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4 오영재 :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공존하는 낙원을 그린 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7/11 14:56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4 오영재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공존하는 낙원을 그린 화가
1.
자분자분 대화하며 미술과 문화에 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화가.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으며,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소설을 썼을 정도로 체계적인 서사의 구성능력을 가졌던 화가. 줄담배를 피던 화가. 술을 즐겨마셨던 화가. 평생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해 오로지 한 길만을 걸었던 화가. 상업주의 화풍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화가. 오영재를 술회하는 많은 문구들은 한결같이 생활의 압박을 견디면서도 자율성을 추구한 예술가의 낭만적이면서도 꼿꼿한 태도를 상찬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신화적인 에피소드 두 가지가 있다. 그림 그리기에 몰입한 작업 태도와 상품으로서의 작품 제작을 거부한 삶의 방식에 관한 얘기다. 그는 한국전쟁 시기에 포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북한 병사가 다가와 총을 겨누는 데도 꿈쩍하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구상화를 멈추고 추상화만을 고집하고 있을 때 거액을 내놓고 반추상이나 구상화를 요구하는 화상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화가 주정이와 소설가 신태범이 소개한 바 있는 이러한 얘기들은 오영재를 기억하는 많은 미술인들에게 예술가의 집념과 자존심을 지킨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영도 청학동의 고지대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간 오영재는 친지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유화랑에서 열린 생애 첫 개인전 이후 양산으로 이주한 했다. 작은 농가를 고쳐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자연 속에 묻힌 그는 더욱 더 단단하게 추상작업에 몰두했다. 삶의 마지막 해에 세 번째 개인전 개막을 일주일 앞둔 상태에서 암투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는 평생 가난한 화가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팔리는 그림의 유혹에 한 눈 팔지 않고 평생의 화업을 이뤘다.
2.
오영재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사실주의적 습작과정의 제작(1943-60), 구상화풍의 주된 제작에 겸해서 추상작품시도 제작(1961-80), 추상작품의 주된 제작에 겸해서 구상화 제작(1981-88), 정리된 결과로서 일관되게 추상작품 제작(1989-)”. 좀더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오영재는 평생에 걸쳐 사실에서 구상으로,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간단하고 필연적인 귀결인 것 같지만, 전후 현대미술의 복잡다단한 전개과정을 관통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의 여정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신과의 길고 긴 싸움을 통해서 얻어낸 것이었다.
미술평론가 김강석은 오영재가 어떤 구도 속에서 자신을 지켜왔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1960년대 전반기 부산화단의 지도적인 조형이념으로 추상표현주의를 꼽고 전혁림과 노후극과 함께 오영재에 의해 도입되었다. 하인두와 성백주에 이어 김구림, 김종식, 김청정, 이용길 등이 그 실험을 이었다. 김원과 김수익, 김구림 등은 정크아트와 팝아트, 옵아트 등 새로운 미술사조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었다. 60년대 후반부터는 김청정, 이용길, 김종근, 김홍석, 김동규 등 후배 세대들이 환경예술의 경향을 보였으며, 1970년대 들어서는 이들의 활동이 보다 본격화 했다.
오영재는 이러한 부산 화단의 변화 속에서 매우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이념을 진화시켜나갔다. 김강석이 요약한 바에 의하자면, 사실과 구상의 논쟁이 1960년대 들어 구상과 추상의 논쟁으로 번지고, 이어 추상과 오브제 논쟁으로 이어진 화단의 변화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1960년대에는 매우 앞선 선구적 역할을 시작했지만 이후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 격랑에 몸을 싣지 않고 외롭게 홀로 자신의 길을 걸었다. 오히려 단색조의 화면을 현란한 화면 구성으로 바꾼 색채의 변모를 통해서 시대와 동행한 흔적을 읽을 수 있는 게 다행일 정도다.
3.
색면의 연쇄로 이어지는 풍경과 정물, 인물을 그린 오영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추상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그는 대상의 형상을 가리키는 색면들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형상을 해체한 이후 남은 색면들은 추상적인 운율을 가진 색면들의 연쇄 그 자체로서 예술로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색과 면이라는 두 가지 화두로 좁혀 들어간 오영재는 결국 자유로운 색면들의 유희를 통해서 자신이 평생 갈구했던 파라다이스를 구현했다. 그는 1970년대까지 반추상 회화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데에 이르는 동안, 1950년대의 추상 도입기와 60년대의 모색기를 거쳐 1970년대 이후 특유의 색면 추상의 세계를 완성했다.
1951년 작 ‘인물’은 꿈틀거리는 붓질이 살아있는 초기작이다. 인상파 화법의 기본에 충실한 이 작품은 특유의 색면과 색감이 원초적인 형태로 묻어난다. 1956년 작 ‘정물’은 한 걸음 더 오영재 스타일에 접근한 인상파 회화의 정석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대상을 면으로 처리했다. 숲과 바위와 나무와 산과 물과 하늘의 구름까지도 단정하고 깔끔한 색채와 붓질로 이뤄진 면들의 연쇄체로 그려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977년작 ‘풍경’과 1987년 작 산 그림은 그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엄격하게 분할한 면과 면의 사이로 빛이 교차하고 어스름한 푸른 색 너머로 대기가 발색한다.
1960년대부터 추상 작업을 시작한 오영재는 직육면체를 그리거나 완전히 추상화한 색면의 전단계로 접어든 색면들로 습작과 완성작을 남겼다. 197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형상을 해체하고 추상적인 색면만을 가지고 파라다이스라는 명제를 달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부터는 곡선을 사용하면서 풍경이나 정물에서 볼 수 없었던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70년대에는 주로 단색평면회화의 범주 안에서 약간의 변형을 가졌던 그는 1980년대 들어서 보다 다채로운 색감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컬러풀한 색감이 가미된 새로운 버전의 색면들은 넘실거리는 파도이며 펄럭이는 깃발이었다. 오영재의 색면은 모든 것을 덜어낸 미니멀리즘의 세계라기보다는 인상파에서 입체주의에 이르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각 방식과 표현 방법을 자신의 어법으로 소화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추상적 입체주의로 언급하면서 대자연의 면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추상적인 색면회화를 구축했다. 그는 색면 자체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는 간략한 도형과 반복적인 색채의 결합이라는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강렬한 언어를 가지고 천국을 찾아 나섰다.
1990년대 들어 오영재는 직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꿈틀거리는 곡선으로 색면을 구성하면서 예의 파라다이스를 찾아 나갔다. 그는 절제된 언어로 ‘인간의 본질적인 소망’인 낙원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등식을 기록으로 남겼다. “자유+평화+행복=낙원” 자유와 평화를 통해 행복을 얻어내는 세상. 그는 낙원을 갈구했다. 오영재가 찾아 나섰던 천국은 색채가 암시하는 관념을 넘어서며, 형태가 은유하는 감성까지도 초월함으로써 (그것이 실재이건 관념이건 간에)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재현회화의 덫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상태에서 획득한 진정한 자유의 소산이다.
4.
그는 한 미술전문지 표지에 자신이 그린 부인의 초상이 다른 유명화가의 것으로 잘못 실린 사건에 대해서 안팎의 사정을 헤아려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넘어갔을 정도로 타인에 대해서 온화한 배려와 섬김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그는 평생 과작으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전을 여는 데도 매우 신중했다. 발표를 앞두고도 작품이 성에 차지 않으면 지워버리기가 일수였다. 몇 차례 개인전을 앞두고 전시를 포기한 덕에 환갑을 넘긴 62세에 첫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였다.
가까운 몇 년 사이에 회화의 효용을 교환가치에 고정시켜두고 화폐가치의 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술의 창작과 비평이 시장에 급속하게 빨려 들어가면서 작가정신의 상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작금의 세태에 비춰 오영재의 삶과 예술은 숙연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부산에 이렇게 사심 없이 성심을 다해 그림 그리는 이의 바른 길을 걸어간 어른이 있었다는 점. 우리 모두 그를 향해 감사와 존경을 보내는 이유이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도쿄의 아사카다니미술학원에서 수학했다(1946-1948). 해방 이후 귀국한 그는 경주에서 손일봉을 사사하면서 세잔의 조형언어를 배운 스승으로부터 인상주의 회화의 어법을 익혔다. 경주예술학교 미술과를 졸업한 후 1953년부터 울산제일중학교와 울산여자고등학교 등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이후 부산에 정착하여 1956년부터 1970년까지 해동중학교, 동주여중상고교에 등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대한미협전 등에 입선했으며 각종 기획전에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부산 화단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1957년까지 울산에서, 이후 1986년까지 부산 영도 청학동에서, 만년에는 경남 양산의 법기수원지 마을에서 살면서 평생에 걸쳐 꾸준히 작업에 매진했다. 1984년과 ’90년에 개인전을 열었으며, 사후에 '화업 50년 : 오영재 초대전'(송하갤러리, 1999)이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