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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3 김경 : 밭가는 마음으로 근대를 개척한 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7/0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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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3 김경

밭가는 마음으로 근대를 개척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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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뿔태 안경 너머 맑게 빛나는 눈빛. 섬약하면서도 날카로운 근대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화가 김경은 척박한 삶 속에서도 고집스레 예술가의 참된 길을 걷다가 40대 중반에 요절한 화가이다. 그는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일본제국주의가 정정에 달한 시점에 일본에 유학했다가 강제징집을 피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본명이 만두(萬斗)인 그는 밭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그림 그리는 일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경(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해방 이후 어수선한 정국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바꾼 이름 그대로 김경은 곧게 한길을 걸었다. 그의 새 이름을 지어준 시인 장호는 김경을 기리켜 ‘따블로 한 장 가지고서 세계를 이기겠다고 나서던 사나이’로 표현했다.

문신, 임직순, 김훈 등과 함께 동경에서 유학한 그가 해방 이후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이 부산이었다. 그는 1940년대 후반에 부산에 정착한 후 그는 교단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토벽동인 활동을 하면서 자취를 남겼다. 그는 1950년 부산미국공보원에서 열린 국민예술제 미전에 목판화 ‘어시장에서’를 출품해서 주목받았고, 경남미술가협회 제1회 미전에는 ‘어군포착(魚群捕捉)’을 출품하면서 지역의 주요 화가들과 만났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두노동자, 미군부대 인부로 일하다가 초량국민학교와 부산중학교를 거쳐 정규의 후임으로 부산공고 미술교사를 맡았다. 박고석이 물려준 학교담 옆 작업실에서 작업에 몰두했다.

김경은 1953년에 김종식, 김윤민, 김영교, 서성찬 등과 함께 토벽회 동인활동을 시작해서 소를 주제로 한 그림을 발표하는 등, 당시 화단에서 횡횡하던 이질적인 문화요소들을 토착문화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혼란의 시기에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작업에 임했다. 한 해에 두 번이나 열린 토벽동인전에 ‘소’, ‘소녀와 닭’, ‘풍경’, ‘항아리와 소녀’, ‘소와 사나이’, ‘여인’ 등을 출품했다. 김경은 소의 화가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향토색 짙은 주제를 담고 그러한 색채를 구현하기 위해서 소를 자주 그렸다. 그의 소는 인격화한 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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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작으로 하드보드지 위에 그린 ‘소’는 인간의 형상에 가깝다. 앞다리를 곧게 펴고 일어나려고 하는 소의 고통과 투혼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툼한 윤곽선과 굵은 붓자국들은 김경 특유의 투박한 색감과 질감을 더없이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같은 해에 찍은 목판화 성난 소는 상반신을 들고 돌진하는 하는 소이다. 목판 특유의 선맛과 더불어 삶의 역경에 처한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 무렵의 뎃생들도 여인과 소와 닭 등을 그리고 있다. 머리를 숙이고 들이받는 포즈를 가진 1957년작 ‘소’는 화면 전체를 휘감아도는 굵은 붓질의 재질감으로 이중섭의 소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한 인상을 풍긴다.

1950년대 중반의 김경은 드로잉과 판화를 많이 남겼다. 김경의 드로잉와 판화는 유화를 예비하는 에스키스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의 예술적 자질과 노작의 흔적을 실감할 수 있는 본격적인 작품들이다. 머리에 바구니를 인 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행상’이나 작업실 전경을 그린 목판화들, 1954년작 ‘가면’ 등은 당대의 생활상으로부터 작업 모티프를 얻었던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확인하게 한다. 1957년작 ‘소와 여인’이나 ‘여인과 명태’ 같은 작품들은 1980년대를 이끈 오윤과 홍성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곡선과 직선, 윤곽선과 판면의 극적인 대비를 감지할 수 있어 한국 근대화단을 견인한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해준다.

김경 목판화의 힘은 드로잉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간결한 선으로 램프나 명태를 그린 습작들을 비롯해서 1957년작 ‘명태C’에 이르러서는 그 간결하면서도 골기 넘치는 필치가 힘의 화가 김경을 실감하게 한다. 인체를 그린 그림들도 단순히 몸의 선을 그린 것이 아니라 동시대 삶의 지평을 담아내는 사람들을 그려내고 있다. 드로잉을 통해서 한 화가의 천부적 자질과 노력하는 화가의 모습을 남긴 많지 않은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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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후반, 김경은 그 짧은 생애에 있어 그리 길지 않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개인전을 열고, 신문삽화를 그리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1956년에 그는 미화당백화점 전시실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예리한 관찰력과 묘사력, 문학서사의 시각화능력 등을 고루 갖춰야만 가능한 신문삽화 작업을 많이 했다. 국제신보(1956-57)와 부산일보(1958-59))에 장호, 이주홍 등의 글과 협업한 신문삽화를 게재하면서 부산화단의 몇 안 되는 지적인 화가로 자리 잡았으며,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더욱 더 깊은 작업 세계를 구축했다.

김경은 30대 후반에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했다. 1958년에 서울 인창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부터 김경의 작업은 추상의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청맥동인 시절에 추상미술을 시작한 하인두를 몰아세우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고집했던 그는 새로운 예술의 길을 찾아서 비구상미술에 마음 문을 열었다. 그해 여름에 부산으로 내려와 청탑그릴의 스테인드그래스를 제작했으며, 그해 박고석, 이규상, 천경자, 정규 등과 함께 한 한국최초의 현대회화그룹 모던아트협회전에 ‘조우’, ‘저립’, ‘침식’ 연작 등을 출품했다. 이 무렵부터 김경은 작품 방향을 바꿔 추상의 경향을 띈다. 김환기의 반추상 작업을 연상시키는 1960년 작 ‘정립(停立)’은 수직과 수평의 선적인 요소를 원과 사각형의 색면과 결합한 추상회화이다. 추상화가로서 당대를 견인할만한 대표작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근대회화의 도입과 정착기를 거친 예술가의 고뇌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모던아트협회전에 연속 출품하면서 꾸준히 활동하던 그는 1964년에 뇌일혈로 졸도했다. 가족들을 서울로 이사하게 하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 본격적으로 활동할 조건을 만들었지만, 수십년간 고난에 찬 인생행로를 거듭한 그의 육체는 40대 한창나이에 깊이 병들어 있었다. 한때 병세가 호전되어 몸이 회복되는 듯했으며 작업을 지속하기도 했던 그는 추상적인 경향의 작품들과 더불어 소를 소재로 한 작품 30여점을 가지고 서울 개인전(1964)을 열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김경은 생명줄을 놓아야했다. 1966년에 지인들이 마련한 김경유작전(중앙공보관)에 40여점의 유화와 판화, 데생 작품들이 나왔다. 그의 마지막 작품 ‘동토(절필)’은 거친 마티에르를 가진 황토색의 색면 한구석에 검은 구멍 하나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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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안팎의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활동한 그는 교육자로서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김청정 등 부산에서 자라난 작가들에게 김경은 유화, 수채와, 조각 등 다양한 작업들을 보여주며 예술가의 길을 가르쳤다. 스승을 기리는 제자들의 마음은 사후 10여년이 지나 유작전으로 이어졌다. 1978년에 열린 김경유작전(부산 수로화랑)은 이시우, 이용길, 장호 등의 자문위원과 박춘근, 김청정, 안광모, 장상만 등의 추진위원들이 힘을 보탰으며, ‘김경화집’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인 1950년대의 10년 가까운 시기를 부산에서 보낸 김경은 부산근대화단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산과 서울이 지방과 중앙이라면 서울은 전지구에서 어느 위치에 속해있느냐고 질타하고 있는 미술평론가 이시우에 따르면, 김경은 그러한 위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의 누구에게도 위축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강박하는 숙명적인 소명의식’을 가진 화가였다. 하인두나 문신 등과 같이 김경과 깊이 사귄 벗들과 그의 제자들은 그의 예술적 열정과 더불어 곧은 신념의 삶의 태도를 깊이 새기고 있다. 예술가는 죽어서 작품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운 삶의 기억을 남긴다. 김경은 작품과 삶 양면에서 공히 향기를 남긴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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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金耕, 1922-1965)
경남 하동 출생으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40년에 18세의 나이로 일본대학 미술과에 입학했다가, 1943년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학병징집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에 진주로 가서 그림을 시작했고, 서울 진주, 마산을 거쳐 1949년에 부산에 정착했다. 경남미술가협회전, 토벽동인전 등에 참가하면서 부산의 근대화단 형성에 기여했으며, 부산공고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1956년에 첫 개인전을 연 후, 신문에 삽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1958년에 서울 인창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한 그는 모던아트협회전에 출품하면서 추상적인 경향의 작품을 선보였다. 1964년에 뇌일혈로 쓰러진 상황에서도 작품을 지속해 개인전을 열었으나 이듬해 작고했다. 1966년과 1978년에 서울과 부산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2008/07/01 11:28 2008/07/0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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