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적혈구이며 동시에 적혈구가 아니다 : 채미지
critic & column | 2008/09/10 23:44


그것은 적혈구이며 동시에 적혈구가 아니다
비가시적인 물질세계의 감성적인 움직임(emotional motion)을 포착하는 일은 채미지 작업의 처음과 끝을 이룬다. 그는 시각적 결과물을 생산하는 예술가의 숙명 앞에서 작의적인 의도에 따라 조형 행위를 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시각예술의 자율적인 조형원리에 기대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하는 관행을 뒤집고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발견하여 그 순간을 포착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는 유동하는 물질의 형태 변형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성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요컨대 물질의 구조적 형태미나 우연성에 의존하면서 매우 체계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는 물질세계의 감성을 재발견하는 것이 채미지 작업의 근간이다.
기름방울의 움직임을 포착한 후 그 색채를 바꿈으로써 전혀 다른 시각적 판타지를 생산한다거나 적혈구 세포 모양으로 만든 입체를 바닥에 둠으로써 유기적인 형상을 가진 벤치로 기능하도록 하는 대목에서 비가시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변용하고 전환하는 채미지의 예술노동을 확인할 수 있다. 채미지는 인체에 부착된 렌즈, 즉 눈의 시각적 한계 이상의 것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카메라 렌즈의 기능이 우리 몸의 렌즈를 통해서 또 다른 체험으로 진화하도록 만든다. 접사 렌즈를 활용해서 거대한 크기로 확장한 세포의 이미지를 입체로 옮기는 과정에서 채미지는 시각적 관찰과 촉각적 접촉까지 끌어들여 예술적 체험을 극대화 한다.
그는 형태와 색채와 입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작가 주체의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현상의 이미지를 끌어들인 후에 그것을 처리하면서 몇 가지 다른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사진과 입체, 영상에 이르는 다매체의 상황을 연출한다. 식자재 기름이 물 위 떠서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 내는 장면을 지켜보던 그는 물과 기름의 이질성에 따른 덩어리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작가의 의도가 배제할 여지없이 스스로 형상과 배열을 창출하는 우연성의 미학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는 물질의 감성적인 움직임을 포착함으로써 물질의 구조적인 미학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그 너머의 메시지를 담고자 한다.
채미지가 포착한 움직임은 색을 입음으로써 감성적인 움직임으로 전환한다. 노랑과 빨강과 파랑으로 전환한 물질의 세계는 전혀 다른 시각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다 극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 그는 동영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분열하는 세포들의 움직임을 가시화한 동영상이다. 이 작업은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덩어리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감성적인 움직임의 판타지를 제시한다. 실재 존재하는 물질의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지만 기계를 관통한 동영상 이미지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상을 시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가상세계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전자적으로 부호화한 뉴미디어의 미학이 제공하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인간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각적 경험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렌즈의 세계이다. 그것은 육안으로 경험하고 손으로 재현한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렌즈를 관통함으로써 우리 앞에 펼쳐지는 또 다른 세상은 시각예술에 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따라서 렌즈를 관통한 예술, 즉 렌즈 베이스드 아트(Lens Based Art)의 관점에서 채미지의 작업은 단순한 재현 사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미세한 시각적 체험을 하나의 지시가능성으로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원래의 형상으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의미생산을 가증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렌즈와 그 바깥의 유리로 만든 렌즈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채미지의 작업은 훨씬 몸에 가까운 감성을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혈액세포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는 ‘모더니즘 이후의 현대미술에 있어서 재현의 문제’라고 하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는 혈액세포 확대사진을 입체로 옮겼다. 채미지는 가운데가 움푹하게 패인 둥근 원반 모양의 입체들에 색을 입혔다. 전시장 바닥에 놓여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원반 모양의 덩어리들은 얼핏 보아 기하학적 추상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감각적으로 처리한 곡선들이 돋보이는 이 조형 작업의 첫 출발은 적혈구의 형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적혈구 이미지를 커다랗게 제작해서 바닥에 배치하거나 공중에 매다는 방식으로 혈액세포의 형상을 전시장에 옮겨놓는다. 비정형적인 형태로 배치된 이 형상들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적혈구의 이미지를 확대한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형상을 들여다보며 비가시적인 영역에 있는 혈액세포의 형상과 배치를 추상할 수 있다.
적혈구의 형상을 따서 만든 입체 작품과 입체설치 작품은 구상 작업이면서 동시에 비구상 작업이다. 렌즈라는 물질을 통해서 기계적인 방식으로 재현된 세포들은 실재를 지시하는 재현미술의 어법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채미지의 세포 덩어리들은 재현 그 이상의 것으로 전환한다. 현미경 렌즈를 통해서 평면 이미지로 재현된 세포 사진을 토대로 만든 입체는 그것이 적혈구 사진을 보고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재현과 비재현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채미지의 작품이 적혈구 형상이라 점에 대한 인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적혈구이다’라는 문장과 ‘그것은 적혈구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동시에 성립한다. 채미지의 작업은 무언가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일탈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적혈구이며 동시에 적혈구가 아니다’.

의미를 탈각한 기표의 자율성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그러나 본격 모더니즘 시기의 작가들과는 명확한 변별점을 가지고 있다. 모더니스트들이 실재와 기표와 의미의 삼각 축선을 탈접점의 관계로 만들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기표의 자율성을 충분히 인정하되 그 출발점을 실재와 결합하고 나아가 의미의 생성과 연결하려고 하는 통합의 정치학을 구사한다. 채미지는 작업의 시작을 실재와 관계 맺는 것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기표의 자율성과 지시가능성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그는 렌즈를 관통한 이미지들을 일관된 문맥 속에서 구사하는 멀티플 레이어이며 본격 모더니스트의 감성을 이어 받으면서도 포스트모더니스트 세대의 어법을 구사하는 경계 위의 작가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