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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0 김종식 : 식민·지방 한계 초월 타협 않는 거장의 길 구축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17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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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0 김종식
식민·지방 한계 초월 타협 않는 거장의 길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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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방 한계 초월 타협 않는 거장의 길 구축

삶의 궤적을 통해서, 작품의 양과 질을 통해서 부산화단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화가 김종식. 그의 삶과 예술은 부산화단은 물론 한국 근대화단의 면면을 헤아리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이다. 그는 여하한 시류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식민지 학습기를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이룩한 예술가이며, 중앙과 지방의 차별을 넘어 보편성을 획득한 거장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을 지키며 부산작가로 살다간 예술가 김종식은 근대화단의 선구자로서, 교육자로서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는 동래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유학했다. 부모 몰래 미술을 전공하기로 한 것이 그의 나이 열아홉인 1937년의 일이다. 임완규, 최덕휴, 권옥연, 장욱진 등이 유학 동문들이다. 1세대 유학파 화가들이 돌아와 이른바 서양화가 이 땅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예술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유학 당시 백우회(白牛會) 활동을 했다. 후에 재동경조선미술학우회로 이름을 고친 이 클럽은 3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질 정도로 왕성했는데, 김종식은 후에 한국화단의 주류를 형성한 이들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일제시대 유학생 김종식의 작품은 표현주의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 경향을 보였다.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한 1942년은 징용으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던 때였다. 김종식은 이 위기 상황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해방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김종식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 선구자들이 1세대 작가 김원명의 집을 거점으로 음악가와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부산 예술계의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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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굵직하게 부산 풍경 그려내

해방공간의 김종식은 차분하게 부산의 풍경과 일상을 그렸다. 특히 그의 유명한 부산항 연작들은 강한 윤곽선과 짙은 원색으로 매력적인 감각을 발산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김종식은 노점상, 판자촌, 귀환동포, 제빙회사 등 동시대 삶의 정황들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부산 풍경과 일상을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간결하면서도 굵직한 김종식 초기 회화의 전형을 창출했다.

해방과 함께 부산화단의 새 장을 열어나가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김종식은 창작과 네트워크를 병행했다. 1946년 동래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김종식 개인전은 '해방감격'을 비롯한 40여 점의 작품으로 이뤄졌다. 당시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김종식은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작품발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냈다.

김경, 임호, 김영교, 김윤민 등과 함께한 토벽 동인 활동은 김종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관념적인 유희에 빠져드는 기성화단의 아카데미즘과 달리 동시대의 삶을 관통하려는 리얼리즘 경향을 보인다. 물론 그가 표현방법에 있어 사실주의 기법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동시대 삶의 지평을 깊이 성찰하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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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언어 쏟아낸 '토벽회' 창립


김종식은 김남배의 백양다방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토박이'라는 말을 변형해 '토벽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토벽 동인들의 창립전 서문은 사뭇 장중하다. '회화라는 것이 한 개 손끝으로 나타난 기교의 장난이 아니요, 엄숙하고도 진지한 행동의 반영'이라고 선언한 이 글은 '새로운 예술'이라는 것은 '필경 새로운 자기인식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에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 없고 진실한 민족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 가난하고 초라한 채 우리들의 작품을 대중 앞에 감히 펴놓는 소이가 전혀 여기에 있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문화식민지의 모순과 지방화단의 척박한 환경에 놓인 이들은 회화를 통해서 근대적 지식인의 풍모를 갖춘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진지한 성찰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1960년대의 김종식은 부산과 양산, 진해, 김해 등으로 교직생활을 하면서 옮겨 다녔다. 그는 1968년 동아대로 옮기면서 부산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여러 도시를 다니며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거친다. 1961년 작 '대결'이나 '갈등'과 같은 작품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그는 추상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단색 화면에 추상적인 형상을 가미한 이러한 화풍은 곧이어 풍경과 재결합한다. 1970년대 들어 청색 윤곽선의 풍경화 연작으로 전환한다. 영도나 태종대, 하단, 통도사, 범어사, 천마산 등 수많은 실경산수를 남겼다. 이전의 검은색 윤곽선이 청색으로 바뀌면서 필선의 자유로운 운율을 가미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풍경화들은 기하학적이면서도 표현적인 패턴이 등장하기도 하고 붓의 운율로 풍경을 그려내기도 했다. 대상을 포착하는 화가의 붓질로 회화 그 자체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실재 대상을 담아내는 재현회화의 틀을 고수한 것이다.

완숙기에 접어든 그는 현실을 초월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화가로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일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고유의 필선과 색채로서 화면을 장악해 들어가는 힘을 가질 때 가능하다. 김종식은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는 아카데믹한 풍경에 빠지지도 않았고 시류에 영합하는 추상미술에 현혹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김종식의 모색과 전환들은 한국 근대화단이 걸어온 여정이며 경계 위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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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길 속 다양한 실험 지속


오랜 세월동안 진행된 한국 화단의 변화 속에서 김종식은 곧게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지속했다. 가령 1955년 작 '빨래'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주조로 형상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면추상의 묘미를 살린 그림이다. 평생을 구상회화 중심으로 작업했던 김종식의 세계에는 이와 같은 의외의 장면들이 종종 들어있는데, '녹심'(1963)이나 '이승과 저승'(1965) 같은 작품은 표현적인 반추상이나 단색평면회화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며, '담벽'(1982) 같은 말년작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김종식은 근대의 콤플렉스를 관통한 거장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부산화단 혹은 한국화단의 콤플렉스들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그는 서구미술의 이식으로 출발한 근대화단의 근본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 근대를 개척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에 이은 일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예술적 열정과 시대적 소명의식 속에서 갈등해야 했다. 또한 부산지역을 지키는 작가로서 중앙화단과의 간극을 넘어서는 일 또한 매우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제국과 식민, 건국과 내전, 중앙과 지방 등과 같은 격변의 세월을 맞이했다. 김종식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가중시키는 이중삼중의 콤플렉스를 맞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남의 눈으로 남의 붓으로 그리지 말고 자신이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그려야 한다'. 그의 제자인 이용길이 전언한 김종식의 말이다. 김종식은 '그림 그리는 기교가 아니라 그림 그리는 태도를 가르쳤다'고 이용길은 말한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화가로서의 태도는 그의 평생을 지배한 '그리기의 숙명'을 통해서 관철되었다. 김종식은 끊임없이 손을 움직인 화가로 유명하다. 6백여권에 달하는 그의 스케치북은 평생 그림 속에서 살다간 치열한 화가의 길을 증거하고 있다.

1988년 영면의 길에 접어든 이후 그는 평생을 부산을 지키며 살아간 존경받는 예술가로 남아있다. 그의 신중하고도 강건한 풍모를 흠모한 많은 미술인들은 거장의 향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평생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선을 그었으며, 지인들과 마음 터놓고 술을 나눈 애주가였다. 한국전쟁 피란지인 부산을 찾은 예술가들을 거둬준 호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후일담들은 지조있는 예술가의 면모를 전한다. 그의 서거 20주기를 맞은 올해가 어느덧 절반을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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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식(金鍾植·1918~1988)

부산 동래구(현 금정구) 장전동에서 태어났다.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동래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유학, 1942년 귀국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개인전을 연 이후 부산미술전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전에 출품하면서 부산근대화단을 만드는 데 함께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그는 새로운 예술활동을 모색하며 교류한 동료들과 토벽회 활동을 했다. 부산과 부산 인근 도시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동아대학교에 근무하면서 부산에 정착, 후진을 양성하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600여 권의 스케치북과 2만여 점에 달하는 드로잉과 유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 범어사 인근 상마마을 어귀에 김종식 그림비가 세워졌다.

2008/06/17 23:19 2008/06/17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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