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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9 임응식 : 한국사진예술을 견인한 리얼리스트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1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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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9 임응식

한국 사진예술을 견인한 리얼리스트



모자를 눌러쓰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벽에 기대선 남자. 가슴에는 구직(求職)이
라는 글씨를 쓴 패널을 두르고 선 이 남자는 임응식의 저 유명한 ‘구직’(1953)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리얼리스트 임응식의 예술세계를 대변하는 명작이다. 한국전쟁 후의 가난에 찌든 삶은 이 한 컷의 사진을 통해서 생생한 역사의 기억으로 남았다. 피사체의 상황을 통해 드러나는 임응식의 의도는 삶의 사실성을 포착하는 데 있다. 임응식의 사실성은 주어진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의 본질에 가장 명쾌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는 순간의 상황을 담아낸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이 한 장의 사진으로 깊이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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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응식은 1955년에 미국에서 발행되는 유명한 저널인 ‘포토 애뉴얼 55’에 ‘나목’(1953)을 발표했다. 서울에서 찍은 1953년의 대표작 '구직'이 기록의 차원에서 한국 사진을 대표하는 고전에 속한다면, 부산에서 찍은 ‘나목’은 또 다른 각도에서 임응식 사진의 묘미를 살린 대표작이다. 마치 박수근의 회화 나목을 보는 것과 같이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 사이에 서 있는 한 아이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감상적인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황량한 상황을 포착한 풍경 사진의 명작이다. 매우 강한 명암 대비로 잔가지를 제거한 벌거벗은 나무는 사실을 기록하는 사진의 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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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응식은 전쟁터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리얼리스트로 거듭났다. 그는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했는데, 그것은 삶이라는 상황에 놓인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는 기록성과 사실성을 우선시하는 예술관이다. 전쟁 종군 사진작가라는 충격적인 체험을 거친 임응식은 현실이란 무엇이고 사진은 그 속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할지를 다시 생각했다. ‘전쟁터의 총탄과 비정함, 피투성이 주검들은 내가 현실의 세계를 직시하도록 해주었다’고 증언한 그는 기록성의 중요성을 전쟁터에서 깨달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50년 10월 부산으로 후송된 그는 곧바로 미공보원화랑과 광복동 자신의 집 앞 거리에서 가두전 형태로 전쟁기록사진을 전시했다.

종군 사진가 활동 후 그는 피난민들을 비롯한 당대 서민들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위에서 삶을 이어가던 전쟁시기 사람들의 모습과 도시의 풍경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 임응식은 그와 함께 활동했던 많은 사진가들과 함께 삶을 관통하는 시선으로서의 리얼리즘 미학을 사진예술에 끌어들였다. ‘사진이란 인간 생활의 기록이고 진실이다’. 임응식의 사진예술을 집약하는 명제이다. 사진의 본질에 대한 임응식의 지론은 ‘사진의 기록성과 사실성’에 있다. 임응식은 평생 인간이 대면한 삶의 정황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힘을 신뢰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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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지 수도 부산은 사진가들을 전국단위로 결합시켰다. 부산예술사진가협회와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합동예술사진전을 가지면서 힘겨운 한 시절을 보냈다. 당연히 이들의 카메라는 피란생활의 고단한 현실로 향했다. 전쟁의 참상을 대면한 사진가들은 사진이 이 땅에 도입된 지 반세기가 훨씬 넘어서야 리얼리즘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기 시작했다. 그 역동적인 과정에 임응식은 작가로서 조직가로서 종횡무진했다. 한국전쟁은 작품세계 뿐만 아니라 예술계 조직가로서의 임응식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공간이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임응식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로서 전국을 상대로 네트워크를 넓혀나갔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임응식은 20대 중반에 강릉에서 사진동우회를 만드는 등 예술가 단체의 조직가로 성장해서, 40대에 이르면 전국단위 예술단체 활동을 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네트워커로 활동했다. 그의 형 임응구는 부산 최초로 일본에 유학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여 부산근대화단의 분기점을 남긴 사람이다. 그의 형 임응구는 후에 일본에 귀화함으로써 부산화단에서 종적을 감추었지만, 그의 동생 임응식은 한국전쟁 이후까지 부산을 근거지로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그 동력을 바탕으로 한국사진예술계 전체를 견인한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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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예술가 임응식의 시작은 10대에 맞형으로부터 선물받은 카메라를 만지면서부터였다. 20대 초반인 1935년 전조선사진살롱에 출품한 임응식은 ‘뚝을 가다’, ‘모자‘ 등이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의 작품에서 리얼리스트 임응식의 면면을 확인할 길은 없다. 인상주의 사진에 심취했던 일본 사진은 마치 일본화가 그랬던 것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몽롱체 그 자체였다. 당시의 임응식 사진도 그 영향권에 있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사진작가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했던 20대 중반의 임응식은 매우 단단한 리더십과 작가정신의 소유자였다.

일제강점기에 표현의 자유를 가질 수 없었던 임응식은 해방공간과 전쟁을 거치면서 리얼리스트로 거듭났다. 리얼리즘 사진의 사실성은 있는 것 그대로의 상황을 포착하는 데 있다. 그것은 연출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인위적인 설정에 반대하는 시각이다. 그런 점에서 임응식은 철저히 근대적인 사진 개념을 가지고 그것의 근대성, 다시 말해 사진예술이 취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망에 충실하고자 하면서 사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시각이다. 피사체를 포착하는 예술가의 마음은 인위적인 조작이나 연출이 아니라 실재의 상황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려는 낮은 마음이다. 그는 평생을 흑백사진으로 일관했다. 원로작가 최민식이 그러한 것처럼 임응식은 사진이 가져야할 가장 최소한의 요소, 즉 형태와 명암만으로 대상을 담아내는 평면예술로서의 사진의 본질을 지키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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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고 소탈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임응식은 한국 현대사진의 역사를 스스로 썼다. 그는 사진이라는 장르를 예술의 한 부문으로 제도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구자이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사진에 대한 무지 뿐만이 아니었다. 사진을 박제화하려는 여하한 시각들과 맞서는 일이 임응식의 예술적 가치를 리얼리즘 예술가로 더욱 더 굳게 만들어 주었다. 근대인 임응식은 한국 사진의 근대를 열었으며, 21세기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진예술을 이끌어온 한국사진예술의 산 증인이다. 그는 예술가단체의 리더였으며, 탁월한 리얼리즘 작가였고, 나아가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스스로 강단에 선 교육자였다.

임응식의 여러 업적들 가운데 하나가 대학강단에 사진을 배치하는 일이었다. 그는 서울대 미술대학에 사진강좌를 창설했고, 이대와 홍대 등에서 강사로 뛰었다. 이후 중앙대 사진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협회를 만들고 단체활동을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사진 분야의 뛰어난 조직가로 활동했다. 그는 1935년에 강릉에서 강릉사우회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 1947년 부산에서  부산예술사진연구회를 조직하고, 1952년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이 협회를 예총에 가입시켰으며 1964년에는 국전에 사진 부분을 만들었다.

1960년에는 일본의 ‘세계사진연감60’에 그의 작품 ‘입모’가 수록되면서 다시 한번 국제적인 입지를 확인한다. 1960년대 이후 그는 전통문화와 예술가들에게 주목했다. ‘공간’지 주간(1964∼71)으로 일하면서 1966년부터 3년에 걸쳐 ‘공간’지에 ‘한국의 고건축’ 및 ‘현대한국의 작가상’을 25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1969년에는 ‘월간중앙’에 ‘한국의 불상’ 연작을 10회에 걸쳐 연재했다. 1960년대 이후 그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고건축 시리즈와 예술가의 모습을 담은 연작 등은 일관성있는 도큐멘터리로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전통의 가치를 통해서 휴머니즘을 재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1991년에 150여점의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2000년 사진의 해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한국사진 100여년을 갈무리하는 데 힘쓴 그는 한국의 사진을 예술로 끌어올린 영원한 선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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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응식(林應植, 1912-2001)
일제강점기 초반인 1912년 11월 11일 부산 동대신동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4년 풍도체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일본 ‘사진살롱’지에 ‘정물’로 입선했다. 1935년 강릉에서 강릉사우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그는 부산에서 부산예술사진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역임했다(1947-52). 1950년에는 인천상륙작전 보도반으로 종군기자로 나섰으며, 같은 해에 ‘경인전선보도사진’개인전을 열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한국미술가협회 사진부 대표위원을 역임했다(1955∼60). 1970년대에는 중앙대 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73-78). 1972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회고전을 열었으며, 198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임응식 회고전’을 열었다. 수상 경력으로는 1960년 서울시 문화상과 197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이 있다.



 
2008/06/10 14:25 2008/06/10 14:25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8 : 허민, 조선전통을 이어받은 선비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1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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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8 허민 : 조선전통을 이어받은 선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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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芸田) 허민은 조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비 화가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는 반듯한 사람이었으며, 작고할 때까지도 화필과 번역원고를 끼고 살았던 예술가이다. 성장기의 그는 당대의 명가를 사사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운전은 이미 유아기부터 한학을 통달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 운전은 전문 화가이면서 동시에 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한글로 번역한 학자이기도 했다. 전통회화론이 글과 글씨와 그림을 한 몸으로 보았던 데 비해, 20세기 서구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근대성은 그림을 글과 글씨로부터 분리해냈다. 학문하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사람이 직업적으로 분리되는 상황. 그것이 근대적 합리성이다. 허민은 20세기 한국사회가 당면한 패러다임의 전환 과정에서 진정한 문인화가의 길을 걸으며 고뇌하고 갈등한 예술가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학문과 예술을 공유한 유기적인 지식인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근대는 그것을 잘게 나누었다. 전문성의 강화에 의한 합목적적이고 체계적인 영역 분할. 그것이 근대가 요청하는 분화(分化)의 길이었다. 우리가 허민의 존재를 깊이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그가 근대문화의 충격 앞에서 전통사회의 격조 높은 문화적 가치를 놓치지 않은 유기적 지식인이자 창의적인 예술가라는 데 있다. 허민은 시서화 삼절의 전통을 제대로 익힌 선비였던 그는 10대 초반에 사사삼경을 통달한 후에 실학에 관심을 가지고 박지원과 정약용에 빠져들었다. 그는 동의보감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 출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말년에 그는 열하일기 번역에 착수하기도 했다. 직업화가인 그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20세기의 충격 앞에서 우리 사회가 수천년동안 공유해온 회화적 전통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수천년동안 갈고 닦아온 수묵과 채색화의 회화적 전통은 일반명사 도화(圖畵)의 지위를 상실하고 동양화 또는 한국화라는 고유명사로 이름을 바꿔야했다. 19세기까지 그냥 그림이라고 부르던 것을 동양그림 내지는 한국그림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외부의 충격이 강렬했다는 얘기다. 조선사회가 공유하고 있던 모든 시스템이 새로운 충격 앞에서 그 보편성과 특수성의 지위를 바꿔나간 것과 같은 맥락에서 조선의 회화전통 또한 위상의 변화를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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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은 19세 때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서 그를 사사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김규진은 고암 이응노를 길러낸 당대 최고의 서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대나무 그림에 능한 대가 아래서 허민은 문인화와 사군자를 배웠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로 스승을 잃은 허민은 조선의 마지막 궁정화가 출신의 김은호의 문화로 들어갔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이당 김은호의 문화생들이 만든 후소회 회원이었다. 1934년에 스물 다섯에 이른 허민은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함으로써 당시의 미술제도가 공인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첫 입선작인 ‘춘란’은 화사에게 핀 꽃밭에서 벌과 고양이가 등장하는 그림이다. 이후 그는 여인 인물상이나 화조화를 그려 네 번 더 선전의 입선작가에 오른다. 선전 도록 자료를 보건대 이 시기의 그림들은 이당을 사사한 제자로소 충실하게 기본을 다진 화가임을 알 수 있다.

박생광과 애호가 최범술이 기록하고 있는 허민은 일제 말기에 민족주의자들의 아지트였던 다솔사(多率寺)에 머물면서 변관식, 성재휴 박생광 등과 어울렸다. 허민이 작고하기 이틀전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박생광은 그를 다대포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었던 소회를 밝히며 허민은 ‘너무 총명했기 일찍 갔다’고 말하고 있다. 해방 이전까지 김은호 사단으로 출발해 30대에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던 허민은 그러나 해방 이후 40세 전후의 10년간 침묵했다. 전언으로는 국전 심사위원 물망에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박지원에서 신채호에 이르는 민족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강고한 그의 성품으로 보아 해방 이후 굴절의 역사를 이어온 그 10년동안 그는 주류사회에 끼어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그는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서울화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그가 평생 단재 신채호를 흠모하며 살았다는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해방공간은 허민의 삶을 힘겹게 했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전라북도 익산에 머물었다. 그가 부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6년의 일이다. 한동안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던 그는 작고하기까지 10여년간 부산화단에서 눈부시게 활동했다. 그는 전통회화의 미덕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자신의 창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린 ‘달과 나무’, ‘나무’와 같은 그림은 대개 주문에 의해 그리는 신선도의 대가로 잘 알려진 허민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예술적 자율성과 창의력을 획득하고 있다.

10년간 은거하던 허민은 윤재 이규옥과 청초 이석우 등이 활동하고 있던 부산화단에서 청년기에 일궜던 화업을 재창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56년에 부산에 정착한 이듬해에 부산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고, 이허 1958년에 영도 대교로에 독지가의 후원을 얻어 동명서화원을 열었다. 유화계열의 작품을 하던 김남배가 1959년에 갑자기 김남배 동양화전을 열고 동명서화원전에 출품했던 곳이 바로 동명서화원이다. 백양다방을 경영하면서 부산 근대화단의 네트워커로 활동했던 김남배가 서양화가 딱지를 떼고 허민이 운영하던 공간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열었다는 점은 당시 허민의 영향력을 잘 가늠하게 한다.

허민은 고전과 현대를 동시에 담은 인물이다. 특히 신선도를 잘 그려서 신선도의 대가라는 칭송을 들었다. 신선도는 전통사회의 대표적인 관념적인 회화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그는 문기가 넘쳐흐르는 기명절지의 정물화와 세련된 감각의 화조도 등을 그렸다. 그는 관념회화 뿐만 아니라 진경산수 또한 많이 그렸다.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모습을 담은 그의 그림들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수준에서 필을 구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60년 작 ‘쥐’나 이듬해에 그린 ‘소’ 등과 같은 작품은 마치 일러스트 카툰 한 컷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예서와 전서, 초서를 넘나든 다양한 서예작품들과 전각 또한 그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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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은 전통회화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 동시에 예술적 창의력을 가지고 전환적 국면을 만들고자 했던 현대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1960년대에 그린 ‘산수도’는 기법적인 면에서 매우 흥미롭다. 열 폭의 그림들 가운데 어떤 부분은 전형적인 북종화 계열의 선묘 중심 회화 양상을 보여준다면, 또 다른 부분은 측필로 눌러 그린 남종화 계열의 미점(米點)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화제를 써내려간 필체 또한 미려하기 그지없다. 마른 붓질로 화면의 골기를 잡아나가는 센 붓질과 짙은 먹으로 수묵의 맛을 제대로 살려나가는 발묵의 묘미를 공유했다. 허민의 화풍이 수묵화의 다양한 미학적 태도와 방법론들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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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은 한국 근대화단의 성립 시기에 지식인으로서의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학파를 비롯한 새로운 교육체계를 거친 주류의 공간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선전을 통해 데뷔했지만, 국전은 달랐다. 그는 1958년에 국전에 참가해 입선 한 후 다시는 국전에 참가하지 않는다. 이후 작고하던 해인 에 이르기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67년에 건강악화로 작고했다. 1977년에 작고 10주기를 맞아 사위 이재용의 노력으로 발간된 ‘운전허민서화집’은 그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가 서문을 쓰고 이구열, 박생과 등이 회고록을 실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서부터 말년까지의 많은 대표작을 수록하고 있다. 근대적 전형의 전문가 범주를 넘어서는 21세기 통합형 지식인 상을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조선전통의 학문과 예술을 한 몸에 지니고 20세기 한국사회와 대면했던 선비화가 허민이 있다. 새로운 문화사회의 이상을 꿈꾼다면 허민의 그림과 글들을 다시 한 번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허민(許珉 1912-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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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경남 합천의 반듯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학을 익혔다. 해강 김규진과 이당 김은호를 사사한 후 국전에서 여러 차례 입선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 해방 후 10년간의 공백기를 거쳤으며 1957년부터 부산에 정착했다. 이듬해 부산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8년에는 부산예술가협회가 주최하는 건국10주년기념 경축미전에 출품했다. 민주신보사주최의 제1회 경남미술전에도 초대 출품했으며, 이후 부산미술협회전과 경남미술전에 꾸준히 출품했다. 63년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예술제 추진위원과 심사위원을 맡았다. 1966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면서도 동의보감과 열하일기를 번역했다. 1967년 건강이 악화되어 56세의 이른 나이에 작고했다. 1977년에 작고 10주기를 맞아 ‘운전허민서화집’이 나왔다.

2008/06/10 13:53 2008/06/1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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