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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전 노래책

critic & column | 2008/11/28 10:34


나의 고전 노래책

이번 생에서 내가 가장 많이 접하는 책은 단연 미술 관련 서적이다. 직업상 전시회 카탈로그에서부터 미술사와 비평, 학술 서적에 이르기까지 목차와 서문 정도라도 눈에 한번씩은 넣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 서적들이 이렇게 직업적인 의무를 동반하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내 곁에 있는 사랑스러운 책들이 있다. 노래책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음악책은 물론 교회 성가대의 악보집을 비롯해 중3때 연합고사 마친 후 기타를 잡으면서 보기 시작한 노래책은 늘 나와 함께 했다.

변성기의 목소리로 헨델과 모차르트의 레파토리를 따라잡던 교회 시절에도 대중가요와 팝송은 가장 절친한 벗이었다. 노래패 기타 리스트를 맡았던 대학 시절, 노래책은 나의 가장 절실한 텍스트였다. 군대 시절과 복학생 시절에도 기타 한 대와 노래책은 작업의 정석을 위한 필수품이었고, 해운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지금까지도 노래책은 나를 확인하는 고전이다.

화가 박영균이 그린 <86학번 김대리>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세태를 담고 있다. 안치환이 만든 노래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는 김대리는 마이크를 들고 반라의 여성이 등장하는 모니터 앞에서 노래한다. 노래방에 가면 사람들은 열심히 독서를 한다. 타인의 노래를 듣기보다 자신이 부를 노래를 선정하기 위해 열심히 노래목록을 독서하는 것이다. 노래책 대신 등장한 화면은 사람과 노래의 살뜰한 만남을 제한한다. 악보와 가사가 노랫말이 있는 노래책의 매력을 상실한 시대이다. 기계가 없으면 노래 한 가락 못 뽑는 현대인의 모습은 노래책의 실종과 맥락을 같이한다.

노래는 문학과 다르고 음악과도 다르다. 노래책은 악보와 시와 화보를 함께 담은 좋은 책이다. 음악 평론가 이영미가 펴낸 정태춘 노래집은 그 자체로 서정적인 시집이자 악보집일 뿐만 아니라 사진집이고 비평집이다. 그의 예민한 감성과 카랑카랑한 비판적 지식이 녹아있는 노래책은 음반에 맞먹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김준기(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한국일보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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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11/h2008112903130484210.htm

2008/11/28 10:34 2008/11/28 10:34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 : 한국 예술계의 새로운 개척자들에 관한 리포트와 제언

critic & column | 2008/11/27 18:30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
한국 예술계의 새로운 개척자들에 관한 리포트와 제언

1.
이 글은 2007년 한 해 동안 진행된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 영역을 갈무리해서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한국 예술계의 개척자들의 면면을 들여다 볼 것이다. 특히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을 다룰 텐데, 이때 전제로 삼아야 할 대목이 여기서 다룰 다원예술의 범위를 정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다원예술은 지원정책을 위한 범주화를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러다보니 탈장르, 복합장르, 소외장르 등의 여러 가지 개념들이 섞여있다. 따라서 그러한 현상을 연보 수준으로 정리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문예연감에서 새로 만든 다원예술 분야의 기록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난점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분석 대상을 지원정책에 의해 노출된 프로젝트로 한정했다. 이 글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2007년 다원예술 공모를 거쳐서 진행된 프로젝트 55개이다. 다원예술로 분류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신뢰할만한 정보를 취합하기 어려운 여건에서 이들 프로젝트들에 한정해서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다원예술을 다뤄볼 것이다.
다원예술 분야의 시각예술이란 어떤 것인지 그 영역을 가늠하는 일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다원예술 프로젝트들이 탈장르 또는 혼합장르를 지향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시각예술 기반의 프로젝트들을 따로 분별해보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에 관해 나름의 선을 두고 가야할 것이다. 이 기록은 수많은 다원예술 프로젝트들 속에서 1) 시각예술 영역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예술가들이 고유의 영역을 벗어나서 벌이는 프로젝트, 2) 전시회 등과 같이 시각예술의 전형적인 장을 채택하면서도 그 바깥의 장르를 끌어들이고 있는 프로젝트, 3) 직업적인 시각예술가가 여는 전시회와 같이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조형이나 영상 등과 같이 시각 미디어를 활용한 프로젝트 등을 중심으로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을 찾아볼 것이다. 이때 시각예술적인 콘텐츠가 어느 정도의 예술적 가치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했음을 밝힌다. 기록과 비평의 간극에서 기록에 좀 더 무게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2007년의 다원예술 일반의 지원은 55개 프로젝트인데,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수를 시각예술 기반의 프로젝트로 분류할 수 있다. 기금의 규모로 보면 총 8억원의 지원예산 가운데 절반을 상회하는 4억원 이상의 예산이 시각예술 관련 프로젝트에 투여되었다. 물론 시각예술의 요소를 가지고 있되 타 장르와의 혼합이나 특정 장르의 고유한 어법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음은 다원예술의 특성상 기본적인 조건일 것이다. 여기에 언급하는 프로젝트들은 한국사회의 예술지형을 선도하는 사례들이다. 이들 프로젝트는 전시, 워크숍, 출판, 축제, 공연 등의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이 가운데는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데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다원예술의 가능성을 향해 나름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장점 부분을 주로 언급하고자 한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시각예술과 관련된 제도들, 가령 미술문화공간이나 미술시장, 미술대학, 미술가단체 등이 안고 있는 한계상황에 비해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이 지금의 열악한 조건을 극복했을 때의 열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할 것이며, 그 열린 가능성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개척자들에 관한 나름의 제언도 덧붙일 것이다.

2.
전시 형태로 드러난 프로젝트들은 기존의 전시장을 비롯해서 생활공간으로 파고드는 데 이르기까지 그 진폭이 크다. 작품의 생산과 관람이라는 단선적인 프로세스뿐만 아니라 주민이나 관람자와의 상호소통을 전제로 한 기획들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민예총대구지회의 <한 사진기 수리공의 이야기>는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또는 미래의 명장에게 바치는 종합예술 전시회’라는 부제를 가진 전시 프로젝트이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한 사진기 수리공 이야기를 모티프로 전시를 비롯해 출판에까지 이르는 사업으로 1차창작과 동행하는 예술 관련 노동에 관해 천착하는 기획이다.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이 주최한 <SO.S 프로그램 2007>은 워크숍을 통해서 전시 콘텐츠를 창출하는 프로젝트이다. 소(小) 사루비아 공간을 꾸려서 디자인이나 패션 등 다른 장르의 콘텐츠를 다루는 장르간 협업을 시도해서 전시영역의 상투적인 소통 방식을 넘어서는 기획이 돋보였다.
아트파크의 <ART IN PHILOSOPHY "철학 & 예술">은 철학과 예술의 상호 소통을 모색하는 전시 프로그램이다. 예술 속 철학을 다루는 세미나를 열고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워크숍과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 철학만화 상영 등 다양한 시각예술 콘텐츠로 철학을 다루고 전시 프로그램으로 연결시킨 기획이다. 홍대앞을 중심으로 대안미술교육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갤러리킹의 <Com Com-‘디지털 확성기‘전>은 시각예술 관련 작가들과 대중들을 연결시키는 전시 프로그램이다. 작품 감상이라는 단일한 채널이 아니라 작업실, 전시장, 토론장 등 다양한 공간에서 회화, 사진, 설치, 일러스트, 영상, 애니메이션, 사운드아트 등 다양한 매체의 예술을 체험하는 생산적인 소통의 장이다.
노동문화네트워크의 <2007 노동만화전 '들꽃'>은 만화 전시 프로그램이다. 노동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활동한 창작 성과를 전시하는 것이 기본 포맷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병행하며, 일하는 사람들, 이웃의 이야기를 아마추어의 시각으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빡빡한 예술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신선한 프로젝트이다. 예술의 생산자와 향유자를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예술교육을 문화생산의 차원으로 한 단계 성숙시킨 기획이다. 대안공간미끌의 <ARTIST'S DIY MANUAL>은 전시 프로젝트이다. 스스로 만들기(DIY : Do It Yourself) 개념을 끌어들여서 미술가, 음악가, 영화감독, 디자이너, 문화경영인 등 다양한 분야의 참가자들이 모여서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매뉴얼을 작성한 기획이다. 자가제작의 트렌드를 새로운 예술창작의 계기로 삼았으며, 탈장르적인 작가선정과 소통방식이 돋보인 기획이다.
안양의 대안예술공간스톤앤워터의 <기억프로젝트_사람을 찾습니다>는 시각예술 기반의 프로젝트이자만 사실은 인류학이나 사회학적 이슈를 다루는 일종의 리서치 프로그램이다. 물론 그 결과를 전시 프로그램으로 연결시킨 것이 최종 결과물이다. ‘안양통학생일동 1941년 2월 11일’이라는 문구가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그 속의 28인을 찾아 릴레인 인터뷰를 가지고 그 자료들을 아카이빙해서 전시 콘텐츠로 엮는 기획이다. 역사 속에 묻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담긴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성찰적인 기획의도와 인터뷰 방식의 과정이 아름다운 기획이었다. 퍼슨웹의 <80바이트>는 전시와 출판을 아우르는 프로젝트이다. 디지털 환경의 글쓰기에 대해 묻는 작업이다. 사진가, 국문학자, 디자이너, 시인 등의 협업이 돋보이며, 미디어 아트를 시각적 측면에서만 사고하는 관행을 깨고 문자언어 소통의 장으로 보고 타이포그라피의 인문학적 역할을 성찰하는 프로젝트이다.
사례발표, 학술토론,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의 워크숍들도 좋은 성과들을 남겼다. 민예총충북지회의 <문화예술경영아카데미>는 강연 중심의 아카데미 프로그램인데, 문화지형연구, 문화예술정책을 비롯해 공동체예술, 공공미술 등과 관련한 사례발표의 장을 가짐으로써 작품 위주의 비평적 담론이 아니라 공공영역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시대와 동행하는 예술가의 역할모델을 탐구하는 장을 만드는 기획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역문화예술운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으로 꼽히는 충북 청주에서 열린 이 프로그램은 장르개념에 갇힌 예술을 사회적 활동의 역장으로 끌어내려는 기획의도를 담고 있다. 사비나미술관의 <아티스트 프로젝트2>는 미술관과 KIST가 협업을 통해서 새로운 미디어 아트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워크숍 프로젝트이다. ArtiST(Art in Science & Technology)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듯이 과학기술과 예술을 상호소통의 지평에서 만나게 하는 이 프로젝트는 2006년의 전시 프로젝트 성과를 바탕으로 두 영역의 전문가 집단이 모여 세미나를 가지고 학술연구 성과물을 내는 사업이다.
그음공간의 <그음공간>은 강연과 워크숍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젝트이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전신과학 등 예술 영역 바깥과의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쌍방향 소통을 시도하고 결과발표 전시회를 열고 결과물을 남기는 것이 이 기획의 목표이다. 양평을 비롯해서 경기도 인근의 지역에서 벌어지는 프로젝트로서 중심권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영역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19557의 <모바일 해킹 워크샵>은 해킹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컴퓨터 보안 전문성이라는 면에 초점을 맞췄다. 핸드폰을 가지고 상식과 일상을 넘는 쓰임을 만들고, 새로운 예술창작을 실험하는 일이 이 워크숍의 목표이다. 이들의 해킹 워크숍이 의미있는 것은 전시장 콘텐츠로 꽂히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미디어 아트의 권력의지가 팽배한 현실에 비해서 변화해가는 정보 생산과 소통 방식에 유쾌하게 적응하면서 창의력의 새로운 원천을 발견하려는 미디어아트 본연의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영의 <연희동 195 레지던시>는 임시 거주를 통해서 생활공간에 파고드는 프로젝트이다. 베를린, 뉴욕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내외 작가들이 연희동 195번지에 거주하면서 소통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이 ‘A hundred ideas and ten thousand combination’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건축적 개입과 벽화, 드로잉, 페인팅 등 다양한 방식의 협업과 워크숍을 펼쳤다.
출판을 최종 콘텐츠로 제시한 프로젝트들도 많았다. 우리만화연대의 <우리만화>지 발간사업은 시각예술과 연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성의 예술영역에 편입하지 못하고 다원예술 영역의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는 만화 영역의 기획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만화가들이 극만화, 만평, 컬럼, 인터뷰 등 다양한 만화 콘텐츠를 다루었다. KOPAS영상제작소의 <비쥬얼 한국의 퍼포먼스아트(40년 역사 속으로)>는 출판을 통해서 퍼포먼스 아트의 역사를 정리한 기획이다. 특히 이 기획은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를 총 정리한 전시 프로그램과 미묘한 대비를 나타냈는데, 퍼포먼스를 그룹 활동을 지속해온 현장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권위적인 시각예술의 권력에 의해 박제화하지 않은 야성이 살아있는 콘텐츠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업이었다. 국가단위의 상징권력으로 직조하는 미술의 시각이 아닌 퍼포먼스 아트 자체의 생동감 있는 시각을 경청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
넥스아트의 <커뮤니티페이퍼 "넥스아트_NEXTART" 발행> 프로젝트는 주로 홍대앞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원예술의 콘텐츠들을 모아서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는 출판 프로젝트이다. 이 출판물은 커뮤니티 페이퍼를 지향한다. 이른바 동네사람들이 나눠볼 수 있는 무가지를 발행하여 서울이라는 거대도시, 또는 한국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큰 목소리를 내는 매체가 아니라 홍대앞이라는 장소를 하나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탈장르, 복합장르 경향의 예술을 조망하는 따뜻한 매체이다. 대안공간루프의 <동양적 시각성 포럼집 출간> 프로젝트는 워크숍 성과를 집대성한 출판 사업이다. 심포지움을 열고 그 결과를 출판물로 묶어내는 이 기획은 동양미학의 가능성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각계 학자들의 견해를 듣고 토론한 자리이다. 20세기 버전의 동도서기를 넘어서 도와 기의 합일을 지향하는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동양화’라는 범주 개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이 프로젝트는 미술의 논리에 갇힌 영역다툼을 넘어서기 위한 진지한 성찰이 담긴 기획이다.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의 <뉴미디어 실크로드>는 뉴미디어 기반의 액티비스트 콘텐츠를 공모를 통해서 조명하는 출판 프로젝트이다. 서울 뉴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있는 기획자가 세계의 뉴장르 공공예술 관련 행사들을 참관하고 정보를 가공해서 연구자료를 구축하고 아카이브를 만드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의 <'아시아의 친구들" 아동 동화 기획출판>는 시각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적 소통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에 초점을 맞춰온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출판으로 그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직접 작가로 참가해서 각 나라별로 주요 이슈로 부각하는 사안들을 이야기 주제로 선정하고 그것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 동화책을 만들었다. 인터넷 방송국 활동의 방식을 출판과 교육으로 확장함으로써 오프라인 기반의 활동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축제의 방식은 다원예술 다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특정 공간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다문화 양상을 반영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이다. DMZ-KOREA의 <역의 정점>은 시각예술 기반의 축제 프로그램이다. 전시, 세미나, 퍼포먼스, 미디어/필름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 이 프로젝트는 분단국가의 상징인 DMZ를 모티프로 동아시아의 현실을 담아내는 기획이다. 시각예술이 빠져들기 쉬운 감상적 접근의 오류와는 정반대로 정치적 이슈를 다루며 전지구화 시대의 소통 구조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다루는 기획의 배치가 돋보였다. 아트포럼 일상의 예술의 <골목설치 해프닝 : 삼덕동 골목 퍼포먼스 -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는 대구 삼덕동을 중심으로 지속되어온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예술의 공공성 논의를 기반으로 다원예술의 영역을 넓히는 사업이다. 골목설치에 참여한 미술가들과 그곳에서 해프닝과 퍼포먼스를 벌인 배우들 그리고, 마을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통합 개념의 마을 축제이다.
일상예술창작센터(프리마켓사무국)의 <일상과 예술이 만나는 홍대앞 예술시장 프리마켓>은 조형예술 생산품의 일반적인 소통 경로를 거리의 일시적인 축제 방식으로 뒤바꾼 사업이다. 일상예술창작센터 광주지부의 <일상과 예술이 만나는 무등골 예술시장 프리마켓>은 지역의 도시에서 마켓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펼치는 문화장터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시민들이 일상용품들을 거래하는 장터의 개념을 끌어들여 예술작품을 거래하는 서울 홍대 앞의 작은 장터에서 출발해서 각 도시로 확장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지속가능한 생활예술운동으로 자리잡았다. 테러제이(TerrorJ)의 <제6회 제주 '머리에 꽃을' 거리 예술제>는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비가시적인 행위의 형태로 과정으로서의 예술, 또는 참여를 통해 완성되는 예술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기획이다. 텐트를 치고 특정 장소를 방문해서 일정기간 기거하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비롯해서 공연과 설치, 전시, 영상 등 다양한 예술 콘텐츠들을 가지고 제주도 곳곳을 방문하는 프로젝트의 배치가 돋보인다.
공연장이나 전시장에서 열린 공연들도 다원예술의 맥락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 Sun Day Project Group의 <Sun Day Project in Berlin - 안방>은 시각예술 기반의 공연 프로그램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이 행사는 시각예술과 무용, 음악, 디자인 등의 통합장르로 구성된 공연으로서 안방이라는 한국적 맥락의 공간 개념을 다룬다. 세계의 예술이 집결하고 있는 소통의 창구, 베를린에서 한국의 독창적인 예술적 에너지를 소개한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다. 신기운의 <"335_Orch"_갤러리에서 만나는 크로스오버 현대 예술의 만남>은 음악 콘텐츠를 갤러리 프로그램으로 연결한 공연 사업이다. 영상 작가 신기운이 갤러리 공간을 이용해서 여러 음악가들과 협업한 프로젝트이다. 영상이 음악과 만나는 일이 주로 음악의 서사를 보조적으로 후행하거나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주지위한 도구로 치부되는 반면에 이 프로젝트는 영상 작가를 중심으로 공연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홍성민의 <Palimpsest;Operalara (오페라의 요령)>은 연국과 춤, 퍼포먼스, 뮤지컬, 영상 등 거의 모든 예술영역을 총체적으로 결합시킨 다원예술 프로젝트이다. 모든 장르와 요소들을 해체해서 새로운 장에서 융합하도록 한다는 목표에 걸맞게 공연 자체의 스케일이나 상투성을 벗어난 서사의 구성으로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시나리오, 안무, 무대, 연출 등 모든 영역을 총괄한 예술감독의 창의력이 돋보였다. 특히 공연을 앞두고 벌어진 사회적 사건을 다루기도 함으로서 동시대의 서사를 순발력 있게 도입하는가 하면, 그와 정반대로 사건과 사건의 맥락을 철저하게 분절적인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일관된 서사체계에 입각한 플롯의 구성을 파괴함으로써 서사가 주도하는 극적 구성의 한계를 벗어난 점은 시각예술을 비롯해 문학과 음악, 무용 등 다장르를 섭렵하면서도 어느 한 곳에 무게 중심을 두지 않으려는 태로도 읽혔다.

3.
문화권력의 인정 시스템과 미술시장, 미술관련 교육기관과 전문가 그룹의 조합주의 등은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이 넘어야할 거대한 과제이다. 시각예술의 완고한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시도들이 파편화한 실험으로 그칠 공산도 없지 않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결함 탓이겠지만, 문화예술위원회 차원에서 고려해야할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언급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기존의 시각예술이 그 너머의 세계를 열고자하는 시도들을 적극 권장하는 조건에 주목해야 한다. 그 조건이란 정보 생산과 소통의 방식이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뉴미디어 분야의 이론적 배경과 기술적 재생산 구조가 결여한 한국의 예술계에서 체계적인 교육이 절실하다. 기성의 작가들은 물론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교육과 발굴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 큐레이터, 미디어 작가, 과학자, 음악가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만나는 장을 만들고 전시 및 기록물 제작에 이르기까지 후속작업을 벌여서 학제간 교류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도 커다란 과제이다.
다원예술이라는 지원정책 개념과 시각예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지난 몇 년간 이 문제를 두고 다원예술위원회 차원에서도 많은 논의를 거쳤지만, 지원정책의 개념과 예술학적 분류 개념 사이의 간극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론적 설정을 앞세운 후에 실제의 사례들을 분석했을 때의 오류와 마찬가지로 실재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 또한 위험천만하다. 아직 이론과 실재를 상호성의 관점아래서 가늠할 만큼의 풍부한 사례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린 자세의 논의를 위해서 이 글이 주목하고 있는 문제, 즉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 시각예술의 장이 그 바깥의 장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해명하는 것이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분야에서 지원예산을 받아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느냐의 구분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시각예술은 미술이라는 용어로 굳어진 예술영역이다. 역사상 시각 정보의 생산과 향유를 통해서 소통기제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구상은 문화권력의 중심화와 시장권력의 비대화로 인해서 사실상 박제화 되어 버렸다. 그것은 근대적 의미의 미술제도가 꿈꿨던 독자적인 지식 영역으로의 자리매김이라는 이념을 근본적으로 폄훼했다. 미술제도는 이제 더 이상 동시대의 현실과 시대정신을 갈파하는 지식생산의 영역으로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전근대적인 주문생산의 방식이 현대미술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다는 비평계의 자성이 나온 지 오래다. 이전처럼 직접적인 주문생산이 아니더라도 미술제도의 가시권의 진입했거나 그러기를 원하는 예술가들은 문화권력과 시장권력의 호명에 복종하는 문화재생산자나 상품생산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원예술의 논점에서 기성의 제도화한 시각예술/미술의 한계를 넘어서서 변별점을 형성할 가장 큰 이슈가 여기에 있다. 다시 시각예술이 어떻게 자신의 영역을 변별하는지에 주목해보자. 시각예술은 지난 1세기동안 고유의 역장을 확고하게 안착시켰다. 그 정점에 미술관과 미술시장이 있다. 그 배후에 미술교육과 미술가조합이 있다. 시각예술은 미술관의 보수적인 권위와 미술시장의 화폐권력, 그리고 미술교육 기관의 재생산 구도, 미술가단체의 기득권 등이 창출해낸 이 시대의 합의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지탱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각예술 기반의 다원예술이 새로운 영역을 형성할 당위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지원정책의 개념이든 새로운 미학/예술학적 개념이든 간에 다원예술은 기성의 고정된 가치 주변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진단과 해답의 제시는 위의 언급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졌다. 첫째, 미술관의 인정 시스템을 뒤흔드는 예술생산과 향유 체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미 대안공간 실험들을 통해서 상당 부분 가능성을 보인 듯한 이 문제는 그러나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안공간의 제도화 과정에서 이미 그 역할을 다했다는 자성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동네의 시각에서 보자면 아직도 대안공간은 걸어온 길보다 가야할 길어 더 많이 남았다. 그러나 다원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판이하게 다르다. 집이 부족하다. 아니 거의 없다. 기존 제도로부터의 이탈을 꿈꾸는 예술가들이 활동하면서 시민들과 접점을 형성할 다원예술의 집말이다. 다원예술매개공간 활동이 그 해소 방법을 일부 제시했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 지속적인 프로그래밍과 네트워킹이 있어야 한다. 각 도시별로 자생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나 대안적인 공간 운동에 주목하고 주체들을 네트워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도 매우 시급하다. 그 네트워크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을 마련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공간의 교류와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프로그램의 네트워크를 이루기까지 가야할 길이 멀다.
미술시장의 호명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교환 체계를 만드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 예술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용인하고 사회적 교환 체계로 편입할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기존의 예술시장은 철저하게 상품교환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거의 대다수의 예술작품들은 생산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상업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시장과의 접촉이 다소간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시각예술 영역에서도 시장의 간접적인 호명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이라는 상품을 낱개의 콘텐츠로 파편화시키는 교환 시스템을 대체할 다른 방식을 찾아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미술 방식처럼 공공의 기금을 쓰는 일이니 공공의 요청을 수용해서 주문생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가시적인 비인격적인 시장 시스템을 대체할 가시적이며 인격적인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특히 미술제도 바깥에 위치한 다원예술가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 예술노동을 소외의 국면에서 구출할 대안으로 거론되는 공공예술, 사회적 기업, 예술교육 등 다양한 모색이 필요하다.
대학의 일방적인 재생산 구조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대안적인 교육 시스템은 다원예술의 가치를 확산하고 안착화 할 거대한 밑그림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원의 특별한 정책이 있어야 한다. 물론 오늘날의 대학들 가운데 일부가 탈 전공으로 입시를 치르고 열린 교육을 지향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어디까지나 입시 얘기다. 좁은 시야의 장르 예술가들을 위한 전문가 재교육 시스템이 절실하다. 시각예술 관련 예술가들이 변화하는 정보양식에 창의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축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는 어쩌면 교육기관이 아닌 작가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훨씬 강력하고 신속한 해답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인 교육 영역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특정 매체만을 위해 태어난 듯 착각하는 예술가를 양산한다면 다원예술은 제 자리를 잡기 힘들 것이다.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윤리의식과 전문성을 상실한 조합주의의 병폐에 물들지 않는 새로운 네트워크의 구축이 필요하다. 생활협동조합이 생활의 필요에 따라 교환방식을 재구조화했듯이 예술 영역에서도 예술 생산과 매개와 향유가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네트워크 방식이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특히 시각예술 기반의 예술가들은 공연이나 음악 쪽 작가들에 비해서 등단의 방식이 매우 개방적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데, 이러한 자율적이면서도 혼란한 방식이 공존하는 이러한 분위기를 넘어서는 것이 제일의 관건이다. 이미 자생적인 소모임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 생산자와 향유자 사이의 거리 좁히기가 좀더 체계적으로 자리잡아야한다. 독일과 같이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예술가를 후원하고 연구하는 예술조합 방식도 있다. 여기에는 예술가의 윤리의식과 전문성을 꼼꼼하게 따지는 자구노력과 더불어 시민사회화 동행하려는 낮은 마음이 필수적이다. 다원예술가협회와 같은 네트워크가 탄생할 가능성은 매우 적을뿐더러 현재의 통념상 사회에 뿌리내릴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그러나 다원예술의 맥락으로 만나는 예술가와 시민은 예술의 이름으로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전문가 집단의 정보독점 시대가 지나고 생산과 매개와 향유가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문화민주주의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 2007년 문예연감 기고문

2008/11/27 18:30 2008/11/27 18:30

GIM's Public Art Story 27 : Micha Ulman, Compass, Busan APEC Naru park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11/25 10:34


GIM's Public Art Story 27 : Micha Ulman, Compass, Busan APEC Naru park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낮은 공공미술의 대가 미하 울만의 작품. 이스라엘 작가 미하 울만이 2006년 부산비엔날레에 참가하여 APEC 나루공원에 설치한 작품. 나침반. 한국의 남쪽 도시 부산 역시 분단국가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일깨우는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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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5 10:34 2008/11/25 10:34

주문생산을 넘어서는 부산의 공공미술

critic & column | 2008/11/25 02:31


주문생산을 넘어서는 부산의 공공미술

거대도시 부산의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미술이 번지고 있다. 부산이라는 도시를 관념적인 도시일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특별한 마을 또는 공동체로 인식하고 그 장으로 뛰어드는 미술. 도시와 동행하는 미술. 공공이다. 그것은 도시 공동체라는 삶의 단위와 직접 만나는 예술적 실천이다. 부산의 미술가들이 참여와 개입의 원칙 아래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 온 것은 지난 수년간 진화한 한국의 공공미술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 부산대역 일대의 그래피티 작업들은 이미 한국 사회 전체를 놓고 봐도 그만한 사례를 보기 드물 만큼 풍부한 예술적 에너지로 넘쳐나고 있다. 부산의 젊은 그래피티 작가들을 비롯해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와서 자생적이고 창의적인 젊은이문화를 만들고 있다.

<아트 인 시티 2006> 프로젝트는 부산에 본격적인 공공미술의 첫 삽을 뜬 사업이다. 부산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진행된 수정동 프로젝트와 물만골 생태마을에서 벌어진 프로젝트는 예술가와 주민의 소통이 어떤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겠는지에 대해 많은 경험을 축적하게 했다. 공공미술은 공동체와 동행하기 위해 때로는 갈등과 소외의 상황까지도 감당해야했다. 이어서 벌어진 2007년의 안창마을 프로젝트는 지속가능한 공공미술의 좋은 사례를 남겼다. 올해도 안창마을에서는 젊은 작가들의 행보가 분주하다. 좋은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가장 큰 원동력으로 삼는다. ‘공공기금 없이도 계속 하는 프로젝트의 사례를 보여주고 싶다’는 서상호 예술감독의 말은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이 있다.

안창마을로 뛰어든 예술가들이 마을을 대상화 시키지 않고 그 속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예술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절묘한 균형감각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앞으로도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율성의 영역에 뿌리를 둔 채 예술활동을 통해서 공공영역을 형성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예술가에게 주어진 자율성이라는 덕목이야말로 공공미술의 이름으로 예술가에게 주문생산을 요청하는 시대에 예술적 실천의 근본적인 힘을 신뢰하게 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예술적 자율성은 예술가 주체의 창의력과 진정성을 발휘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공공미술의 공공성이 제대로 살아나려면 작가의 일방주의가 아닌 작가와 시민의 상호주의 관점과 협업이 이뤄져야한다. 공공미술은 상호소통의 관점에 뿌리를 둔다.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시민에게 예술작품 감상을 비롯해서 향유 채널을 다양화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은 공공미술에서도 통용가능하다. 그러나 알맹이는 그 너머에 있다.  예술가와 시민의 역할은 창조자와 관객의 지위를 넘어서 상호 소통과 협업의 동반자로 진화하고 있다. 예술가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사람이자, 그 공동체의 상황을 분석하고 보고하는 구성원이며 조직가이자 이슈 파이터로서 새로운 합의를 창출하는 액티비스트이다.

공공미술은 장소의 문제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장소 특정성(site specific)이라는 말이 있는데, 특정 장소(site)의 특성을 잘 반영한 예술작품의 생산을 이르는 말이다. 그 공간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상황(situation)을 끌어들이는 데에까지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적 공론장/공공영역(public sphere)을 확인할 수 있다. 공공영역은 공공장소의 문제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장소와 상황의 논리를 결합한 말로 현장성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소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는 현장성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예술적 공론장으로 작동하는 공공미술의 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부산대신문 기고문

2008/11/25 02:31 2008/11/25 02:31

공공미술의 구속 또는 구원, 장소 특정성

critic & column | 2008/11/22 09:54


공공미술의 구속 또는 구원, 장소 특정성

필자는 올해 봄부터 인터넷 사이트 스토리 큐빅(www.storycubic.co.kr)에 공공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다. 얼마 전 소개한 작품은 부산 APEC 나루공원에 설치된 필리핀 작가 아그네스 아렐라노(Agnes Arellano)의 <달의 여신 할리아>이다. 이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댓글이 오가던 중 깜짝 놀란 만한 글귀가 올라왔다. 포천화가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이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전 이 작품이 불편합니다. 작가의 의도는 알듯하지만, 작품 뒤에 보이는 건물과 인공으로 조성된 공원이 부담 되네요. 전 저 조각상에 이불을 덮어 주고 싶어요.” 다음과 같이 답글을 달았다. “님께서 지적해주신 문제가 바로 ‘박제화한 조각공원의 현실’입니다. 저 조각상이 저기에 있어야할 필연성이 부족합니다. 장소성에 관한 헤아림이 부족한 것이 문제죠. 2006년에 이어 2008년에도 저 공원에 20점 가까운 명품 조각들이 들어섰지만, 한 점 한 점이 맥락 없이 떨어져 있어 아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조각에 이불 덮어주고 싶다’는 말씀에 100% 동감합니다.”

이 짧은 대화 속에는 공공미술 작품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가 명쾌하게 드러난다. 전시장과 같은 전문화한 미술문화 공간에서의 작품 설치는 작품을 둘러싼 주변 공간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작가의 선택 폭이 넓다. 그러나 그 바깥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미술작품을 위해서 주변 공간을 뒤바꾸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이 주변 환경에 맞춰서 자신의 모양과 크기, 빛깔 등을 결정해하는데, 공공미술의 이러한 낮은 처신은 ‘장소 특정성(site specific)’이라는 개념이 바닥에 깔린 개념이다. 특정 공간의 장소성은 작품 주변의 물리적인 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작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면면에 대한 섬세하고 신중한 헤아림도 매우 중요하다. 사용자들이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그들은 작품을 어떤 각도에서 감상하며 그 동선은 어떻게 흐르는지, 그들의 몸이 작품과 만나는 방식을 어떤 것인지 등에 관해서도 배려와 성찰이 있어야 한다.

건축물미술장식품들의 경우는 장소 특정성을 고려하기에 매우 난처한 처지에 놓인다. 건축설계 도면을 들고 작품의 위치를 선정하면서 동시에 작품의 주제와 형태, 크기, 재료 등을 정하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길 깔기와 나무 심기 등의 조경 작업들도 작품과는 무관하게 일방통행하기 일쑤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높이려고 해도 준공검사 맞추기에 급급한 현재의 제도로는 건축물과 그 주변을 이어주는 좋은 공공미술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건축주의 마음이 예술적 소통을 통해서 건축물과 그 주변의 장소성과 동행하는 차원의 수준 높은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데 있느냐 하는 점이 커다란 변수인데, 불행히도 그런 경우는 드문 게 사실이다.

작품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주의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와 같이 예술가와 시민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발생했을 때, 어느 것이 공공의 이해에 부합하느냐 하는 공공미술의 잣대가 앞설 수밖에 없다. 예술가의 자율성은 시민사회의 공공성과 대결 국면을 맞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20세기뿐만 아니라 역사 속의 진리이다. 어쩌면 예술의 자율성을 운운했던 20세기가 누렸던 예술가의 지위는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시기로 꼽힐지도 모르겠다. 모더니스트들이 얘기했던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이념이 이미 상당부분 자본권력에 의해 잠심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모더니즘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 공공미술의 영역에서는 어떻겠는가.

공공성의 견지에서 예술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장소성의 문제는 대체로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역으로 장소성을 절묘하게 살림으로써 날개를 다는 경우도 많다. 옛 동베를린 지역에 있는 몇몇 공공미술 작품들의 경우에 장소 특정적 예술의 사례로 언급할 만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훔볼트 대학 앞에서 유태인 학자들의 책을 불태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만든 공공미술 작품은 낮은 공공미술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유태인인 미하 울만(Micha Ullman)은 야만적인 문명학살을 지하 서고로 표현했다. 광장 한 가운데 지하를 파고 그 속에 하얀 빈 책꽂이를 설치한 것이다. 밤이면 그 속에서 나오는 빛으로 마치 지난날 책을 불사를 때와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청계천 시발점에 세워진 올덴버그의 <스프링>은 장소 특정성을 철저하게 배반했다. 생태하천을 표방한 도심 속 하천 공원의 시점부에 세워지는 것이기에 많은 서울의 중요한 랜드마크 기능을 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의 특정성과 무관하게 국외유명작가의 명품주의로 흘러버린 이 작품은 두고두고 실패사례로 언급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특정 공간으로부터의 해방으로부터 출발했다. 현대미술 이전의 미술이 특정 공간에 묶인 것이었다. 모더니즘 이전 시대의 미술작품은 그 처소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근본이 달라졌다. 대부분의 역사적인 명작들은 최초에는 특정한 장소에서 나름의 쓰임새를 가지고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대다수의 조각들은 건축물의 일부였다. 회화작품들도 제작단계부터 어느 공간에 배치될 작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의 주제와 형태와 색채, 재료, 크기 등을 결정한다. 미술이 독립적인 영역과 체계를 갖추면서 그 이전에 미술의 전제 조건이었던 장소의 맥락은 대부분 그 의미를 상실했다. 특히 20세기 들어서 본격화한 모더니즘 예술은 회화 그 자체, 조각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변모했다. 장소로부터의 해방은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이념 아래서 매우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장소 개념과 상관없이 미술작품을 향유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미적 가치 운운하는 것도 이러한 특정 공간으로부터의 해방 덕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술작품이 공간이나 장소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미술작품을 하나의 예술적인 물질로 이해하는 한 우리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질로서 예술작품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미술작품의 소통을 매개공간은 전시장이라는 공간이다. 전시장은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약속된 공간이다. 미술관이 하나의 제도 공간으로 자리를 잡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체계적인 제도를 만들어 온 것이다. 미술작품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전시장 공간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역사적인 진보이다. 전문적이고 전문적인 미술작품의 수집과 보존, 연구와 전시,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있음으로 인해서 미술계는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바깥에서 벌어지는 예술적 소통이 전시장 공간과 동일한 시각의 일방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데 있다.

서울 도심의 공공장소에 있는 미술작품들은 어떤 방식으로 장소와 만나는가?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이 있다. 돌조각의 형태미나 비례, 세부 표현 등을 따지고 들어 미학적인 평가 판단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조형적인 비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작품의 장소 특정성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해태상> 인근에는 가장 기념비적이고 상징적인 조형물인 <이순신장군동상>이 있다. 물론 이 작품은 군인출신의 정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문화정치의 결과이다. 이 작품 자체로만 보면 탄탄한 조형성과 상징성을 가진 명작이다. 그러나 세종로라는 장소성과 이순신이라는 전쟁영웅의 동상이 공존하는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은 다른 문맥에서 읽어볼 대목이다. 장소 특정성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예술을 진리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공미술은 이렇게 장소성을 오용하고 남용한곤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이 주문생산형 공공미술의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독일의 옛 동베를린 지역에 있는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의 <모자상>은 작품을 둘러싼 공간의 조건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작품 감상을 좌지우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만큼 전쟁의 상처를 깊이 담을 수 있는 것이 그 무엇이 있겠는가.” 전쟁의 상처를 잊지 않기 위해 만든 이 작품에 대해 초라해 보인다거나 비극의 처절함이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논평들에 대해 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텅 빈 공간 속 한 가운데에 아들을 안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그것도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다. 건물 천정이 뻥 뚫린 상태여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다. 아무 장치도 없이 공간 한가운데 바닥에 놓인 브론즈 조상이 있고 그 위에 빛을 떨어뜨리는 천정의 구멍. 그것은 빛을 끌어들이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눈과 비를 끌어들이는 장치이다. 그 천정의 구멍 하나로 인해 이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도 많이 변했다. 도시의 곳곳에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건축물미술장식품법이라는 법제도 때문에 억지로 세운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획일적인 문화정치에 따라 동일한 작품이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으로 배치되는 일이 반복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60,70년대식의 직접적인 이데올로기 주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공간 가운데 우뚝 서서 주변을 지배하며 웅변하려드는 남근주의는 여전하다. 역사성이나 장소의 특수성과는 상관없이 알 수 없는 작가주의를 앞세워서 공공공간의 미술작품으로는 함량미달이라는 지적을 받는 경우도 많다. 물론 좋은 사례도 있다. 새로 지은 서울역사 앞에 있는 박기원 작가의 작품 <자-넓이>이다. 형태는 매우 심플하다. 철판과 돌로 만든 직각 자 형태의 기하학적인 구조물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외관상 얼마나 미적인 형태와 색채와 재질감을 가지고 감상자에게 미적인 감동을 전달하는가 하는 점이 감상 포인트의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작품은 공공장소에 놓인 작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 의미심장한 논점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기능을 겸하고 있는 스트리트 퍼니처다. 그런데 그 공간은 대체로 노숙자들의 전용공간이다. 나는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저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노숙자들이 저 작품을 잘 사용해 주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왜 저들만이 저 작품을 독점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동시에 가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바꿨다. 서울역 안의 벤치들이 노숙자들이 드러눕지 못하도록 자리 사이사이에 팔걸이를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인 행태를 목격한 이후의 일이다. 그 작품이라도 있어서 역 앞에 드러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소수자에게 금지가 아닌 허용을 허락하는 공간을 만드는 예술작품이다. 이렇듯 공공미술 작품은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의미 해석의 폭이 달라진다.

인간의 삶이 집결해 있는 공동체와 장소성의 만남은 한층 더 깊게 공공미술이 영역을 확장한다. 경기도 평택의 사라진 마을 대추리 현장예술 작품들은 공동체와 예술가의 만남을 새로운 공공미술의 가능성으로 이끈 사례이다. 지난 2004년부터 3년간 이 마을을 찾은 수많은 예술가들은 마을의 장소성과 동행했다. 이들의 작업은 장소 특정성을 넘어 의제 특정성(issue specific)을 획득했다. 장소의 특수성을 반영한 작업이라는 공간의 조건뿐만 아니라 그 장소의 상황까지도 끌어들여 특정한 이슈를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 의제 특정적인 예술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마을 곳곳에 고운 흙더미를 쌓아 둔 채 해를 넘기고 있던 대추리 마을을 찾은 이종구는 그 흙더미 뒤편 벽에 일하는 농부를 그려넣어 그 공간의 장소성을 절묘하게 살렸으며 동시에 그 마을의 이슈를 감동적인 예술 작품으로 남겼다. 이윤엽의 마을 박물관은 동네 곳곳의 버려진 집에서 수집한 잡동사니들과 주민들의 사진이미지들을 모아서 꾸민 오브제 설치 작업이다. 최병수는 부서진 대추분교의 잔해더미 위에 일상의 사물들을 매달아 솟대 작업을 했다. 대추리 예술은 장소 특정성을 의제 특정성으로 진일보시킨 커뮤니티 아트이자 액티비스트 아트의 좋은 사례들이다.

도시 속에 자리 잡는 공공미술 작품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수량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건축물미술장식품들의 경우 장소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아직도 생산자 중심의 사고에 사로잡혀서 작가의 스타일 그 자체를 특정 장소에 개입시키려는 일방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와 예술 작품은 서로를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 장소성과 예술성이 동행이라는 아름다운 걸음걸이에 의해서 상호보완적인 개념으로 작동할 때 진정한 공공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 개념과 공존하는 것이 공간 개념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상호 의존적이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축선 위에 존재한다. 동시에 예술은 그 시간과 공간의 축선을 벗어나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추구한다. 이 명제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장소 특정성과 예술 생산 또는 향유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소 특정성은 예술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구원하는 개념이다.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의 개념 속에 뿌리 내린 판타지이자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퍼블릭아트 2008년 12월호 기고문

2008/11/22 09:54 2008/11/22 09:54

액티비스트 리포트, 대안공간 반디

project | 2008/11/20 03:12


액티비스트 리포트

1. 개요

■ 전시명 : 액티비스트 리포트
■ 장소 : 대안공간 반디
■ 기간 : 2008.11.14(금)-11.27(목)
■ 주최 : 액티비스트 포럼 추진위원회
■ 참여예술가
  구헌주, 김지문, 박영균, 배인석, 이광기, 서상호, 송성진, 이태호,
  오아시스 프로젝트, 대인시장 프로젝트
■ 부대행사 : 액티비스트 포럼 081114(개막일 7시)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 기획의도

예술의 공공성 강화 논의가 한창이다. 20세기 예술의 자율성에 기반한 모더니즘 국면을 21세기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성 공존 국면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이 프로젝트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을 창조적으로 통합하고자하는 예술행동주의 맥락을 진작”하기 위해 열리는 예술인들의 교류의 장이이며, 행동주의예술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의 맥락을 확장하는 프로젝트이다.

'액티비스트 포럼'의 일차적 목표는 예술행동을 통해서 실재 영역이 문화적 다양성을 견지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고, 이로부터 더욱 깊숙이 들어가 궁극적으로는 도시의 문화적 개방을 이끌 수 있는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로써 다양한 가치를 지닌 예술가들의 네트워킹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액티비스트 포럼'은 각 도시를 상징할 수 있는 혹은 각 도시 시민의 일상이 펼쳐지고 있는 장소나 가치들을 작업의 내용과 결합시키고자 한다. 또한 다양한 결과물과 담론을 구성하기 위해서 외부자들, 가령 타 영역이나 타 지역의 예술가와 이론가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도시와 도시 바깥을 네트워킹’할 수 있는 문화적 교류를 통하여 각 도시의 문화적 지형과 정체성을 재인식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지역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의 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그 공란을 메울 수 있는 다양한 가치를 품은 작품들을 보일 것이다.

이 전시 <액티비스트 리포트>는 지난 봄부터 ‘액티비스트 포럼’을 꾸리면서 행동주의 예술에 관해 다양한 패널들과 토론을 벌여온 부산지역의 작가들과 서울과 부천, 광주의 액티비스트들이 참여해서 꾸리는 제안과 자료 형식의 전시이다. 전시 개막일에 열리는 '집담회'는 그동안의 토론 성과를 총괄하면서 예술가들이 대면하고 있는 액티비즘에 관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차이를 확인하고 새로운 합의를 모색해보는 자리이다.

3. 출품작 소개

■ 구헌주 : 지하철에서의 스티커 작업, 캠페인 성향의 참여 작업, 집회장 그래피티 등의 사진들을 통해서 평소에 도시공간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구헌주 작가의 활동 내용을 보여준다. 펀치 게임기를 이용한 설치작업도 있는데, 폭력적인 힘을 측정하는 게임기를 이용해 우리 사회의 문제적 이슈를 지적하는 참여형 설치 작업이다.

■ 김지문 : 성매매 특별법 4년을 맞아 인간을 소비하고, 법망을 피해다니며, 지하에서 암약하는 성매매와 지하철의 공통점을 모티프로 하는 노선도 작업. 별자리 처녀자리 모양의 부산지하철 노선도를 만들어서 1.2미터 간판을 지하철에 설치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사진으로 관찰하는 게릴라성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전시장에서 보여준다.

■ 박영균 :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경기도 평택의 대추리 마을에서 벌어진 현장예술활동을 기록한 영상 다큐멘터리 <들사람들>을 출품한다. 미군기지확장이전 때문에 마을을 비워야하는 운명에 처한 마을로 찾아들 예술가들과의 인터뷰를 비롯해 감동적인 영상 기록을 촬영하고 편집한 박영균의 진지한 성찰이 돋보인다.

■ 배인석 : 올해에 촛불시위 현장에서 주워 모은 유인물, 천조각 등과 마티스의 <춤> 이미지를 꼴라쥬 해서 합성한 작품 석 점을 출품한다. 거리에 버려진 사물들을 가지고 새로운 예술작품을 만듦으로써 사회적 소통의 현장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작업이다.

■ 이광기 : 작가의 작업실 인근에 있는 국제시장의 복잡한 길을 재구조화하는 <국제시장 넘버링 프로젝트>를 벌인다. 작은 사이즈의 영상을 통해서 이 프로젝트 전반을 보여주며, 석 점의 프린트물은 국제시장의 옛날 주소 체계와 새 주소 체계, 그리고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넘버링 체계 세 가지이다.

■ 서상호 : 2007년에 이어 올해에도 안창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그는 1인 퍼포먼스 ‘안창마을에서 온 아이’(작가 이정음)를 진행하며, 올해 새롭게 벌이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영상과 사진을 제시한다.

■ 송성진 : 도시공간에 구조화한 욕망 체계를 비트는 디지털 합성사진 작업 <City of Sign>을 선보인다. 도시공간 속의 간판 원래의 이미지들을 삭제하고,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한 작업니다. 이밖에도 자신의 사진 작업들을 모아놓은 파일을 함께 전시한다.

■ 이태호 : 지난 2005년에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대통령상 부활에 반대하는 전시에 출품한 동영상을 출품한다.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개사하여 작가 자신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다. 제목은 <그때 그 대통령상>. 예술가들이 정치권력에 의존해서 또다른 권력을 만들어 왔던 역사적 상황과 당대 현실을 비판하는 ‘노가바’가 압권이다.

■ 대인시장 프로젝트 : 2008년 광주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출발한 대인시장 프로젝트는 쇄락해가는 재래시장에 예술가들이 들어가서 다양한 장소특정적 작업을 펼침으로써 그곳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9년에도 지속될 예정인 이 프로젝트의 면면을 보여주는 아카이브를 제시한다.

■ 오아시스 프로젝트 : 서울 목동에 있는 문화예술인회관 건물을 점거해서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점거예술 프로젝트를 실행했으며 이후 지속적인 예술인회관 관련 문제 제기로 사회적 쟁점을 건드렸던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활동 상황을 보여주는 다양한 기록물들을 선보인다.


4. 부대행사 : 액티비스트 포럼 081114

■ 행사명 : 액티비스트 포럼 0811
■ 장소 : 대안공간 반디
■ 일시 : 2008.11.14(금) 오후7시-8시30분
■ 참여자 : 참여작가 및 관객

2008/11/20 03:12 2008/11/20 03:12

GIM's Public Art Story 26 : Agnes Arelano, Halia, Busan APEC Naru park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11/19 16:36


GIM's Public Art Story 26 : Agnes Arelano, Halia, Busan APEC Naru park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달의 여신 할리아. 필리핀의 작가 아그네스 아렐라노의 작품. 2006 부산비엔날레 조각프로젝트에 출품한 것으로 부산 수영강 하구의 APEC 나루공원에 있음. 만삭의 여성이 대지에 누워있는 낮은 공공미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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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9 16:36 2008/11/19 16:36

고독하고 육중한 박홍순의 거대서사 : 박홍순

critic & column | 2008/11/12 03:36


고독하고 육중한 박홍순의 거대서사 : 박홍순

예술가 개인의 소소한 사변을 담아내는 일이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소함이 사소한 것의 재발견과는 달리 지루한 혼잣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변질했다는 것이 최근 비평계의 진단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현대미술계를 지배해온 일상담론의 미망은 미시서사의 섬세함에 도달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일상담론을 가장한 의사-일상성이 예술가의 자기체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결여한 채 상투적인 신변기록에도 못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담론이 지배하는 현대미술의 가벼움에 비해서 거대서사의 장중한 무게는 발걸음이 더디지만 세월을 더해가면서 가속도를 붙인다. 박홍순이 그런 경우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굵은 행보를 이어왔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 한 걸음씩 더 크게 성큼성큼 내딛으며 거대서사의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생태자연의 거대한 풍경 속에서 인공의 흔적을 담아내는 박홍순의 작업은 비판적 지식이다. 그것은 한순간 짧게 쓰일 보도사진이 아니라 수십년을 두고 쌓여서 우리 시대의 이 땅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중한 기록이다. 그의 거대서사는 묵직한 중량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예술이라는 비판적 지식 생산의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한다. 그의 성장기와 청년기는 한국사회의 그 어느 시대 못지않게 급격한 사회변동의 에너지로 가득 찬 시기였다. 하여 그의 감성과 의식 속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명징한 관점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박홍순 자신의 말을 빌자면, 그가 백두대간에서 한강을 거쳐 서해를 찍고 다닌 것은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이 땅은 한국사회의 거대한 행위자 주체들이 침입해서 조작과 훼손을 일삼고 있는 그 땅이다. 그 땅의 면면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일이 그가 선택한 이 시대에 우리사회를 만나는 방법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서정성과 서사성을 동시에 꿰뚫는 작업으로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을 회복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생태자연의 거대한 풍경 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간의 흔적들을 들춰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문제의 지점을 찾아가 순발력 있게 고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관념적인 자연을 부르짖거나 전략적인 계몽의 서사를 남발하지 않는다. 자신의 보폭을 벗어나는 큰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매우 냉정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현실을 재발견하게 한다. 그의 발걸음은 고독하다. 카메라를 든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곳, 화려한 예술상품 생산에 주력하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지 않는 곳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백두대간을 담아서 사진집을 낸 것이 1999년의 일이다. 이어서 몇 해 전에는 한강을 주제로 한 연작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마흔을 넘어서부터 그는 서해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다양한 표정의 땅과 물을 만나게 해주었다. 길 떠난 사람이 부딪히는 새로운 장면과 상황들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그 자체로 기록이며 새로운 발견이자 세계에 대한 성찰이다. 애초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다가도 예측을 빗겨나는 또 다른 결과를 만나고 우연성에 이끌려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탐험하기도 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이다. 박홍순은 생태자연과의 만남을 위해 늘 길을 떠나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도 인간 또는 사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냈다.

뒤로 물러나 멀찍이서 느긋하게 바라보는 박홍순의 시선은 백두대간 곳곳을 파헤친 문명의 개발 논리를 낱낱이 드러낸다. 측광을 받아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를 보이는 채석장의 부서진 바위 조각들, 마치 거대한 대지미술처럼 속살을 드러낸 도로공사의 절곡면, 아스라이 뒤로 물러서는 산맥의 흐름을 도도하게 바라보며 산하를 지배하는 산꼭대기 관측소와 철조망과 헬기 착륙장. 박홍순은 백두대간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이 모든 장면들은 모종의 상황을 포착하고 있다. 야만적인 상황을 매우 극적이면서도 담담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박홍순의 렌즈는 매우 안정적인 어법을 구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불안한 서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강을 거쳐 서해안으로 나아간 박홍순의 시선은 여전히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불안하다. 갯벌을 붉게 물들이는 칠면초 밭을 뿌연 단색으로 눌러주는가 하면, 갯벌 위를 지나간 자동차 바퀴자국의 거대한 드로잉을 회화적 분위기로 재현하기도 한다. 갯벌 위에서 스러져가는 목조 설치 작품들의 비장한 상황들이 있는가 하면, 그림 같은 갈대의 서정이 흐르기도 한다. 연한 톤으로 지긋이 눌러준 모래사장 위로 바람과 사람이 공동 제작한 흐릿한 선들이 아스라이 멀어져간다. 갯벌을 가로질러 섬으로 이어지는 철골 탑의 긴 행렬은 자연의 거대함을 압도하는 역설의 숭고를 낳는다. 생태자연의 스스로 그러함과 인공의 조악한 다스림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상황. 이것이 박홍순 카메라가 고행에 가까운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만난 장면이자 상황이다.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거대한 풍경 가운데서 인공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생태자연에 인공적인 흔적을 가미한 인간의 행위를 드러내는 비판적 성찰의 시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박홍순의 렌즈는 생태자연을 겨누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대사회의 야만성을 겨냥하고 있다. 새만금 갯벌을 인공댐으로 막은 초대형 간척사업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씻을 수 없는 오류로 남을 것이다. 박홍순은 이 심난한 현장을 드나들며 최병수의 설치작품을 담았다. 나무 위에 새를 올리는 대신 짱뚱어를 깍아 올리고 어선을 하늘 방향으로 곤두세운 솟대 작품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황폐지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는 점점 육지로 변해가는 그곳 갯벌의 현실을 착잡하게 목격하고 있다.

예술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과정은 지속성에 달려있다. 그는 오랫동안 축적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화면을 구획하고 빛을 빨아들이는 자신의 어법을 만들어왔다. 박홍순의 프레임 속에는 역광을 포착함으로써 얻어지는 강한 콘트라스트가 존재한다. 최저의 어두움과 최고의 밝음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는 그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아날로그 작업에 의존하는 일 또한 박홍순 스타일의 결정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작업을 병행하지만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맥락을 형성하는 흐름은 아날로그이다. 디지털 프린트가 일반화한 지금, 그는 다시 대형 프린트 작업을 위해 어두운 암실에서 한줄기 빛을 좇아 긴 시간 작업에 매달린다.

그의 풍경 사진들 가운데는 하늘과 땅을 절반으로 가르는 수평구조의 작품들이 많다. 특히 서해바다를 담은 근작들이 그렇다. 수평선과 소실점이 정중앙으로 모인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의 시선이 원근법적인 시선에 충실한 다큐멘터리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생태자연의 컬러풀한 표정들을 흑백으로 환원한다. 그가 평면위에 옮겨진 색채의 세계를 회피하는 이유는 매우 사실적인 표현방법을 쓰되 그것을 절제미 속에서 실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형상을 옮겨 오고 색채도 재현하는 사진의 왜곡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 흑백사진만을 전시장에 제시한다.

박홍순 카메라 워크의 매력은 밀착이 아니라 이탈에 있다. 그는 항상 멀리서 느긋하게 바라본다. 예를 들자면 서해안 기름유출 사건의 현장에서 여느 사진가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박홍순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기름때를 닦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자원봉사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카메라를 바짝 들이댄다. 반면에 박홍순은 그 현장에서 한참 뒤로 물러나 거대한 생태자연의 풍경 속에서 꼬물거리는 인간 존재의 행위 장면을 포착한다. 태안군 학암포에서 기름유출 사건이라는 대재앙을 맞아 갯벌을 갈아엎은 장면을 포착한 작품은 마치 대지미술의 현장을 담은 것 같은 역설을 감지할 수 있다. 사건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 주체와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카메라 렌즈의 시선으로 장소와 상황이라는 실재의 면면을 흡착한다. 그의 사진은 몸으로 찍는 사진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로 찍은 사진이다.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 서해안 곳곳을 누빈 박홍순의 순례는 강화도에서부터 안산과 변산, 태안을 거쳐 진도에까지 이른다. 그는 대자연의 숭고함과 인공의 사악함이 맞물리는 서해안의 시공간을 무던히도 드나들었다. 아무도 가라고 하지 않은 그 길을 걸어가는 일. 이것이 박홍순이 선택한 예술의 길이다. 그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포착하는 일은 사진의 현장성에 대한 강박,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는 집착으로 직결할 수도 있다. 그는 다르다. 그가 장소성과 상황은 포착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느리고 길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작업은 생태적 가치를 옹호하는 환경운동의 맥락과 동행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참여적인 운동의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만든 사진 작업의 결과물은 전시장 전시뿐만 아니라 단행본 출판과 정간물, 그리고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서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당장 목전에 닥친 즉발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만큼 긴 호흡으로 자신이 발 디딘 땅 전체를 담아내겠다는 원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에게는 예술생산의 필연성이라는 맥락이 있다. 그로서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와 같은 거대한 대륙을 향한 동경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더 좁게는 자기 자신의 체험과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예술에 대한 진지하고도 성찰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박홍순의 고독한 순례에는 예술영역에 팽배한 식민주의 시각을 넘어서겠다는 구상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탈식민주의 관점의 첫출발로 그는 백두대간을 담기 시작했고, 한강을 거쳐 서해로 나아갔다. 조만간 그는 남해바다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 몇 년 내에 끝나지 않을 긴 프로젝트도 구상중이다. 비무장지대를 담는 일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다시 새로운 10년을 내다볼 줄 아는 긴 호흡의 예술가 박홍순의 프로젝트이다. 그의 스케일 큰 구상이 일단락을 이룰 때까지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고독한 발걸음에 정비례하는 예술의 길을 걸을 것이다. 예술은 대중의 기호취미를 충족시키는 일이 아니라 소수자의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 예술의 대사회적인 역할에 관한 질문에 대해 박홍순의 작업이 들려주는 해답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2008/11/12 03:36 2008/11/12 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