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2 김윤민 : 불안한 20세기 한국의 현실 너머 꿈의 세계를 추구한 예술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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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2 김윤민
불안한 20세기 한국의 현실 너머 꿈의 세계를 추구한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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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성찰하는 일은 예술가의 가장 큰 화두 중의 하나이다. 김윤민은 자연을 그렸다. 그의 자연관은 다음의 문구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화가는 자연을 겸허하게 맞아야 한다. 오만한 자는 자연의 미를 노치고 마는 것이다.” 그는 예술하는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강조했다. 김윤민은 그러나 아카데믹한 풍경 그림에 머무르지 않았다. 김윤민의 독특한 감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그림은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960년 작 ‘나부’이다. 이 그림은 드물게 풍경을 전면 배제한 문제작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알몸의 여성이 앞으로 웅크린 채 두 손으로 푸른 기둥을 붙잡고 얼굴에 맞대고 있다.

성적인 메타포가 물씬 묻어나는 이 그림은 자연 속에서 동심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여느 그림들과 확실하게 차별화 한다. 1960년이라는 시대적 정황이 이 작가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할만한 비슷한 작품들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도발적인 도상은 당시의 정서에 비춰 매우 충격적인 내러티브를 던지고 있다. 푸른색과 적황색으로 강한 대비를 주고 있으며, 풍만한 육체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윤곽선과 노란색조의 흐름이 시선을 끄는 이 그림은 김윤민이 얼마나 격렬하게 초현실의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김윤민의 그림은 아카데미즘에 가까운 소재와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한 색채와 형태, 화면 배치 등의 신비주의 화풍을 유지함으로써 상투적인 재현회화의 틀을 벗어났다. 그의 그림들에는 대체로 청록색의 자연과 적황색의 인물 등장한다. 작은 그림을 많이 그린 그는 단순히 자연을 감상에 의존해 다루지 않았다. 풍경과 인물의 초현실성은 그의 독특한 형태와 색채 감각에서 나온다. 그는 둥글둥글한 형태와 그라데이션으로 재현회화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으로 격변하던 대혼란의 시기를 지나면서 김윤민은 일체의 사회적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회피했다. 월북작가 정종녀와 동창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기도 했던 그는 학창시절과 달리 풍경에 천착했다. 김윤민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학생시절에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지만 모델을 구하는 데 제한을 받아 자연을 그리는 것으로 바꿨다. 그는 ‘자연에서 느낀 가운데서 선악을 헤아려 가리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고자’ 했다.

김윤민은 경남미술교육연구회와 경남미술연구회를 거쳐 토벽 동인 활동을 했다. 미술평론가 이시우는 토벽 동인들의 면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김종식은 피난민의 슬픈 생활을 그렸고, 김영교는 싸늘한 사회상을 그렸다. 임호는 보릿고개 속의 애가(哀歌)를 그리고, 김경은 이념의 분노가 분출하듯 군상을 그렸다. 이렇듯 토벽 동인들이 제마다 강렬한 작의를 표출할 때 김윤민은 치졸한 수법으로 신비스런 자연(江山)을 그려 그 독특한 화풍으로 주목을 모았다.” 토벽 동인 대다수가 당시의 사회상이나 동시대성을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유독 김윤민은 자연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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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생 일관된 주제와 화풍을 유지했다. 그는 소박한 인성을 가진 작가였으며, 그림 또한 그것에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작의 작가로 잘 알려진 그가 적은 수의 작품을 일관되게 유지한 데는 남다른 까닭이 있다. 그는 그림을 게을리 한다고 말하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반박하면서 자신은 가장 오랜 시간동안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는 체질적으로 순발력보다는 성실함으로 살아간 작가이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활동 방법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했다. 30여년 화가 생활을 거친 후에야 1974년에 62점의 출품작으로 첫 개인전(부산탑미술관)을 열 정도였다.

미술평론가 김강석은 김윤민의 화풍에 대해 작품경향이 살롱풍이 대부분이지만, 원근법과 명암법에 의존하는 재현풍경화의 한계를 넘어 이차원적인 평면 공간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회화는 ‘삼차원과 이차원, 재현과 변형, 유머와 에로스, 상징과 감각’을 공유했다. 김윤민은 독특한 감성과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연풍경을 단순한 형상으로 집약한 후 그 형상 하나하나를 다시 환상적인 분위기의 색채로 가다듬었다. 김윤민 회화의 특징은 그라데이션(gradation)에 있다. 그는 붓질의 흔적을 남기는 데 매우 신중했다. 하나의 형상과 다른 형상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강한 콘트라스트를 주기도 했지만 한 형상의 내부에서는 가능하면 점진적인 색채와 형태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그라데이션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윤민의 그림이 요즘 유행하는 매끄럽게 넘어가는 얇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형태를 잡아내는 데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색채에 있어서도 어딘가 덜 다듬어진 듯 마무리했다. 김강석은 이 대목에 대해 ‘욕심 같으면 좀더 표현기술이 정리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김윤민은 평생 이 화풍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그림을 특징짓는 주요한 기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적 표현과 반추상적인 표현이 혼재된 화면은 그를 확연하게 차별화 하는 주요 요소이다.

그는 동시대를 몸으로 체득하며 시대정신과 사회현실을 관통하는 리얼리즘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가 갈망한 세계는 초현실의 세계였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과 인물은 꿈틀거리는 현실 속의 그것이 아니라 몽환적인 기억 속의 그것이었다. 동심 속의 강과 바다와 산과 들을 그리고 그 속에 동참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연을 재발견하고 삶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것이 김윤민 회화의 전략이다.

김윤민의 회화는 형태와 구조를 평면위에 배치하는 재현회화의 기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색면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대상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변형함으로써 재현회화의 틀을 넘어서고 있다. 김창섭은 김윤민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일제시대 자연주의 화풍, 토벽 동인 시절의 표현주의 경향, 그 이후의 초현실적인 경향 등으로 분류했다. 그의 작품 세계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재했다. 풍경 속에는 경제개발시대의 시멘트벽과 컬러풀한 양철지붕과 전통사회의 가옥형태인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동시에 등장한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인물과 나체의 아이들이 공존하는 화면 또한 이 작가의 독특한 체험과 감성코드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그림들은 역설적이게도 실재의 바탕 위에 서 있다. 들판에서 나물 캐는 처녀들과 염소, 아이의 모습을 담은 평범한 풍경 가운데 기와집과 담장을 보라색으로 처리한 그의 감성은 확실히 몽환적이다. 그러나 형태를 단순화 한 표현기법상의 문제를 떠나서보면 매우 충실하게 실재의 체험에 근거한 그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냇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소가 등장하는 풍경,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아이가 등장하는 농촌마을 등 ‘전원풍경과 아이들’이라는 소재를 끊임없이 반복, 변형했다.

‘그네’(1984) 또한 김윤민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그렸다. 그런데도 그를 아카데믹한 풍경화가로 볼 수 없는 것은 그의 표현 방법과 인물을 다루는 상징적인 수법 때문이다. 그네를 떠받히는 기둥 하나를 생략한 불균형한 화면에는 절반만 드러난 시소의 사선이 그려져 있다. 김윤민의 회화는 이렇듯 안정적인 구도와 체계적인 재현과 거리를 둠으로써 현실을 넘어선 현실, 몽환적인 상상으로 가득 찬 자연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김윤민은 왜 전원 풍경을 그리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화면을 구축했을까? 그것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의 현실인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불안한 20세기 한국의 현실 너머 꿈의 세계를 추구한 김윤민. 그는 부드러움 속에 불안함을 담았고, 초현실 속에 현실을 담았으며,  평온한 서정 속에 역사의 갈등과 욕망을 담아낸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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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민(金潤玟·1919~1999)

경남 남해 태생으로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한 후 한 해 동안 그곳 연구과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다가 귀국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 국전인 문전과 재야전인 신관서전에 출품해서 연 4회 입선해 명성을 얻었다. 해방 직전에 귀국했으며, 해방 후 경남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해방 이듬해에 김종식, 김원명 등과 함께 삼일절경축미전, 광복경축미전, 경남미술(교육)연구회 등에 참가했고, 민주중보사 주최 부산미술전람회 초대출품에 이어 전람회위원을 맡으면서 부산화단의 1세대 작가로 활동했다. 김영교, 김경, 서성찬,김종식, 임호 등과 함께 미술동인 토벽회 활동을 했으며, 한국근대미술 60년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했다. 그는 38년동안 교육자로 봉직했으며, 부산시교육미술연구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미술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부산시문화상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GIM's Public Art Story 9 : 밀레니엄터워의 '세기의 선물'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6/24 10:57


GIM's Public Art Story 9 : 최정환, 종각 밀레니엄 타워, 세기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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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맞은 편에 있는 밀레니엄 타워 뒷마당.
번쩍이는 황금빛 탑이 하나 서 있다.

짬뽕탑이다.
최정화의 '세기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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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orycubic.co.kr/cubic?contents_id=242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1 임호 : 예술창작과 문화운동으로 근대화단 일군 단정한 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2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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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1 임호
예술창작과 문화운동으로 근대화단 일군 단정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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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에 검은 뿔태 안경을 낀 중년신사 임호. 그는 중후한 외모의 느낌 그대로 부산미술계에서 작가로서 문화운동가로서 중량감 있는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작품들은 부산의 근대화단이 학습기를 거쳐 모색기와 실험기를 거치며 어떻게 자생적인 문화를 형성해왔는지를 일별하는 데 매우 유력한 근거들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근대적인 미술제도를 뿌리내리는 데 깊이 관여한 문화정치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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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이래 공모전 일색의 활동방식에서 탈피해 동인활동이 태동하던 시절, 그는 부산화단의 동인활동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이념과 창작의 생산을 선도했다. 일본 유학을 마친 후 마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1947년에 부산 경남 지역의 여러 작가들과 함께 경남미술연구회를 만들었다. 부산의 김남배, 김봉기, 김원갑, 김윤민, 서성찬, 우신출, 마산의 이림, 이준, 임호, 진해의 장윤성, 조영제, 통영의 전혁림 등이 참가했다. 이들은 창립 이듬해에 경남미술연구회전(경미전)을 열었다. 임호가 부산화단에 처름 등장한 것은 1948년에 열린 민주중보사 주최의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에 임채완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출품한 때부터이다.

1950년 5월, 경미전은 혁토사(赫土師)전으로 개명했다. 경남이라는 지역정체를 벗어나서 또 다른 지향을 가진 그룹이 전환한 것이다. 경남의 특수성을 빌어 지역성을 표방하는 한계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임응식 등의 사진가들도 결합했다. 30대의 야심만만한 젊은 작가들은 혁토사라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지역적 특수성을 넘어 보편성을 획득한 근대적 미술운동의 면모를 갖췄다. 혁토사에는 임호를 비롯해 서성찬, 양달석, 김윤민, 김종식, 김경, 김영교 등이 함께 했다. ‘우리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없고 진실한 민족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공유한 가치는 풍토성과 사실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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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임호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여러 행사에 참가하면서 많은 화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준, 박성규, 우신출, 서성찬 등과 함께 종군기록화전에 출품했으며, 대한미협 주최의 전시미전에 김인승, 박영선, 박득순, 백영수, 서성찬 등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다채로운 미술잔치는 휴전 이후 부산미술계에 커다란 공백을 남겼다.

토벽회 동인 활동은 이러한 지형 속에서 태동한 부산지역 중견 작가들의 대안적인 그룹활동이다. 한국전쟁 발발 한달 전에 열린 혁토사전은 단 한 번의 전시로 부산화단의 분기점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뉜다. 국전파와 비국전파이다. 국전파에는 김봉기, 김원갑, 이림, 이준, 전혁림 등이 있고, 국전에 등극하지 않은 작가들 가운데 서성찬, 김영교, 김경, 김윤민, 김종식, 임호 등이 있었다. 후자의 비국전파는 이후 토벽회(1953-54)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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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의 회화는 그 소재나 주제, 스타일에 있어서 근대초기 부산화단 예술가들의 고민을 대표하는 것이다. 인상파 화풍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 너머의 세계를 얻고자 했던 그는 민족주의적인 내용과 사실주의적인 형식을 찾아내기 위해 혁토사에서 토벽회로 이어지는 동인활동을 주도했다. 사실적 묘사력이 뛰어났던 그는 강한 필선의 윤곽선과 그 내부의 색면처리로 독특한 스타일을 창출했다.

그는 화가 개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부산화단의 문화정치를 주도한 공인으로서도 매우 성공적인 삶을 꾸렸다. 그는 수많은 미술행사를 주도하면서도 타고난 결백성을 바탕으로 강직하게 사적인 관계를 배제함으로써 공정성을 확보했다. 사인으로서는 풍류를 아는 멋쟁이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미의 사제들’(1972)의 저자 김창섭은 임호를 ‘법이 없어도 좋을 소시민’이라고 말할 정도로 단정한 풍모를 지닌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매우 사교적인 성격으로 전국을 아우르는 네트워커로 활동했다. 김남배와 함께 부산 근대화단의 유력한 주역으로 활동했던 서성찬과는 종군보도반에 함게 참가했을 정도로 가까운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부산 영남상고에 부임하면서 부산에 정착한 임호는 평생을 고등학교 미술교사와 대학 강사, 교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비록 단발행사로 끝나기는 했지만 1966년 부산에서 열린 전국규모의 공모전인 한국국민전람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우신출 신창호 등과 일요화가회 지도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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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신태범이 전하는 임호의 풍모는 풍류를 아는 예술가 그 자체이다. 임호는 십자매와 앵무새를 키우기도 했으며, 온실을 꾸려 여러 가지 화초와 특히 백여종의 선인장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신경통과 고혈압이라는 지병에 시달려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도 광고모델로 등장할 정도로 준수한 풍모를 가졌으며 애주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집 담장에 벽화를 기르고, 일간지 연재소설 삽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전차의 장식그림을 그리기도 한 생활 속의 미술가였다.
1952년 작 ‘흑선’은 학습기를 거쳐 모색기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그려낸 근대화단의 대표작이다. 검은 부채를 들고 있는 부인의 모습이다. 저고리를 입은 모습과 한 손에는 지갑과 다른 한 손에는 흑선을 들고 앉아있는 부인상을 통해서 한국인의 손에 딱 맞게 익어있는 붓질의 흐름과 색채의 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나뭇단을 등지고 있는 여인을 그린 ‘한라산‘(1970)이나 제주해녀들이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말리며 휴식하는 모습을 담은 그의 그림들은 관념의 세계를 넘어 현실을 포착하겠다는 초심을 잘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임호는 세계적 보편성보다는 지역적 특수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자연인에게 풍토적 특성이 있듯이, 예술인에게도 풍토적인 개성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술가에게 주어진 개별성을 잘 살리는 것이 예술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름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주도에 드나들기가 쉽지 않았던 당시에 제주도를 오가며 해녀들을 그려서 ‘해녀와 소라의 작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해녀들의 억센 삶을 통해서 폐허를 딛고 새 삶을 꾸리던 동시대의 정황을 담은 것이다.

1969년에 그린 불상 연작 두 점은 인상파 화풍 본연의 표현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림들이다. 만년작에 해당하는 ‘여인과 풍경’(1973)은 푸른 초원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들과 무지개, 나비, 원두막이 등을 배경으로 전면에 여인과 해바라기가 등장하는 그림이다. 얼핏 보아 인상파와 초현실주의를 뒤섞어 놓은 듯 미묘한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임호가 추구한 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림 속 주인공 여성은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밝고 맑은 풍경 전면에 등짐을 진 어여쁜 아가씨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그가 그린 여인상은 독서하는 여인도 아니고, 속절없이 벗고 서있는 누드도 아니며, 남편과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현모양처도 아니다. 그는 일하는 여성들의 삶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다.

임호의 회화는 간결한 선묘와 강렬한 색채의 세계로 집약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특히 주목해볼 만한 것은 전통회화의 감성과 교감하는 화풍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인상파 화풍의 영향을 받은 그는 매우 강렬한 빛의 세계를 탐닉했다. 이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풍토성과 결합하는 전통적인 감성의 문제이다. 치마저고리의 화려한 색상과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의 표정 등은 분단 이후의 남북을 관통하는 동질성이다. 몰골기법의 선묘와 원색을 살리는 독특한 색감으로 구성된 임호의 회화는 식민지와 전쟁을 거친 한국 근대화단의 한 전형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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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林湖,1918~1974)

경남 의령 출생으로 본명은 채완(采完)이다. 일본 오사카미술학교를 마치고 해방 이후에 마산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전국 화단과 교류했으며, 미술동인 토벽(土壁)의 창립에 참가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종군 보도반으로 중부전선을 거쳐 서울에 입성하기도 했으며 1백여점의 기록화로 전쟁기록화전(부산미공보원)을 열었으며, 종전 이후 부산에 정착했다. 미술교사와 대학강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그림을 남겼다. 특히 제주도를 오가며 해녀들을 많이 그렸다. 부산 근대화단의 중심축에서 활동한 임호는 1955년에 미화당백화점화랑에서 작품 30점을 발표하면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진 이래 1974년까지 열두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그는 수많은 단체 활동을 통해서 부산의 미술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1963년에 한성여자대학(현재의 경성대학교)에 부임해서 작고할 때까지 재직했다. 1974년 일요화가회 회원들과 밀양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후 음주상태에서 맞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작고했다. 평생 1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예총 부산지부장과 부산미술협회 지회장을 맡았으며, 1964년 부산시 문화상을 받았다.


미술관 문화를 위해 앞담화의 장을 열자

critic & column | 2008/06/20 11:32


미술관 문화를 위해 앞담화의 장을 열자

한국의 국공립미술관은 길게는 수십년간 짧게는 10여년간 잰걸음을 해왔다. 제법 시민사회 속에 파고드는 문화기구로서 발돋움을 하려나 싶더니만, 최근에 들려오는 이런저런 파열음들은 심난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큐레이터들이 한꺼번에 중대 징계를 받을 상황에 처해있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계약직 신분의 벽에 부딪혀 마음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디렉터와 큐레이터의 일머리가 뒤엉켜 차제에 디렉터와 큐레이터의 업무분장을 법규화해야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미술관 전시의 기획 방향과 관련한 누적된 혼선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는가하면 책임운영기관 단계를 지나 민영화 논란에 내홍을 겪고 있다.

국공립미술관 이외의 영역은 그 반대이다. 화랑과 경매, 언론, 교육, 국제행사 등 나름대로 제 갈 길을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다. 화랑들은 활황일로를 걸으며 미술계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시장의 팽창이 비평의 부재를 낳는다는 역설적인 우려가 나오고 있을 지경이지만 어쨌거나 화랑들은 나름의 제 갈 길을 걷고 있다. 사립미술관들도 척박한 환경을 딛고 꾸준히 풀뿌리미술문화를 넓혀가고 있다. 비엔날레를 비롯해서 각종 대형미술 프로젝트들 또한 내홍을 이겨내고 오프닝 날짜를 꼽고 있다. 도시공간과 결합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들도 양적 팽창 일로에 있다.

한국미술계의 여러 영역들이 나름의 해법을 찾아 진일보하는 데 비해 국공립미술관들은 조금씩 퇴행하고 있다. 국가단위나 지자체단위에서 설립, 운영하는 국공립미술관의 위상은 점점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고 있고, 작품수집과 전시기획의 난맥상 또한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누구의 문제인가? 관료체제의 비효율성 때문인가? 전문가집단의 무능함 때문인가? 시민사회의 미성숙 때문인가? 관료집단과 전문가집단, 미술인과 시민, 디렉터와 큐레이터 양자간의 간극이 미술관 문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에 몇몇 관료와 심중의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양쪽 다 입을 모은 말이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양자의 대화는 필수불가결하다. 서로의 입장에서 서서 상호주관성을 가지고 마음 문을 열면 그것으로부터 커다란 새로운 에너지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주관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상호주관성은 객관성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 엄밀한 객관성을 담보하는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 규칙은 새로운 합의에서 나온다. 지금껏 우리는 미술관 문화를 둘러싸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다. 그 합의를 위해서 어떤 절차를 거쳐야할지도 난망한 상태다.

미술관 문화에 관한 인식의 전환과 새로운 실천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소통의 통로가 직접체제가 아닌 대의체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소통 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오랜 역사동안 직접 소통하지 못하고 대리 소통에 의존해왔던 사회적 소통 방식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효용성이 그 한계를 드러내자 직접민주주의의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촛불의 바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이다. 그 저변에 정보생산과 소통 방식의 변화가 있다.

미술관 문화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는 아직 대의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선거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탄생시키고 그 권력이 사회의 제반 시스템을 두루 경영하도록 하는 대리 소통의 한계가 미술관 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물론 지금 당장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기관을 놓고 직접소통을 통한 정책결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근본이 흔들리고 있으니 보다 직접적인 수준의 논의가 필요하다.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논의보다는 미술관을 다시 세우기 위한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미술관은 근대적 미술 체제를 만든 근간이다. 미술관은 일방적인 자본의 논리를 경계할 유일한 대안이다. 미술관은 미술문화와 관련한 근대적 이념을 실현한 최상의 기구이며 미술문화를 견인하는 공공의 처소이다. 박물관과 미술관. 그것은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국가 권력이 역사와 문화를 국가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소통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안된 문화정치의 산물이 아니던가. 지금 우리는 그 틀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생각의 차이를 좁히려는 진지한 토론과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는 하기 위해 입을 모아야 할 때이다. 각자 뒤에 앉아 불만을 토로하는 뒷담화에는 능숙하지만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는 앞담화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앞담화의 장을 만들자.

김준기(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서울아트가이드 2008년 7월호 기고문.


GIM's Public Art Story 8 : 밀레니엄 타워의 '원의 정원'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6/19 22:31


GIM's Public Art Story 8 : 홍승남, 종각 밀레니엄 타워의 낮은 공공미술, 원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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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맞은 편에 있는 밀레니엄 타워 앞 광장.
그곳에는 높다란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수직선을 그리고 있고,
그 아래 나즈막한 스트리트 퍼니처들이 있다.
홍승남의 '원의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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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0 김종식 : 식민·지방 한계 초월 타협 않는 거장의 길 구축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17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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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0 김종식
식민·지방 한계 초월 타협 않는 거장의 길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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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방 한계 초월 타협 않는 거장의 길 구축

삶의 궤적을 통해서, 작품의 양과 질을 통해서 부산화단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화가 김종식. 그의 삶과 예술은 부산화단은 물론 한국 근대화단의 면면을 헤아리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이다. 그는 여하한 시류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식민지 학습기를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이룩한 예술가이며, 중앙과 지방의 차별을 넘어 보편성을 획득한 거장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을 지키며 부산작가로 살다간 예술가 김종식은 근대화단의 선구자로서, 교육자로서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는 동래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유학했다. 부모 몰래 미술을 전공하기로 한 것이 그의 나이 열아홉인 1937년의 일이다. 임완규, 최덕휴, 권옥연, 장욱진 등이 유학 동문들이다. 1세대 유학파 화가들이 돌아와 이른바 서양화가 이 땅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예술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유학 당시 백우회(白牛會) 활동을 했다. 후에 재동경조선미술학우회로 이름을 고친 이 클럽은 3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질 정도로 왕성했는데, 김종식은 후에 한국화단의 주류를 형성한 이들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일제시대 유학생 김종식의 작품은 표현주의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 경향을 보였다.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한 1942년은 징용으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던 때였다. 김종식은 이 위기 상황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해방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김종식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 선구자들이 1세대 작가 김원명의 집을 거점으로 음악가와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부산 예술계의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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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굵직하게 부산 풍경 그려내

해방공간의 김종식은 차분하게 부산의 풍경과 일상을 그렸다. 특히 그의 유명한 부산항 연작들은 강한 윤곽선과 짙은 원색으로 매력적인 감각을 발산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김종식은 노점상, 판자촌, 귀환동포, 제빙회사 등 동시대 삶의 정황들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부산 풍경과 일상을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간결하면서도 굵직한 김종식 초기 회화의 전형을 창출했다.

해방과 함께 부산화단의 새 장을 열어나가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김종식은 창작과 네트워크를 병행했다. 1946년 동래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김종식 개인전은 '해방감격'을 비롯한 40여 점의 작품으로 이뤄졌다. 당시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김종식은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작품발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냈다.

김경, 임호, 김영교, 김윤민 등과 함께한 토벽 동인 활동은 김종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관념적인 유희에 빠져드는 기성화단의 아카데미즘과 달리 동시대의 삶을 관통하려는 리얼리즘 경향을 보인다. 물론 그가 표현방법에 있어 사실주의 기법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동시대 삶의 지평을 깊이 성찰하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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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언어 쏟아낸 '토벽회' 창립


김종식은 김남배의 백양다방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토박이'라는 말을 변형해 '토벽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토벽 동인들의 창립전 서문은 사뭇 장중하다. '회화라는 것이 한 개 손끝으로 나타난 기교의 장난이 아니요, 엄숙하고도 진지한 행동의 반영'이라고 선언한 이 글은 '새로운 예술'이라는 것은 '필경 새로운 자기인식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에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 없고 진실한 민족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 가난하고 초라한 채 우리들의 작품을 대중 앞에 감히 펴놓는 소이가 전혀 여기에 있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문화식민지의 모순과 지방화단의 척박한 환경에 놓인 이들은 회화를 통해서 근대적 지식인의 풍모를 갖춘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진지한 성찰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1960년대의 김종식은 부산과 양산, 진해, 김해 등으로 교직생활을 하면서 옮겨 다녔다. 그는 1968년 동아대로 옮기면서 부산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여러 도시를 다니며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거친다. 1961년 작 '대결'이나 '갈등'과 같은 작품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그는 추상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단색 화면에 추상적인 형상을 가미한 이러한 화풍은 곧이어 풍경과 재결합한다. 1970년대 들어 청색 윤곽선의 풍경화 연작으로 전환한다. 영도나 태종대, 하단, 통도사, 범어사, 천마산 등 수많은 실경산수를 남겼다. 이전의 검은색 윤곽선이 청색으로 바뀌면서 필선의 자유로운 운율을 가미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풍경화들은 기하학적이면서도 표현적인 패턴이 등장하기도 하고 붓의 운율로 풍경을 그려내기도 했다. 대상을 포착하는 화가의 붓질로 회화 그 자체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실재 대상을 담아내는 재현회화의 틀을 고수한 것이다.

완숙기에 접어든 그는 현실을 초월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화가로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일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고유의 필선과 색채로서 화면을 장악해 들어가는 힘을 가질 때 가능하다. 김종식은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는 아카데믹한 풍경에 빠지지도 않았고 시류에 영합하는 추상미술에 현혹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김종식의 모색과 전환들은 한국 근대화단이 걸어온 여정이며 경계 위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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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길 속 다양한 실험 지속


오랜 세월동안 진행된 한국 화단의 변화 속에서 김종식은 곧게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지속했다. 가령 1955년 작 '빨래'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주조로 형상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면추상의 묘미를 살린 그림이다. 평생을 구상회화 중심으로 작업했던 김종식의 세계에는 이와 같은 의외의 장면들이 종종 들어있는데, '녹심'(1963)이나 '이승과 저승'(1965) 같은 작품은 표현적인 반추상이나 단색평면회화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며, '담벽'(1982) 같은 말년작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김종식은 근대의 콤플렉스를 관통한 거장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부산화단 혹은 한국화단의 콤플렉스들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그는 서구미술의 이식으로 출발한 근대화단의 근본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 근대를 개척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에 이은 일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예술적 열정과 시대적 소명의식 속에서 갈등해야 했다. 또한 부산지역을 지키는 작가로서 중앙화단과의 간극을 넘어서는 일 또한 매우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제국과 식민, 건국과 내전, 중앙과 지방 등과 같은 격변의 세월을 맞이했다. 김종식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가중시키는 이중삼중의 콤플렉스를 맞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남의 눈으로 남의 붓으로 그리지 말고 자신이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그려야 한다'. 그의 제자인 이용길이 전언한 김종식의 말이다. 김종식은 '그림 그리는 기교가 아니라 그림 그리는 태도를 가르쳤다'고 이용길은 말한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화가로서의 태도는 그의 평생을 지배한 '그리기의 숙명'을 통해서 관철되었다. 김종식은 끊임없이 손을 움직인 화가로 유명하다. 6백여권에 달하는 그의 스케치북은 평생 그림 속에서 살다간 치열한 화가의 길을 증거하고 있다.

1988년 영면의 길에 접어든 이후 그는 평생을 부산을 지키며 살아간 존경받는 예술가로 남아있다. 그의 신중하고도 강건한 풍모를 흠모한 많은 미술인들은 거장의 향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평생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선을 그었으며, 지인들과 마음 터놓고 술을 나눈 애주가였다. 한국전쟁 피란지인 부산을 찾은 예술가들을 거둬준 호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후일담들은 지조있는 예술가의 면모를 전한다. 그의 서거 20주기를 맞은 올해가 어느덧 절반을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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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식(金鍾植·1918~1988)

부산 동래구(현 금정구) 장전동에서 태어났다.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동래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유학, 1942년 귀국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개인전을 연 이후 부산미술전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전에 출품하면서 부산근대화단을 만드는 데 함께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그는 새로운 예술활동을 모색하며 교류한 동료들과 토벽회 활동을 했다. 부산과 부산 인근 도시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동아대학교에 근무하면서 부산에 정착, 후진을 양성하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600여 권의 스케치북과 2만여 점에 달하는 드로잉과 유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 범어사 인근 상마마을 어귀에 김종식 그림비가 세워졌다.


안과 밖, 있음과 없음, 그리고 공간 : 김현호 개인전 서문

critic & column | 2008/06/13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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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 있음과 없음, 그리고 공간 : 김현호 개인전 서문


매스나 볼륨과 결별할 수 없었다는 점, 물질적인 구조물을 생산하는 일 또한 그의 작업을 구성하는 중심축이었다는 점에서 김현호는 우리가 합의하고 있는 조각의 관행으로부터 이탈한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더 치밀하고 치열하게 물질과 대결하는 과정을 거쳐 매우 견고한 물질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나아가서 그는 본격 모더니즘 세대와 공유하는 감성을 소유하고 있다. 소리와 파동과 공간과 같은 의제들을 향해서 예술적 환원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현호는 조각의 본령이 매스와 볼륨에 있다는 낡은 생각을 오래전에 지워버린 작가이다. 그는 오랫동안 사운드와 오브제를 이용해서 공간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는 가시적인 구조물 자체를 보여주기보다는 시각과 청각을 동원해서 비가시적인 영역인 공간을 사유하는 작업을 해왔다. 따라서 김현호에게 있어서 조각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구조물을 만드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그 너머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영역을 드러내는 일이다.

김현호 신작들은 스테인리스 스틸 판재를 잘게 잘라서 선재로 형상을 구성하는 용접조각 기법을 사용해서 형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공간을 발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일관된 의제를 탐색하면서도 본격 모더니즘 세대와 차별화하는 전환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그의 신작이 새로이 도입한 요소들은 형상과 내러티브 두 가지이다. 이전의 그는 환원론적인 명제들을 길어 올리기 위해 최소주의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형상과 내러티브를 철저히 줄였다. 지금의 그는 형상을 빌어 내러티브를 발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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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호의 신작들은 거대한 철재 용접 작업들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판재를 자르고 두드리고 이어붙여 거대한 조각을 만든 김현호는 사물의 특성을 뒤집어 활용하고 있다. 반짝이는 표면과 대상을 투영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불에 달구어 잿빛으로 바꾼다는 것은 녹슬지 않는 철의 특성을 역이용하는 시도이다. 반짝이는 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김현호의 작업은 그래서 매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역발상의 차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기하학적 추상과 소리를 이용한 최소주의 작업 방식 또한 형상을 다루는 것으로 전환했다. 그는 거대한 선재 구조물 내부에 인간의 형상을 배치함으로써 두 형상 사이의 공간을 재발견하려는 의도를 담아냈다. 꿈틀거리는 정자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결합하거나 구체나 범종 형상 내부에 불상의 형상을 결합한 대형 용접 조각 작품들이다. 물고기 안에 누워있는 인간의 모습을 결합한 것도 동일한 맥락 위에 있다. 대형투구 한 점도 공간의 문제를 안고 형상에 접근하고 있다.

형상의 문제는 내러티브로 이어진다. 김현호 신작들이 가장 크게 전환하고 있는 점은 자신의 초기작에서 나타났던 서사를 회복했다는 데 있다. 그동안 일관되게 추구해온 공간에 관한 관심을 지속하면서도 자신의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현호의 변모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김현호 내러티브는 삶을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 존재와 생명에 관한 명상을 끌어들이는 그의 신작들은 종교의 도상들을 끌어들이고,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조형적 요소들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공간과 구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중의적인 독해를 요청하고 있다. 공간으로부터 삶으로, 기하학적 구조로부터 사물이나 인간의 형상으로 전환하는 단계에서 나름의 일관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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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범종은 무수히 많은 직선들의 연쇄로 이뤄졌다. 유려한 곡선의 당초문과 원을 나열한 열주문을 제외한 모든 요소들은 짧은 직선들의 만남일 뿐이다. 그 짧은 직선들을 이어붙여 만든 삼각형과 사각형들은 범종의 볼륨을 표상한다. 실재의 볼륨을 상실한 채 범종의 껍질만을 제시하고 있는 김현호의 이 선재 용접 범종은 그래서 실재를 가장한 허구이다. 그의 전략은 범종을 표상하는 철골구조를 뚫고 내부로 들어가서 또 다른 형상을 만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내부에는 가부좌를 튼 불상의 형상이 들어있다. 그 불상마저도 볼륨을 상실한 선재용접조각이다.

범종의 프레임 사이를 뚫고 들어간 우리의 시선은 불상(프레임)을 만난 다음 다시 그 내부를 만난다. 강한 발색의 주황색 안료를 바른 불상의 안쪽 선들에 이르러 김현호는 이중삼중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물고기 속에 누워있는 와불과 구체 안에 들어있는 불상도 구조 속의 구조라는 이중의 구조와 서사를 가지고 있다. 정자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 안에 들어있는 인간의 형상 또한 인간존재의 근원을 캐는 생명의 성찰을 담고 있다. 사람 키를 훨씬 넘는 투구 프레임은 인류사를 지배해온 폭력의 역사에 대해 침묵으로 저항하는 기표이다.

형상과 서사의 문제는 다시 공간이라는 김현호의 숙명적인 화두와 만난다. 그는 형상의 바깥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까지 공간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고정된 단 하나의 시각이 아닌 움직이는 여러 가지 시각으로 그의 작품을 대면할 때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고정시점이 아닌 이동시점으로 관찰할 때 더욱 선명하게 형상과 공간을 드러낸다.

철재 단조와 용접의 과정을 거친 김현호의 거대한 구조물은 역설적이게도 있음과 비어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바깥의 모습과 안쪽의 비어있음, 바깥의 바깥과 그 바깥의 안쪽의 비어있음을 동시에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찾는 것은 안과 밖, 있음과 없음이며 나아가 그 사이의 비가시적인 공간이다. 그의 작업은 바로 이 대목에서 물질과 비물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엄밀한 경계를 넘어 형상과 내러티브와 공간의 문제를 관통하면서 김현호의 독자성을 발현한다.

김준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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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 Public Art Story 7 : 여의도 금영빌딩 앞 '만남'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6/12 19:03



GIM's Public Art Story 7 : 한명섭, 여의도 금영빌딩 앞,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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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한명섭 작가의 이 작품, 만남.
지하1층에서 지상1층으로 유려하게 뻗은 곡선이
공간의 맥락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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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 Public Art Story 6 : 이형우, 연세빌딩 앞, <시간 1993>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6/12 19:00


GIM's Public Art Story 6 : 이형우, 연세빌딩 앞, 시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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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맞은편 고가도로 너머로 보이는
연세빌딩 앞에는 길쭉한 원뿔 모양의
커다란 조형물이 하나 있어요.
이형우의 '시간 1993'.
최근에 도색을 다시 해서
상큼하게 바뀌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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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 Public Art Story 5 : 박기원, 서울역의 랜드마크, 자-넓이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6/12 18:57


GIM's Public Art Story 5 : 박기원, 서울역 앞, 자-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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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앞 랜드마크
박기원의 작품 자-넓이
공간을 장악하는 직선의 맛과 더불어서
작품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만나 새롭게 형성되는
공공미술의 문맥을 읽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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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orycubic.co.kr/cubic?contents_id=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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