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개념 문화공간과 미술관의 대응 : 한국큐레이터협회 세미나 발제문

critic & column | 2008/05/30 04:47


신개념 문화공간과 미술관의 대응

1.
전시장은 근대를 매개한 공간이다. 전시장이라는 소통 공간을 체험한 관객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과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과 더불어 이른바 공공의 영역을 형성하는 공중(le public)으로 자리 잡았다. 전시장과 공연장과 소설 등과 같은 공공연한 논의 장이 생김으로써, 다시 말해서 문화예술의 수취인으로 진화한 시민계급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공공영역이 태동했다. 따라서 전시장은 근대정신을 전취하는 데 커다랗게 기여한 제도공간이다. 한국사회가 전시장이라는 제도 공간을 만들고 키워온 지 어느새 1백년이 지났다. 제도나 관행에 있어서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한국의 전시장은 수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 그러나 체계적인 학습과 체험을 결여한 채 서구문물 수용의 일환으로 출발한 전시공간은 아직 시민사회 속에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서구 사회처럼 초기형태의 공공영역을 매개하는 진화단계를 제대로 밟지 못한 채 제도의 이름으로 대중을 호명하는 공간으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자생적인 미술문화공간을 경험한 역사가 짧다보니, 문화제국의 신화를 학습한 시민들은 아직도 서구의 근대 유명작가들로 구성된 서구미술의 퍼레이드에 길게 줄을 서서 대중을 호명하는 상업주의 전시 콘텐츠에 빨려들어 가고 있다. 부끄럽지만 우리의 자화상이다. 서구로부터 들여온 전시공간이라는 제도는 서구의 콘텐츠를 반복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서구를 학습함으로써 근대와 조우했던 한국의 미술문화 공간은 근대성을 전취하기도 전에 탈근대적 징후와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 어느 집단보다도 신속하게 압축성장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광주와 부산, 그리고 서울로 이어지는 대규모 비엔날레를 보라.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날로 늘어가는 국공립미술관들 또한 빠르게 양적 팽창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공공미술관이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립미술관들도 있다. 화폐가치의 자기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미술시장의 성장에 따라 화랑들의 전시공간 또한 폭발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들이 어떠한 문화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데 있다. 근대적 문화정치의 장으로서 기능해온 전시공간이 향후 어떻게 진화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예술적 실험을 통해서 진화하는 전시공간의 꼼꼼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다른 대부분의 문제도 그렇지만, 전시공간이라는 제도영역을 과연 우리사회의 어떠한 위치에 배치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문화정치적 관점이 부재한 상황이 문제다. 특정소수의 하비투스에 초점을 맞춰 문화권력을 재생산해왔던 전시공간이 대형화 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근자의 대형 전시공간들이 19세기 버전의 서구문화 콘텐츠의 권위를 빌어 21세기 한국사회에 문화식민의 골을 깊게 각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기존의 예술제도와의 싸움을 위한 제도비판의 지위와 역할을 갖기에 이르렀다. 근대적 제도에 대한 도전과 실험. 그것은 탈근대를 통해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고자하는 시대정신이다.

2.
전근대와 근대, 근대와 탈근대가 뒤엉킨 한국의 전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성찰적인 문화정치를 위한 상징투쟁들이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 한 시대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절대 기록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희망은 거기 작고 낮은 목소리들 속에 숨어 있다. 한국의 전시공간들은 기성의 제도공간과 차별화한 새로운 실험을 관통하면서 탈근대적 문화정치를 매개하는 문화생산의 전초기지로 진화하고 있다. 전시회라는 장을 중심으로 양적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의 미술문화공간은 대안공간의 출현으로 제3섹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안공간마저도 또 하나의 기성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갈 무렵 또 다른 대안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미술문화공간의 대안성을 실험하고 있는 신개념 문화공간은 복합문화공간의 확산, 소규모 공간의 활성화, 미술시장의 다각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증대 등과 같은 근간의 주목할 만한 현상들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전시공간의 진화를 매개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단연 복합문화공간의 확산이다. 복합문화공간은 이미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대세이다. 전시장을 비롯해서 아카데미, 공연장, 카페, 레스트랑, 아트숍, 연구소 등이 공존하는 모델이다. 생산과 향유를 동시에 매개하는 곳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여기에 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작품 생산과 전시와 판매를 연동하는 흐름도 강세다. 작업실과 전시장, 공연장, 소비와 휴식공간 등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막강한 자본력을 동원한 공격적인 경영 전략, 복합문화공간을 통한 이윤창출의 다각화와 안정화, 컬렉터에서 갤러리스트로의 일대 변신 등이 갤러리 공간 전략의 핵심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지금 같은 몸불리기가 시장의 변동에 따른 유연성을 떨어트릴 위험이 있다는 점, 미술문화의 종다양성을 잠식할 수 있다는 점, 전문 인력의 부족에 따른 콘텐츠의 부실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 등 많은 우려를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비평적 언술에서는 비켜나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미술시장의 활황을 배경으로 한 실재상황이라는 점이다.

소규모 공간의 활성화 또한 중요한 현상이다. 신개념 문화공간은 대규모일 수도 있지만 수규모일 때 더 빛이 난다. 소규모 문화공간의 매력이 복합문화공간의 진짜 묘미를 살릴 수도 있다. 한 공간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힘은 역시 규모보다는 마인드에서 나온다. 대규모 공간도 좋지만 작은 공간의 묘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정말 따뜻한 감동과 안식을 주는 일상 속의 미술문화공간은 규모와 무관하다. 거대한 규모로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경우보다는 특성있는 작은 공간을 꾸리는 일이 복합문화공간의 개념에 더 맞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 도심의 고궁 담장 옆에 있는 한 대안공간과 그 옆의 작은 카페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서울 홍대앞에서는 다원예술매개공간이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문화플래닛 상상마당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 제도공간의 성패여부 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 홍대앞이 번성해지자 홍대옆에 더 재미난 작은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다. 작지만 의미있는 새로운 문화생산의 동력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얘기다. 이미 자본화 한 홍대 앞은 스스로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홍대옆의 작은 문화공간의 종다양성과 공존하면서 동반생존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은 여러 장르의 공존을 매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장르 파괴나 혼융을 주선하면서 탈근대적인 문화정치를 매개하는 일. 이것이 진화하는 전시공간의 당면 과제이다.

미술시장의 다각화 양상 또한 미술계 전체의 공간 개념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미술문화공간의 변화를 주도하는 흐름 가운데 하나가 한 단계 진화한 공간 개념으로 진화하는 커머셜 갤러리들의 변모이다. 서울에서는 강북에서 강남으로의 중심이동 추세가 완연하다. 청담동의 한 빌딩으로 유수의 갤러리와 옥션 회사들이 동거에 들어가거나 강북 화랑이 강남에 분점을 내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공공연하게 새로운 힘의 구심으로 언급되고 있다. 전통문화의 외피를 두른 채 문화적 포퓰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인사동에 비해서 호젓하게 미술문화의 매니아들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종다양성의 이치를 거스르며 동종교배를 거듭할수록 건강한 흐름을 상실할 것이라는 문화생태적 비판이 교차하고 있다. 부산의 경우에도 해운대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옥션과 갤러리가 대형공간을 새로 여는 추세다. 천혜의 공간 조건과 신생공간의 장점을 안고 영남동 문화벨트의 허브로 떠오르고 있지만, 미술문화의 저변이 약한 상황에서 소수의 고공행진이 미칠 한계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탄탄한 미술시장을 가진 대구에서도 신생 공간의 등장과 옥션과 같은 시장의 다각화 추세가 완연하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미술문화공간을 향유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문화생산을 매개하는 기관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공기관의 문화정치도 예술생산을 담보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광역지자체와 기초단체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문화예술정책을 펴고 있다. 충북 청주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하이브는 대규모 복합문화체험장 속에 창작스튜디오를 만들어 젊은 작가들의 작업 공간과 더불어 새로운 소통의 채널을 만들었다. 청주시는 또한 지자체로서는 최초로 독자적인 미술창작스튜디오를 만들어 운영을 본격화하고 있다. 쌈지와 영은 등과 같은 사설 기관으로부터 출발해서 창동과 고양의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로 이어진 레지던시 공간은 서울과 광주 등의 시립미술관이 가세하면서 궤도에 올랐다. 장흥에 들어선 대규모 작업실 단지는 전시공간 일변도의 흐름을 깨고 새로운 생산과 매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한 대도시에서 베이징의 따산즈를 벤치마킹하는 대규모 미술문화공간을 준비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도심의 유휴공간을 활성화하여 예술의 생산과 향유를 매개하고자 하는 이 프로젝트는 수만평 규모의 대형 건물에 수백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본격적인 공간활성화 개념의 문화정책사업을 펼칠 예정이서 그 향배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3.
복합문화공간 및 소규모 지향, 미술시장의 팽창,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증대 등과 같이 신개념 문화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비평적 의미를 생산해 내고 있다. 담론생산 기능의 강화, 의제 특성성의 발견, 작업실 담론의 활성화, 근대적 공간분할 개념을 넘어선 탈분화 개념 등이 그것이다. 전시공간은 물질기반의 미학적 소통의 공간에서 담론생산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전처럼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화이트 큐브를 지향하는 공간은 갤러리 공간들의 변함없는 추세이긴 하지만, 다수의 공간들이 기성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틀에 박힌 사각공간을 고집하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창의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외형상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신개념 공간들은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관람객들에게 감성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물질기반의 시각 정보 소통 공간일 뿐만이 아니라 예술 생산과 매개, 나아가 향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담론을 유포하고 토론하며 격렬하게 논쟁하는 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들 공간은 아카데미를 열고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며 온라인 공간을 활성화하는 등 공간의 개념과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하고 있다. 정보와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은 미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전시공간 개념까지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신개념 문화공간을 추동한 또 하나의 모티프는 장소 특정성을 넘어서는 의제 특정성의 발견에 있다. 광주에서는 대인시장 인근의 창고 공간을 개조해서 새로운 개념의 미술문화공간을 여는 일이 진행 중이다. 광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와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이 공간은 인근 시장을 중심으로 도시공간 자체를 대상으로 문화생산에 직접 개입하고 참여하는 장소특정적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인천의 스페이스 빔 또한 유휴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공간을 옮기면서 새로운 문화생산 기지로 상승무드를 타고 있다. 안양의 대안공간 스톤앤워터는 대안공간들 가운데서도 해당 지역의 장소특정성(site specific) 뿐만 아니라 의제특정성(issue specific)을 살린 대표적인 공간으로 손꼽힌다. 해당 지역의 생생한 이슈를 발굴하고 예술적 실천의 목표로 설정하며 예술생산과 매개, 그리고 향유의 과정을 공유해 나가는 과정은 진화하는 미술문화생산이다.

안산의 ‘국경없는 마을’에 위치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는 경기문화재단의 공간재생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발했다. 이 공간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이곳의 장소특정성을 의제특정성으로 확장해서 주변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과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신개념 문화공간은 단일한 건축물로부터 벗어나 마을 전체와 동행하기도 한다. 공간의 맥락을 읽고 장소성에 기반한 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뻔한 공간이 아니라 지역성과 역사성, 장소성을 십분 고려한 건축과 배치, 구조 등이 동반해야 가능하다. 역동적인 예술창작과 문화적 종다양성이 존재하는 마을에는 작은 규모이지만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특성을 갖춘 작은 공간들이 많이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시장과 공연장, 도서관, 방송국 등이 공존했던 경기도 평택의 작은 마을 대추리의 문화공간들도 마을과 호흡하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작업실 담론의 활성화 또한 신개념 문화공간을 견인하는 중요한 모티프이다. 수년전부터 담론 수준에서 꾸준히 대안을 모색해오던 작업실에 관한 논의가 실질적인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작업실 담론의 여파는 전시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던 미술문화공간의 개념을 크게 뒤바꿔 놓고 있다. 최근의 작업실 논의는 유럽의 스쾃운동을 나름대로 벤치마킹하고 있다. 예술의 탈장르화 경향이 뚜렷한 프랑스의 경우 매우 급진적인 형태의 공간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는 수십개의 점거 아틀리에가 있는 도시이다. 빈 공간을 접수해서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로베르네집이나 알테나시옹과 같은 공간은 각종 장르의 예술가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들 공간에서는 예술창작과 향유가 공존한다. 유럽 미술관들의 멋들어진 새 건축 또는 재건축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듬고 꾸며도 점거 아틀리에의 역동성만큼은 못하다. 우리에게 점거를 관용할 만한 여유가 아직 없다는 게 아쉽지만, 유휴 공간 재활용 논의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예술점거는 실질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지만 작업실이라는 공간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성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점거아틀리에 논의는 작업실 담론에 따끈따끈한 논점을 제공했다. 스쾃운동이 공론화 하면서 미술문화를 매개하는 공간 개념이 전시장 일변도에서 미술문화의 생산지인 작업실 영역으로까지 확산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스쾃 운동은 작업실이 폐쇄적인 작품 생산의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향유와 담론 생산 공간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목동예술인회관 점거 퍼포먼스에 이어서 서울 대학로의 문화예술회관 점거로 이어진 일련의 행보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어 있던 전시장 공간의 정치학을 유동적인 탈공간의 정치학으로 전환시키는 인식의 전환을 매개했다. ‘오아시스 동숭동 720 프로젝트’는 움직이는 전시라는 개념의 실험으로서 짧은 기간동안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긴 여운을 남겼다. 그것은 백화점 쇼윈도의 상품 같은 예술작품의 운명에 짙게 드리운 암운을 걷어내려는 시도이며,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일대혼란을 통해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고자하는 행동주의 실험이었다.

근대적인 공간분할 개념을 넘어선 탈분화 개념은 신개념 문화공간의 핵심적인 논점이다. 분화는 근대성을 실현한 중심 개념이다. 근대사회는 개념과 실재 모두에 있어 체계적인 영역분할을 통해서 합리성을 획득했다. 미술문화공간 또한 예외없이 근대적인 영역분할 개념으로부터 파생한 공간이다. 미술이라는 예술제도 자체가 독자적인 영역으로 성립하면서 여타의 예술 장르들과 분화했던 상황은 공간 개념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술의 처소를 건축이나 도시공간에 두었던 상황으로부터 이탈해서 독자적인 처소를 발견한 것. 바로 그것이 미술문화공간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근간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대목 중의 하나가 미술문화공간을 공론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의 태동은 문화향유의 공화주의에 있다. 공공의 이름으로 예술생산을 매개하고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미술관과 같은 미술문화공간을 잉태했다.

앞서 언급한 현상들은 근대적인 문화공간이 탈근대적인 개념의 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복합문화공간이나 소규모 공간의 활성화, 미술시장의 다각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증대 등과 같은 현상은 탈근대 개념과 직접적으로 조우한다. 단일한 장르나 공간의 고립과 자폐로부터 벗어나 다차원적인 문화생산을 매개한다는 점, 이에 따른 자본의 이윤창출 방식도 단일성으로부터 복합성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 예술생산을 개별 예술가들의 것으로 방기하지 않고 적극적인 교류와 새로운 문화생산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 등 이 모든 것들이 단일한 것으로부터 다차원적인 것으로, 자족적인 것으로부터 상호적인 것으로, 닫힌 것으로부터 열린 것으로, 분화로부터 탈분화로 전환하려고하는 탈근대의 맥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탈근대적인 맥락의 통합의 정치학은 문화공간의 변화를 읽어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장르 혼융과 같은 대외적인 수준의 통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술문화 내부에서도 통합의 맥락은 마찬가지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 생산과 향유를 분할하는 공간 배치, 생활공간과 예술향유공간의 엄격한 구분, 고급예술과 하위문화를 둘러싼 계층 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 동시대와 가까운 미래의 일이다.

4.
여타의 모든 제도나 관행과 마찬가지로 신개념 문화공간은 완성태가 아닌 가능태로 존재한다. 신개념 문화공간은 한국사회가 인정하고 있는 기성화한 제도공간이 아니라 이제 막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 태동하는 단계에 있거나 지속적으로 변화발전하는 진화의 과정에 놓여있다. 따라서 미술관과 같이 근대적 합리성에 입각해서 나름의 체계를 갖춰나가야 하는 보수적인 기관과는 다른 범주영역에 존재한다. 더욱이 한국사회와 같이 미술관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라면 더욱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근대적인 개념의 미술관 문화를 성립하는 데 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선형적이지는 않다. 특히 식민지와 압축성장과 같은 독특한 배경을 가진 한국사회의 미술관문화는 매우 특수한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신개념 문화공간의 열린 가능성을 신중하게 살펴서 미술관이라고 하는 노회한 제도공간이 한 걸음 진화하는 데 논의의 초점을 모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한다.

신개념 문화공간의 여러 현상들에 비추어 봤을 때 한국의 미술관은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소규모 문화공간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공미술관을 비롯해서 다수의 사립미술관이 소규모의 특성화한 미술관 문화를 풀뿌리문화의 수준에서 정상적인 미술관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다. 근대적 개념의 미술문화는 상당부분 미술작품이라는 물건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그 효용성은 점점 한계에 달하거나 아니면 기형적으로 왜곡되고 있다. 나날이 팽창하고 있는 미술시장의 기능과 차별화하며 시민사회에 미술문화를 뿌리내리려면 미술관의 지위와 역할은 지금과 달라야 한다. 예술작품의 수집과 보존, 연구, 전시, 교육 등과 같은 전통적인 미술관 개념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생산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검토해야 한다.

나아가 미술관 제도는 탈근대적인 현상을 목도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 기능을 재검토할 수 있다. 미술현상에 후행하는 기구인 미술관의 보수성 또는 후진성을 넘어 보다 전향적인 의미에서의 담론생산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특정성을 넘어서 의제특정성을 획득하는 수준에서 동시대를 호흡하며 순발력 있는 문화생산을 수행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국가 수준과 국제적 수준에서의 교류와 연대가 중요한 만큼 지역 수준의 교류와 연대를 통한 상호지역주의를 개발견하는 일도 필요하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문화적 지역성을 토대로 상호지역성의 관점을 만들어서 수평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 전지구화나 국가(민족)주의와 같이 극단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가 지금가지의 관심사였다면 앞으로는 지역과 지역의 교류와 연대를 통해서 그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전지구화와 국가 사이의 길항작용은 각 개체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국제적인 것(the international)으로부터 상호지역적인 것(the interlocal)로의 전환을 야기한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근대성을 획득하기 위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면서 동시에 탈근대 개념을 두루 관통하는 새로운 미술관 개념과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김준기(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2008년 5월 17일 한국큐레이터협회 세미나 발제문 (
월간미술 2008년 4월호 기고문인 <탈근대 문화정치의 전초기지로 진화하는 미술문화공간>을 세미나 주제에 맞게 고쳐쓴 것임)


부산항으로 돌아오세요

artpd clip | 2008/05/28 15:21


사용자 삽입 이미지



coming soon : 돌아와요 부산항에

artpd clip | 2008/05/22 13:43


사용자 삽입 이미지

Art in Busan 2008 : 돌아와요 부산항에

전시  기간 : 2008.5.30(금) - 7.6(일)
전시  장소 : 부산시립미술관 전관 및 옥외공간
기획 및 진행 : 박천남, 김준기

참여 작가 : 길현수 김봉태 김진석 김호준 안정숙 안종연 오수환 이재효 이종빈 조종성 김지문 백성근 최소영(featuring:강문주,김해진,박주호) 하성봉 김범석 박병춘 배병우 사석원 유근택  김구림 김선득 김성수 박영근 박재동 승효상 이영학 최석운 한생곤  구헌주 박성훈 임국 정원일 하석원 김문경 이수영 이중재 정원연 정혜경 김태호 도영준 성동훈 양아치 안창홍 옥정호 정복수 정인건 정현도 조훈 김성계 문진욱 이은호 종합선물세트 최규식 국대호 안세권 양만기 정재철 울산대팀(김성연,하원) 부산대팀(김윤찬) 동아대팀(김현호) 신라대팀(도태근) 동의대팀(서상호) 경성대팀(이재구) (이상 63인(팀))

부산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에게 리서치 기반의 프로젝트 제안

부산 출신 또는 연고 작가 및 외부 작가들을 초대하여 부산을 다루는 예술 프로젝트 진행

부산 소재 미술대학의 교수 학생 공동프로젝트 진행

부산의 공간, 삶, 장소성, 역사성, 도시, 생태를 다루는 전시


예술행동으로서의 세운상가 도큐먼트

critic & column | 2008/05/20 22:4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술행동으로서의 세운상가 도큐먼트

도시경관 기록보존 프로젝트 시티스케이프 트러스트(cityscape trust)는 사라지는 도시를 기록한다. 도시는 고정불변의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이 프로젝트는 근현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도시경관을 기록함으로써 기억을 직조한다. 사진과 영상이라는 시각 기표를 비롯해서, 말과 글로써 도시의 구석구석을 훑어 다양한 예술적 기표를 생산해내는 일이 이 프로젝트가 표방한 기록의 전모이다. 이 프로젝트가 여느 기록과 차별화 하는 것은 도시의 경관을 외형적인 구조물의 그것으로 보지 않고, 그 구조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구조물은 사라져도 사람들의 삶을 사라지지 않는다. 나아가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도 사람들의 기억은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구조에 대한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삶에 대한 기억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바라보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보는 혜안을 열어준다.

세운상가 도큐먼트가 얻고자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담보하는 새로운 담론 생성이다. 그것은 세운상가의 과거와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맥락에서 재발견하는 일이다. 서울 근대화 과정과 영욕을 함께한 세운상가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일제말기에 조선총독부가 만든 널찍한 공지가 세운상가 필지의 첫출발이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들어선 판자촌과 사창가 시기를 거쳐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와 만난 것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목격해온 세운상가의 짧은 역사이다. 김수근의 건축 프로젝트는 박정희의 시대정신을 실현하기에 충분히 야심만만한 것이다. 서울의 도로체계에 남북축을 만들고, 그와 동시에 종묘에서 남산에 이르는 녹지축을 만들고자 했지만, 결과는 근대를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의 행렬이었다. 세운상가는 서울의 최고의 주거지와 상가로 자리잡은 후에 점점 퇴락했다. 청계천 복원공사에 따른 후폭풍은 세운상가의 운명을 한 번 더 뒤바꿔 놓았다. 더 이상 주거지와 상가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개발의 압력이 안팎에서 밀려왔다.

서울이라는 거대 구조에 대한 도시민속지를 써온 시티스케이프 트러스트가 세운상가에 주목한 것은 근현대사를 응축하고 있는 도심공간에 대한 명상적 성찰이자 예술행동주의적인 개입과 참여이다. 그것은 이 도시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망각과 개발의 악순환에 제동을 거는 일이다. 개발 논리를 앞세운 자본의 힘은 기억보다는 망각을 갈망한다. 그 프로젝트는 그러한 힘의 논리를 거스르고자하는 예술행동이다. 예술행동은 예술영역과 실재(생활)영역간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전략이다. 20세기 근대의 예술이 철저하게 실재영역과의 결별한 예술적 기표체계 안에 갇힌 언어게임의 영역이었다면, 21세기 탈근대의 예술은 실재영역과 예술의 적극적인 만남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진과 영상과 구두언어와 문자언어, 사회적 시공간을 횡단하는 몸짓 등 그 모든 예술적인 행위들이 세운상가라는 실재의 영역을 관통하면서 다양한 콘텐츠들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예술적 행동이며 동시에 행동적인 예술이다.

경관을 기록하는 일은 삶을 기록하는 일과 동행한다. 이 프로젝트가 예술적인 성찰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도시라는 거대한 구조와 그 속에 존재하는 개인의 삶을 동시와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 막강한 권력체계의 힘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구조는 그 속에 포함된 개인을 조작하고 억압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구조 속 개인(들)은 구조의 힘에 균열을 내며 파행한다. 오늘날의 예술, 특히 예술행동과 같은 탈근대적 맥락의 예술은 구조의 힘에 맞서는 상징투쟁이다. 예술행동이 예술로 성립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운동과 동행하면서도 상징투쟁을 벌인다는 데 있다. 예술행동은 예술적인 참여와 개입을 전제로 실재영역에 뛰어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예술적인 실천으로서의 범주영역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예술적인 실천으로 성립한다. 세운상가 도큐먼트가 예술적인 실천을 통해서 실재영역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가늠해 봄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예술을 가늠하는 중요한 가늠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문화우리가 진행한 <시티스케이프 트러스트 : 세운상가 도큐먼트> 자료집 서문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7 송혜수 : 평양출신 피란민으로 부산에 정착한 평생의 재야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5/20 09:40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7 송혜수
평양출신 피란민으로 부산에 정착한 평생의 재야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평양출신의 일본 유학파로서 한국전쟁 이후에 부산에 정착해 반평생 이상을 부산에서 살다간 화가 송혜수. 훤칠한 키에 백발의 꽁지머리와 빨간 양말로 일관했던 외형처럼 송혜수는 평생을 야인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그의 삶은 성장기부터 파란만장한 이주의 연속이었다. 1913년에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도쿄, 평양, 다시 도쿄, 만주, 서울 등으로 옮겨 다니며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평양에서 태어나 소학교와 서당, 보통학교, 중학교 등을 다니며 당시의 혼란스러운 교육체계를 겪은 후 일본에 건너가 일년 동안 독학하다가 돌아왔다. 이후 서울에서 일하면서 독학하던 그는 20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진관 일을 하면서 고학으로 도쿄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유학시기에 그는 재동경미술협회와 백우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부터 당시 젊은 미술인들이 모여 활동했던 독립전에 출품했다. 이후 자유전과 창작가협회전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젊은 작가들의 활동공간을 만들었는데, 송혜수는 이 시기 매우 왕성하게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1943년에는 자유전에서 본상을 수상하여 평론가로부터 ‘이중섭과 함께 민족성이 강한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독립전은 당시 일본의 주류미술제도인 문전(文展)에 반기를 들고 나온 재야미술인들의 활동공간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소나 말을 주제로 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통해서 일제시대의 절망 속에서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는 암시와 상징을 담기도 했다.

송혜수는 일본 유학 시절에 여러 작가들과 교류했다. 1936년 당시 쓰다에게서 사숙하던 송혜수는 두 살 연상의 이중섭을 만났다. 당시 일본 유학중이던 조선의 화가 또는 화가지망생들은 조선민족이라고 하는 차이를 뚜렷한 차별로 경험했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은 일본과의 공통분모와 더불어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차별은 소수자를 만들고 소수자들의 결속을 가속화한다.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조선 화가들은 소를 많이 그렸다. 송혜수는 조선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소를 만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근대시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이 소 모티프이다. 일제시대 말기에 소를 통해서 생활상과 정서를 표현했던 화가는 이중섭 뿐만 아니라 김경이나 문학수, 진환 등 다수였다. 이러한 경향은 소나 말과 같은 동물 그림을 통해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의 주요한 운송수단이 우마차였던 점을 생각해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젊은 이중섭, 이쾌대, 진환, 최재덕, 한묵 등의 화가들은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서 1944년까지 활동하면서 민족적인 소재에 탐닉했다. 이 시기의 이중섭이 소와 여인, 소와 아이 등의 제목으로 작품을 남기는가 하면, 특히 진환은 소를 집중적으로 그려서 소를 통한 생활정서의 표현, 소를 통한 민족적 정서의 표현을 시도했다.

일제말기에 나타난 소 모티프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조선 화가들 고유의 특성으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제국주의 문화정책이 지향했던 동아시아적 가치, 다시 말해서 당시의 패권국가인 일본이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문화적 가치로 공유하고자 했던 모티프라는 시각이다. 향토색 논쟁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여러 작가들이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 속에서 민족적 정서 표현을 주요한 관심사로 삼았다는 점이다.

노동과 교통수단으로서의 소는 일제에 의해 억압받던 민족적인 정서를 표출하는 소재로 인식되었다. 송혜수는 소를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일본 수레의 말에 비해서 한국 수레의 소가 꾸준한 품성의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소 그림을 통해서 식민지 청년의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송혜수와 그의 시대 대다수 작가들이 공유했던 대목이다. 송혜수의 소는 큰 틀에서 동아시아 전체가 공유했던 정황과 더불어 민족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문제에 함께 걸쳐 있다.

일본 사람들이 황토색을 쓰지 않았던 데 비해 조선의 화가들은 향토색이라고 부르면서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김주경의 비평은 이것을 ‘로컬 컬러’라고 부른 당시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다. 송혜수는 월간미술의 동경제국미술학교 출신 작가들의 좌담에서 황토 흙바닥에서 사는 주거문화나 황토색의 소, 황토색의 제주도 갈옷 등으로 봐서 황토색과 친근한 주변 환경을 가지고 있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생각했던 황토색과는 매우 다른 색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초기작 이후 많은 작품들에서 송혜수 작품의 주된 색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로 피신해 있다가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해방공간의 서울은 김만형, 이쾌대 등의 미술동맹, 고희동의 대한미협으로 나뉘어 있었다. 송혜수는 김환기, 김병기, 장욱진, 박고성, 김영주, 남관 등과 일종의 재야파 미술가들의 써클인 50년미술협회를 결성했다. 전쟁 발발로 이 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그의 활동 반경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한국전쟁은 그를 운명적으로 부산과 만나게 했다. 1.4후퇴 때 부산에 자리잡은 그는 전란의 혼란기를 거치며 부산 작가로 자리잡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산에 머물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로서 장욱진, 한묵과 함께 종군 스케치 3인전(1951)을 열었다. 휴전 시기에 외국 기자 숙소인 내자아파트에서 열린 현역작가초대전에 출품하고, 중앙공보관 개관기념 한국 현대대표작가 초대전에 출품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는 격동하는 시대의 불안하고 참담한 시대상을 반영했다. ‘암울, 반골, 비극’ 등의 정서를 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동안 구상과 반추상을 오가며 소와 여인을 다루었다.

송혜수의 소 그림은 평생에 걸쳐 실재의 세계에서 관념의 세계로 옮겨갔다. 송혜수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평생 소와 여인을 그렸다. 자연스럽게 소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카데미즘과 차별화 한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초기에는 불상이나 말, 소, 수렵도 등을 그렸으나 이후 소와 여인으로 소재를 좁히면서 한 길을 깊게 팠다. 초기의 소 그림이 민족성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라면, 후기의 소 그림은 소라는 대상의 실재성보다는 그 대상의 골기를 파악하여 강렬한 색채와 선묘를 통해서 회화적인 맛을 찾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기작에서 말년작에 이르기까지 송혜수의 주된 색감은 단색조였다. 초기작에 비해서 후기작들은 선묘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초기작들은 자유분방한 선묘로 작가 내면의 갈등상황을 격렬하게 표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에 들어 옛것에 심취하는 탐미적 경향으로 이어졌다. 초기의 주제의식이 민족적 정서나 생활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후기의 작품들은 소와 여인의 골기를 파악하고 그것을 간략하면서도 대담한 필치의 선묘로 처리하면서 미적 탐구의 과정으로 삼은 것이다.

부산미술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재야파에 속한 그는 송혜수미술연구소를 차려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문하의 제자들이 국전에 입선과 특선하면서 그의 고단한 부산미술정착활동이 점차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충무동, 부영극장 뒤 청운장 여관 4층, 부평동, 대청동 등 송혜수미술연구소는 부산 시내 곳곳을 옮겨 다녔다. 수십년동안 그의 문하로 전준자, 김정명, 허황, 안창홍 등 수많은 제자들이 거쳐 갔다. 미술평론가 김창섭은 그의 저서 ‘미의 사제들-부산의 미술인과 그 주변’(1972)의 송혜수편에서 후진을 양성한 그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송혜수는 2005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에 그는 사재를 털어 미술상 기금을 마련했다. 살던 집을 팔아 후진에게 힘을 주는 일이 그가 부산미술계에 마지막 남긴 일이다. 그의 유지를 이어 2005년에 송혜수미술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주정이, 서상환, 차경복, 안세홍 등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평생을 풍운아로 떠돌며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으로, 화단의 주류 권력과 비켜서 살아왔던 재야화가 살았던 그가 마지막 남긴 뜻은 부산미술계의 반듯한 중진들을 독려하는 일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송혜수(宋惠秀)
1913년 평양출생으로 그곳 서당과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학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사진관 일을 하면서 고학을 했다. 이후 20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제11회 일본 동경독립미술전에 입선했으며(1941), 이듬해에 제6회 동경미술자유전에 입선했다. 1943년에는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5년 과정을 졸업했으며, 자유전의 후신인 일본동경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유학을 마치고 만주에 머물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한 그는 1950년에 50년미협을 창립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정착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양달석, 조동벽과 함께 독립작가 3인전(1959)을 열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60년전’(1967), 한국현대화가 100인전(1967)에도 출품했다. 2001년에 동다송문화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 타계했으며, 그해 송혜수미술상이 제정되었다
.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읽기 6 김남배 : 근대화단의 네트워커, 양 할아버지 김남배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5/13 01:28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읽기 6 김남배

근대화단의 네트워커, 양 할아버지 김남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남배는 차분한 성품이면서도 부산화단을 두루 꿰뚫은 네트워커였다. ‘온화하고 공손한 성품과 맑고 깨끗한 인격과 어울려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일제시대부터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일본어판 부산일보사가 주최한 공모전인 부산미술전람회에서 특선했으며, 1943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했고, 이듬해에도 같은 공모전에 입선했다. 입선작의 화제는 각각 ‘소녀’와 ‘양’이다. 언론의 기록에 따르면, 김남배는 한 살 터울의 화가인 서성찬(1907-1958)과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성찬이 정물화로 명성을 얻었다면 김남배는 양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양은 ‘미술(美術)’의 ‘미(美)’ 자를 있게 한 동물이다. ‘양(羊)’과 ‘크다(大)’를 결합해 만든 글자가 ‘미(美)’가 아니던가. 단순하게 말뜻만 가지고 풀이하자면 커다란 양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신석기사회에 들어 유목민족을 탄생시킨 양은 인류의 삶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다. 김남배는 양을 통해서 풍요와 평화와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조선화가들이 민족적인 모티프로 소를 많이 그렸던 것에 비해 김남배의 선택은 특이했다.

‘백양(白羊)’은 김남배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해방공간에서 김남배가 부산역 앞에서 운영한 다방이름도 백양이다. 백양다방은 부산지역 뿐만 아니라 경남 일대 미술가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서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카페는 부산의 근대화단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많은 전람회가 다방에서 열린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카페는 근대의 산실이다. 카페는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하는 공론의 장이었다. 카페문화를 공유한 근대인들은 그곳에서 예술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이상을 꿈꾸었다. 해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부산지역 예술가들이 새로운 꿈을 꾸던 곳이 김남배의 백양다방이다.

예술생태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예술활동을 자신의 주업으로 삼고 사람들, 즉 예술가들이 상호 인정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나온다. 전문가집단이 그들 자신의 재생산 구도를 만드는 것이 느슨한 개념이지만 강력하게 서로를 얽어매는 동인활동이다. 초기의 예술가들은 예술적 지향이 같거나 또는 처지가 비슷해서 함께 활동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동인활동을 많이 했다. 미술가들 뿐만 아니라 문학의 역사 속에서도 동인활동을 통해 함께 책을 펴내는 일이 잦았던 것처럼 동인들이 함께 전시를 여는 일이 생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근대기의 중요한 미술동인으로 손꼽히는 그룹이 부산의 네 작가가 주축이 된 춘광회이다. 1930년대 말에 결성한 이 그룹은 김남배, 서성찬, 양달석, 우신출 등을 오랫동안 동행하도록 해주었다. 이름하여 봄빛(春光)이다. 이듬해 한 차례 더 전시를 연 이들 춘광회 동인들은 해방 이후 부산의 근대화단을 일군 눈부신 주역으로 성장한다. 우신출의 구술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과 함께 경남미술회를 만든 것이 부산최초의 동인활동으로 보인다. 김남배는 경남미술회와 더불어 부산지역 미술동인 그룹으로써 매우 독보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춘광회 창립멤버로서 여느 동인들과 함께 부산지역 화단의 형성에 있어 일제시대 이후 발군의 공로를 쌓았다.

해방조국을 맞은 김남배와 그의 벗들은 격동기를 겪으며 부산의 중진 미술가로 거듭났다. 1946년에 열린 ‘3.1절기념미술전’에는 김남배를 비롯해 양달석, 서성찬, 우신출 등과 해방 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종식과 김윤민이 함께 했다. 같은 해에 열린 광복경축미전에서도 같은 작가들이 참가했다. 1947년에는 부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미술가들이 조선미술가동맹부산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미술동맹이 한국미술협회와 갈라지면서 부산지부는 한국미술협회부산지부로 고쳐 부르면서 양달석을 회장으로 뽑았다. 이해 부산역 앞 백양다방에서는 경남미술현구회가 결성되었다. 김남배는 서성찬, 우신출, 김윤민, 김원갑 등의 부산작가들과 마산의 이준, 이림, 임호, 통영의 전혁림, 그외에도 김해, 진주 등의 미술가들과 함께 협회와는 차원이 다른 전문적인 미술가그룹을 만든 것이다. 이듬해에는 ‘제1회 경남미술연구회전’을 열었다. 1950년에는 경남미술연구회를 혁토사(爀土社)로 고쳐 부르면서 사진 분야를 포괄하는 그룹으로 진화했다.

민주중보사가 주최한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1948)에 초대작가로 참가한 김남배는 심사위원으로써 41명의 젊은 작가를 미술계에 등단시키는 데 일조한다. 1950년대에 들어 김남배는 3.1절기념미술전, 혁토사 동인전이나 부산미술협회 초대전, 민주신보 초대전 등에 지속적으로 출품하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민주신보가 주최한 제1회 경남미술전(1958)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58년에 김남배는 부산미술협회 회장을 맡았다. 회원전 출품작가 수가 20여명을 헤아리던 시절, 김남배는 엘리트 미술가 집단의 네트워커로서 동분서주하며 부산지역의 미술계가 자리 잡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을 벌였을 것이다. 그해에 김남배는 절친한 벗을 먼저 보냈다. 30년대 말 이후 동인활동을 해왔던 서성찬이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듬해인 1959년에 그는 문화회관에서 ‘김남배 동양화전’이라는 뜻밖의 전시를 연다. 같은 해에 열린 ‘제40주년3.1절기념예술제’에서 그는 이윤재나 이석우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동양화부에 올린다. 같은 해의 ‘부산미술협회원전’에는 서양화부에 출품하기도 했지만 그 후 몇 년간 김남배는 서양화가가 아니라 동양화가로 살았다. 1960년 부산미술협회가 주최한 3.1절과 광복절 기념전에 출품한 김남배는 같은 해 ‘제9회 동명회화원전’ 동양화부에 출품했다. 1961년에는 ‘제10회 동명서화원작품전’에 출품한 것을 제외하면 부산미협단체전을 비롯한 주요 전시에서 김남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이듬해에도 ‘동명서화원전’과 ‘516혁명 1주년기념예술전’ 동양화부에만 출품했다. 전통회화와 서구에서 유래한 회화 사이의 구분이 엄격했던 당시 정황을 고려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남배 그림에서는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학습한 초기 부산화단의 특성과 수묵화에 심취한 그의 개성을 동시에 목격할 수 있다. 50년대에 그린 ‘풍경(돛단배)’는 절묘한 필치로 그린 전형적인 인상파 화풍이지만, 서성찬과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정물’(1959)은 날렵한 필선의 윤곽선이 돋보이는 표현주의 화풍이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공존이다. 김남배는 경쾌한 붓질로 대상의 특징을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또는 격정적으로 평면 위에 옮겨놓은 솜씨가 빼어났다. 한국의 근대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김남배는 서구를 배운 일본으로부터 서구의 그림자를 배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1950년대 말에 들어 수묵화에 심취해서 각종 전람회의 동양화부에 출품했다. 서구를 학습한 김남배는 한국의 회화전통을 결합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자 했다. 서양화와 동양화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동서양을 구분하던 화단의 출품 관행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연도 미상의 그림 ‘양’은 풀이나 나무를 몰골 필선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양은 대상을 묘사하는 윤곽선을 뚜렷하게 남기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구륵 필법에 가깝다. 1974년작 ‘어린 시절’은 검은 윤곽선으로 인물을 묘사하고 그 안쪽을 강한 원색으로 메우고 있어 마치 채색목판화를 보는 듯하다. 수묵화를 볼 수 없어 김남배 그림의 회화양식 전모에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김남배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었다는 점이다.

1962년 김남배는 하와이로 떠났다. 그 이후 김남배의 이름은 공식적인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일제시대 말기부터 부산작가로서 공모전에 등장하고, 미술동인을 꾸렸으며, 해방정국 부산화단의 주역으로써 새로운 미술동인을 꾸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전후 혼란기에 부산미협회장을 맡아서 숨은 공로자로 부산화단을 견인해왔던 그가 사라진 것이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바꿔가며 팍팍한 현실을 넘어서고자했던 20세기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는 근대기 부산화단의 주역 김남배에게도 걸쳐있다.

사료에 등장하는 전람회 참가자 명단은 여타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미국행을 선택한 시기가 5.16 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의 혼란기였다는 점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 식민지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에 이어 국가재건의 시기까지 지난한 시대를 거쳐왔던 김남배의 삶은 군부독재의 암울한 터널이 길게 드리우기 시작한 길목에서 새로운 길을 맞는다. 하와이에서 작품활동을 계속 했다고는 하나, 조국을 등지고 이국에서 새 삶을 꾸린 김남배의 행적과 작품세계는 아득히 멀리 있다.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어떻게 유화와 수묵화를 오갔는지, 왜 부산을 등지고 하와이로 떠났는지. 우리 부산미술계가 더 늦기 전에 챙겨야할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김남배(金南培, 1908-1980(?))
경남 김해 출생으로 부산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특선에 올랐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1943년과 ’44년에 입선했다. 부산지역의 동인그룹으로 잘 알려진 춘광회의 창립멤버로서 양달석, 우신출, 서성찬 등과 활동하면서 부산지역의 근대화단 형성에 역할을 했다. 이후 경남미술연구회, 혁토사, 토벽 등의 동인활동을 했다. 해방 후 부산역 인근에 백양다방을 운영하면서 부산과 경남 지역의 미술가 네트워커 역할을 했으며 부산미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유화와 수묵화를 병행한 독창적인 화법으로 양 그림을 비롯해 다수의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를 남겼다. 1962년에 하와이로 이민한 이후 꾸준히 활동하다가 1980년경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봄 김구 모녀 : 구정화 & 김은교 080427

people | 2008/05/12 18:38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년 봄, 김구 모녀.
김구와 김구 엄마는 어느새 머리 크기가 비슷해졌다.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5 한상돈 : 한국전쟁이 만든 부산작가, 최고령원로화가의 신화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5/07 17: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5 한상돈


한국전쟁이 만든 부산작가, 최고령 원로화가의 신화



감시의 시선과 공존하는 조선방직 여공들의 휴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여공이 잠시의 휴식을 취하며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습을 포착한 한상돈의 대표작 <방직여공>(1954). 밥을 먹고 난 후 턱을 괸 채 보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쉬고 있는 두 여성의 모습이다. 한상돈 그림 가운데 드물게 특정한 상황의 인물을 묘사한 그림이다. 한국전쟁 직후 부산의 일상을 담은 그림이라는 점. 특히 회화적 표현으로 노동현장을 포착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이 그림은 여공들의 망중한을 그리기 위해 전형적인 구도와 설정을 취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망중한의 서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피난민 화가로서 조선방직에 취직한 한상돈은 편안한 휴식을 주문받고 그런 장면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결코 평온하지 않다. 칙칙한 작업복에 흰색 두건을 두른 여공들 뒤편에서 뒷짐을 지고 서있는 남성을 주목해 보라. 여공들은 식사시간에도 이 남성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 휴식과 감시의 공존이다. 한상돈이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이 남성의 존재는 당시 조선방직의 현실을 집약하고 있다. 부산에서 조선방직은 매우 각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후대들에게는 조방앞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조선방직은 1917년 설립 이래 부산의 근대 경제를 지탱해온 중요한 축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위상 아래는 20세기 한국 여성들의 질곡을 대변하는 여공들의 삶이 깔려있다. 여느 노동현장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조선방직 공장은 새벽부터 한밤까지 살인적인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피와 땀을 짜는 살인적인 공간이었다. 여공들은 가난과 전쟁을 거치며 곤궁해진 삶을 벗어나고자 이주한 농촌출신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제시대 이래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지난한 역사의 단면이다. 한상돈이 이 그림을 그리기 두 해전인 1952년에 조선방직 여성노동자 투쟁으로 잘 알려진 여공들의 파업이 있었다. 해방 이후 조선방직은 공공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를 꺾고 민간기업으로 돌려버렸다.

격변의 사회상과 동행하는 예술

권력의 폭압이 휩쓸고 간 후 여공들의 노동과 휴식은 여전히 하루하루 이어지고 있었다. 그림 속 여공들은 한가로운 포즈를 취다. 그러나 결코 밝고 경쾌하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다. 이 그림에 흐르는 음울함은 그러나 분노나 비극적 정서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뒷짐 진 남성은 이 그림을 해석학적 지평으로 유인하는 알레고리이다. 감시원과 공존하는 여공들의 휴식은 그 이면에 한국근대여성의 지난한 삶의 그림자 드리우고 있다. 이 그림이 전쟁 직후 조선방직의 지난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온하고 나른한 일상으로만 읽히지는 않는 이유이다.

1966년 작 <적기 채석장>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적기는 이중섭 가족과 함께 피란 직후 머물렀던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그곳 채석장에 앉아서 정으로 돌을 쪼고 있는 인물과 어깨에 돌을 들고 나르고 있는 두 인물을 포착한 그림이다. 여공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노래하며 살다간 한상돈이라는 전원화가가 그린 그림 치고는 매우 이례적인 도상과 장면이다. 한상돈이 방직공장과 채석장에서 그곳의 전형적인 인물을 회화작품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유학까지 마친 원산 유지의 아들 한상돈. 엘리트 미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처한 처참한 현실은 사회의 관행에서 이탈하려는 예술가의 본능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년의 한상돈은 피난민 신분으로 부산에 정착하며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어렵사리 얻은 조선방직 일자리로 그나마 여유를 찾았지만 과연 그 시절의 한상돈에게 목가적인 전원풍경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격변하는 사회상과 동행하는 예술가 한상돈의 시선은 늘 삶 속에 있다. 그가 100% 전원화가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전쟁이 만든 부산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상돈을 부산 작가로 만든 건 한국전쟁이다. 한상돈은 원산에서 자랐지만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가 정착했다. 그는 구한말에 원래 수원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북청에서 소학교를 1년 다니다가 원산보통학교로 전학하면서 정착한 후 성장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원산상업학교를 나온 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다가 25세에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해서 29세에 졸업했다. 소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의과대학에 진학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미대에 진학했을 정도로 예술가의 길을 갈망했다. 졸업 후 1935년과 36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한상돈은 원산에서 결혼 후 미술교사 일을 했다.

해방 이후 한상돈의 작가 생활은 다소간 특수상황에 놓여있었다. 미술평론가 강선학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들은 남과 북의 서로 다른 미술 시스템을 확인하게 한다. 그는 조선미술동맹의 멤버로서 예술가 신분증을 발급 받아서 기차여행을 하거나 물감을 살 때 무료로 했다고 한다. 미술동맹은 그에게 주문을 내렸다. 특정 장소에 가서 어느 정도 크기의 그림을 그리라는 구체적인 내용의 주문이었다. 가령 이중섭과 동행해서 평북 신천의 노동자 휴양지에 가서 두달 동안 50호 두장씩을 그리는 식이었다. 이중섭, 한묵과 함께 금강산에 가서 농부가 밭갈이하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주문은 예술가를 지치게 만든다. 한상돈은 이중섭과 함께 남한을 선택했다.

1951년 가을 이중섭의 가족과 함께 피란 내려온 그는 일거리가 없어 소일하다가 동아극장 영화간판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피란지 부산에서 한상돈은 안정된 원산 생활과는 정반대의 곤궁한 삶을 살아야했다. 양달석 우신출 임호 김남배 서성찬 송혜수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에술가로서의 삶은 막막했다. 이후 경남도청에 근무하던 우신출의 주선으로 차트 도안 일을 하기도 했다. 조선방직이라는 직장은 한상돈이 부산에 정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돼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문 받지 않는 그림 그리기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한국 최고령 원로화가의 신화와 근대성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잠시 대학강단에 섰던 한상돈은 1970년대 중반부터 95세까지 한국 최고령 화가의 신화를 남기며 작업에 매진했다. 1950년대에 그린 실경 풍경화 <에덴공원>이나 <해운대> 같은 작품들은 이 작가 특유의 화풍이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밝고 경쾌한 색감과 빠른 붓질로 대상의 윤곽과 색채를 마감한 후 물감이 마르기 전에 나이프로 찍어 발라 마무리하는 한상돈의 그림 그리는 법이 보인다. 일찌감치 한상돈의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풍경(송정)>이나 <부산항> 같은 ‘70년대 풍경화들은 기억을 자극한다. 해안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송정 해변과 작가 자신이 피란지 부산에 처음 도착한 부산항 5부두가 보이는 풍경화는 시간을 고정한다. 회화란 기억을 물질화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사라진 과거의 풍경은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회화라는 기술은 그 기억을 가시적인 형태의 물질로 만드는 일이다. <남해사장>(1981)은 모래사장과 바다와 하늘이 삼분된 안정적인 구도의 전형적인 풍경화다. 미색계열의 밝은 색채도 색채지만 특히 나이프에 물감을 찍어서 바르는 기법으로 회화적인 맛이 짙게 묻어나는 질감을 구사한 한상돈의 전형성이 잘 보이다. 그는 풍경과 정물을 통해 근대를 완성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아직도 서구의 근대를 바라보고 있다. 서구의 19세기의 대가들을 이른바 블록버스터 전시를 통해서 만나는 데 열광하며 아직도 서구지향의 열병을 앓고 있다. 한상돈과 같은 화가가 그려놓은 부산과 부산인근의 풍경화. 기명절지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유와 서정을 두루 갖춘 정물화. 우리 주면의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 그 많은 유산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21세기의 우리는 여전히 서구를 갈망하고 있다. 서구로부터 근대성을 발견하고 음미해온 우리에게 이제 또 다른 시각으로 근대를 재발견하는 일이 남겨져있다. 격변의 세월을 관통하며 지난한 삶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은 한상돈의 근대 유산들을 차분히 살펴볼 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상돈(韓相敦, 1906-2002)


수원출생으로 원산에서 성장했다. 원산상업학교를 나온 후 독학으로 그림을 하다가 1930년 일본미술학교 회화과를 나온 후 백일회, 춘양회전에 참여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입선했다. 귀국해서 원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 정착했다. 조선방직에 근무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작업을 했으며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이후 평생 전업 작가로서 그림을 그렸다. 부산시전 심사위원, 부산대, 동아대 강사, 부산미협 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미술 50년전>을 비롯한 다수의 기획전에 출품했다. 부산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말년까지 당시 최고령화가로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다.

GIM's Public Art Story 4 : 옥봉환, 여의도공원, 세종대왕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5/06 23:10



GIM's Public Art Story 4 : 옥봉환, 여의도공원,
세종대왕동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때 비행장이었고, 이후 516광장이었다가, 지금은 여의도생태공원인 그곳. 세종대왕이 거기에 계시다. 예술은 시대정신이나 사회적 합의를 뒤바침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가운데 하나라는 점.
세종과 이순신이 교차한 세종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여의도에서 대왕세종을 만나는 일이 꼭 유쾌하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동영상 보러 스토리큐빅쩜씨오쩜케이알 바로가기
=>
http://www.storycubic.co.kr/cubic?cur_page=1&contents_id=209


시각 서사는 충분히 서사적인가 : 광시미 <봄날은 간다> 리뷰

critic & column | 2008/05/04 17:06


시각 서사는 충분히 서사적인가

서사의 과잉을 우려했더랬다. ‘봄날은 간다’라는 주제 자체가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서사들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이 전시 타이틀과 잘 맞을 법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센 작가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의외로 각각의 작품들은 유니크한 서사 아래 줄을 서기 보다는 각자 다른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시각예술 기획자는 어렵다. 아무리 강력한 서사체계를 내세워 작가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해도 작가들은 각자 수십년 동안 쌓아온 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내뱉곤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그래서 큐레이터는 더 할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를 말한다’는 타이틀로 여럿이 모여 뮤지움 토크를 했더랬다. 부시미 큐가 광시미에 가서 토론 사회를 본 색다른 자리였다. 토론에 참여한 나는 패널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시각 서사는 충분히 서사적인가? ‘봄날은 간다’라는 문장구조로부터 시각예술에 있어 서사성이라는 문제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와 큐레이터, 문학평론가, 기자 등으로 구성된 토론자들의 말은 교묘하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시각언어의 서사성을 이 전시에 빗대어 끄집어내는 일이 녹록찮았다. 문자언어에 비해서 시각언어의 언어성에 우리 모두가 낯설기 때문이었다.

토론 참가자의 생각은 분분했다. 봄날은 간다는 문장의 의미 맥락에서 80년 광주를 떠올릴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했지만, 그것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하는 발언도 이어졌다. 그러나 봄날 물오른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따라 광주의 트라우마는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부산이나 서울에서 봄을 이야기했을 때와 광주에서 봄을 이야기했을 때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역시 광주는 한국현대사에 있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도시임이 분명하다. 이 전시가 그러한 기억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넌지시 봄날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 기대반 우려반의 시선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이 전시는 노장들과 신진들이 ‘봄날은 간다’라는 서사 아래 한 자리 모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 또한 대중들에게 다가서고자 했다는 점 또한 봄이라는 간명한 테마 아래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웠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긍적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남는 문제는 있다. 과연 우리가 시각예술의 언어들이 서사적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어떤 경로로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일 텐데, 그렇다면 전시의 독해자들이 어느 수준에서 동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언어들인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출품작들은 관람동선을 따라 주도면밀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읽혀도 좋고 안 읽혀도 좋은 것이었다. 시각예술의 언어들은 소설에서 문장구조를 따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일목요연하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산만하게 흩어진 텍스트들이 개별적인 이미지들로 접수된다. 그 이미지들은 전시장 현장에서 즉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문득 산발적인 이야기들로 편집 당한다. 물론 관람동선을 따라 기승전결식의 이야기를 배치한 배려는 꼼꼼하고 섬세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시각언어란 어떤 경로로 작동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그 어떤 해명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이남과 권기수와 이병호 같은 젊은 작가들의 이미지는 봄을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과녁을 비켜나가는 시각언어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황록의 유연한 곡선은 시적이어서 좋았다. 차규선의 그림은 명쾌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꽃이라는 사물을 그려놓은 그림일 뿐인데, 그 그림의 회화적 매력 그 자체가 오랫동안 시선을 끌고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점은 역시 회화적 표현이 갖는 독특한 소통구조 때문일 것이다. 찬장 속에 피어있는 나무꽃 가지를 설치한 윤익의 감성은 고즈넉한 봄날의 전형 그 자체였다. 박영숙과 안현숙, 이순종 같은 누님들의 봄 이야기는 봄의 이미지를 도입하지 않고도 ‘봄날은 간다’라고 했을 때의 그 처연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안창홍의 세기 또한 동선의 끝자락에서 죽음보다 더 찬란한 꽃을 위한 향연의 새로운 버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전시의 핵심 개념은 청춘의 기억이다. 기획자 변큐의 ‘어느 맑은 봄날을 위하여’는 청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이 전시 최대의 소구대상으로 선정한 관람객층을 문학적으로 기술한 텍스트이다. ‘봄날은 간다’라는 문장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서사에 비해서 이 문장을 타이틀로 내세운 전시의 출품작들이 얼마만큼 봄날은 간다라는 서사에 근접하고 있는지는 단정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스무명의 작품들 가운데 그 누구도 봄날은 간다고 말하는 작가는 없다. 물론 전시의 타이틀이 지시하는 문장과 참여작품들 사이의 관계와 지시와 함의 관계 사이에서 매우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각예술 작품전시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출품작들의 내러티브가 서로 다른 출구를 바라보고 수군거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보였다. 이것이 시각 서사의 분명한 제 모습이 아니겠는가.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아트인컬쳐 2008년 5월호 기고문.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