미적 가치를 통해서 정서적인 소통과 교감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설정이 그리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이미 지난 수십년간의 체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공공미술의 개념이 변화하고 있다. 미술장식품 제도 자체에 관한 개혁 논의와 더불어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의 공공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새로운 공공미술이 강조하는 공동체 지향의 미술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거론되곤 한다. 아파트 단지는 매우 중요한 공동체이다. 구조상 한군데 밀집해 있지는 하지만 주민들 사이의 상호 소통이 차단된 차가운 공간이라는 점이 아파트 공동체의 한계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매개 역할로서의 공공미술을 꿈꾼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을 통한 삶의 재발견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래미안의 미술장식품이 예술적 소통을 매개로 삶이 삶 속에 뿌리내리는 공공미술로 거듭나는 길은 먼 데 있지 않다. 미술장식이라는 개념과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실험정신이 필요하다. 현재의 관행과 제도를 넘어서는 작은 시도들이 예술을 바꾸고 삶을 바꿀 수 있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래미안 아파트 공공미술 자료집 기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