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5 김원명 : 문학과 음악과 철학을 공유한 근대인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7/15 14:33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5 김원명
문학과 음악과 철학을 공유한 근대인
일본에서 나고 자랐으며 학도병으로 조선에 끌려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김원명은 김종식, 김윤민과 함께 해방 이후 새롭게 움트는 부산미술계의 젊은 피 삼총사 역할을 했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그의 부평동 집에 모여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조국에서 예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젊은 그들은 마음을 열고 어울렸다. 김원명은 1946년의 삼일절기념미전에 김남배, 우신출, 김종식, 김윤민 등과 함께 출품했다. 1948년에는 민주중보사가 주최한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에 서성찬, 문신, 김남배 우신출, 양달석, 김종식, 임채완(임호), 허민, 박생광, 전혁림, 이만두(이경) 등과 함께 초대작가로 출품하면서 새로운 부산화단 성립 과정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 공간의 혼란기 탓에 부친이 사업을 접고 서울로 옮겼으나 얼마 안가서 한국전쟁을 만났다. 거리를 지나가던 김원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트럭에 실려 생에 두 번째로 군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738공병대에서 차트 등을 담당하는 미술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던 김원명은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해방 후 귀국해서 부산에서 일하고 있던 부인 박절자를 만났다.
1956년부터 남성여고에 미술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한 그는 1960년에 ‘부산미술협회 3.1절기념미술전’과 ‘광복절경축미전’에 잇달아 출품했다. 20대 초에 일본군으로 귀국해서 해방을 맞은 후 잠시 활동했던 김원명은 20대 후반에 국군으로 다시 입대해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떠돌다가 10여년 만인 30대 후반에서야 다시 부산 화단으로 돌아왔다. 이후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김원명은 1971년에 ‘2회 후기전’에 출품하면서 황금기 ’70년대를 열었다.
양달석과 김종식 등 부산 화단의 1세대 작가들이 모여 창립한 후기전 멤버들은 창립원년에 열린 두 번째 동인전에 김원명을 끌어들였다. 김원명은 컴백과 동시에 자신의 전성기를 열어갔다. 1972년에는 ‘1회 부산-경주교환전’에, 이듬해에는 ‘5회 후기전’과 ‘부산타워미술관 개관기념초대미전’ 등에 출품하면서 40대 나이를 맞은 김원명은 1974년에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목화화랑다실에서 열린 ‘김원명유화소품전’(7.17-22)은 세간의 호평을 얻으며 그의 이름값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1976년에는 한일예식장지하다실에서 두 번째 개인전인 ‘김원명 유화전’(12.15-19)을 열었으며, 이후에도 부산화단의 중진 원로 작가로 활동을 지속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김원명은 예의 깔끔하게 다듬은 화면에 변화를 주어 좀더 거친 표현효과를 가미하는가 하면, 차분한 붓질 대신에 표현적이고 격정적인 붓질을 구사했다. 때로는 짙은 윤곽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부드러운 톤의 색면으로 작업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1990년 정년 퇴임 무렵 뇌졸중으로 불편해진 몸으로도 작업을 지속하면서부터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그의 전형성이 표현주의나 야수파 경향으로 전환한 말년작을 남겼다.
한 평생을 풍유와 낙천으로 일관했던 그는 만년에 병마와 싸우며 작업에 몰두하다가 1994년 2월에 심근경색으로 타계했다. 김원명은 평소부터 무덤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고, 유족들은 그 뜻에 따라 그의 유해를 화장한 후에 태종대에서 앞바다에 뿌렸다. 바다를 좋아해 바다를 많이 그렸던 평생의 화업에 걸맞게 자신의 몸도 가루가 되어 바다로 돌아간 것이다. 한평생을 자유인으로 살다간 낭만주의자의 기질대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몸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김원명의 회화세계는 몇몇 정물화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바다 풍경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는 평생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영도, 하단, 송도, 조도 등 부산의 남서부 바다를 자주 찾은 김원명은 간명하고도 굵직한 선묘와 소박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색채의 세계를 펼쳤다. 그는 단순한 표현으로 묵직한 회화의 맛을 살려 명쾌하게 자신의 감성을 드러낼 줄 아는 작가였다. 그의 풍경은 심미적 풍경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풍경이었다. 그의 감각적인 풍경 표현은 부산 근대화단의 수준을 당대의 한국 화단에서 정상급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더없이 힘있는 예술적 실천으로 기여하고 있다.
그의 풍경은 안정적으로 화면을 장악하며 구도를 잡아내는 배치의 감각과 은은하면서도 정교하게 풍경의 깊이를 읽어내는 색채 감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시에 대상의 형상을 정확하게 잡아내면서도 큼직큼직하게 골기를 잡아내는 굵직한 붓질의 맛과 힘은 김종식이나 김영교와 같은 당대의 대가들과 공유하고 있는 근대미술 정착기의 증거이다. 부산 근대화단에 있어 도입기와 정착기에 활동한 김원명의 회화세계는 서양에서 배워온 유채물감 그림을 자생적인 회화적 표현 수단으로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뚜렷한 경로이다.
김창섭의 <미의 사제들> 김원명 편에서 해방 직후 부산화단에서 ‘가장 활동이 왕성했던 작가로서 신선한 감각과 의욕적인 작품활동으로 촉망을 받아온’ 작가이며, ‘광선에 비친 외계(外界)를 재현하는 데에서보다 색채에 의한 자신의 정신적, 심리적인 갈등을 표현하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화가 김원명은 문학과 음악과 철학을 공유한 근대인이었다.
문학과 철학, 음악 등에 대한 교양과 현대미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탄탄한 화풍을 가지고 부산화단에 등장한 젊은 엘리트 김원명은 근대적 교양인이자 지식인이었으며, 자유롭고 순수한 영혼의 낭만주의자였다. 애호가 수준을 넘어서 생활 속에서 문학과 음악을 창조적으로 수용했으며, 그 에너지를 미술로 발산할 수 있는 예술적 기질과 솜씨를 가진 작가였다. 그는 재치있는 언변과 깊이 있는 재능으로 음주가무를 주도한 예인이기도 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자유자제로 연주했으며, 클래식 기타로 아르헨티나 탱고를 연주하기도 했다. 러시아 민요를 즐겨 부르기도 했으며, 러시아 소설 가운데서도 고리키를 좋아했으며, 취중에는 트로츠키를 언급하곤 했다.
그의 많은 지인들은 유머러스하면서도 교양이 넘치며 밝은 성격과 단정한 매너의 소유자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김종식의 작업실에 가장 빈번하게 들러 교류했던 이가 김원명이었다. 김윤민, 최민식, 김봉진 등의 작가들과도 깊이 사귀었다. 그는 시인 김규태, 미술평론가 김강석 등의 지인들을 비롯해서 영화와 음악, 문학 등 예술 전 영역에 걸쳐 두루 교류한 네트워커였다.
김원명은 미술이 대상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예술적 실천임을 아는 화가였다. 그는 남다른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동원해서 화단의 주류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적 자율성을 지향하며 그림을 그린 지식인 화가이다. 부산화단에 참된 예술의 씨앗을 뿌린 근대인 김원명. 내년이면 그가 떠난 지 열다섯 해를 맞는다.
일본 모지(門司)에서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재일조선인의 외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도쿄에서 시립5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미술에 뜻을 두었다. 1942년에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대학 재학 중인 1945년에 강제징집을 당해 학도병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해방을 맞아 가족을 따라 부산에 정착한 그는 초기 부산 화단의 젊은 기수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의 와중에 갑자기 끌려가 두 번째로 군에 입대했다. 종전 후에 미군부대에서 만난 재일교포 2세 출신인 박절자와 결혼한 후 부산 대신동에 정착했으며, 1956년부터 남성여고와 대동고등학교 등에 재직하면서 1990년까지 교단을 지키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60년에 10여년의 공백을 깨고 활동을 재개한 그는 ’60년대 초중반의 활동기와 ’60년대 후반의 휴지기를 거쳐 1970년대 접어들어 40대 황금기를 구가했다. 마흔을 넘어선 김원명은 두 차례의 개인전과 수많은 단체전에 부산의 바다 풍경을 중심으로 한 유화작품들을 출품했다. 이후 부산화단의 중진원로로 활동하던 그는 정년퇴임하던 해에 중풍을 맞아 불편한 몸으로 창작활동을 지속하다가 1994년에 타계했다. 문학과 철학,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 두루 능통한 근대적 교양인으로서 평생 자유로운 영혼으로 순수한 예술세계를 추구하면서 근대적 이상을 추구한 낭만주의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