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s Public Art Story 3 : 여의도 공원, 국기봉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4/30 21:40



GIM's Public Art Story 3 : 여의도 공원, 국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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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광장을 지배하고 있는 50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둥이다.
국가공동체의 심볼인 태극기를 굳건히 떠바치고 있는
모뉴멘털한 이 기둥을 통해서
상징조형이 광장을 지배하는 방식을 새삼 들여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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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orycubic.co.kr/cubic?contents_id=205


GIM's Public Art Story 2 : 일신 여의도 91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4/30 21:20




GIM's Public Art Story 2 : 스타치올리의 거대한 곡선 "일신 여의도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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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 껌딱지 조각이 아니라 건물의 이미지를 선도하는 조각의 힘!
스타치올리의 대작 일신 여의도 91은 말 그대로 모뉴멘탈하다.
지역주민인 국민일보 미술담당기자 이광형부장님의 찬조출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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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 Public Art Story 1 : 여의도 증권가, 물고기

critic & column/GIM's Public Art Story | 2008/04/30 20:43


서울 도심의 공공미술 작품들을 찾아 다니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는 코너를 시작했다.
"스토리큐빅쩜씨오쩜케이알"이라는 동영상 사이트에 매주 한편씩 동영상을 올린다. 화면빨, 말빨 등 신경 써야 할 것인 많은데, 지나치게 용감하게 시작해버렸다.



GIM's Public Art Story 1 : 여의도 증권가,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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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돈의 거리 한복판에 컬러풀한 물고기 한마리가 펄쩍 뛰고 있다.
미술작품이란 무언가를 지시하는 언어가 아님이 분명하다.

'거기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는 매우 간령한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데 있어
다양한 형태와 색채, 질료, 빛, 동선, 구도, 흐름 등 복잡하게 얽힌 비주얼 내러티브를 구사함으로써 '거기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는 사실을 재현하거나 지시하는 단계를 넘어선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시각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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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내셔널리즘 도래..글로벌화 역풍 < WSJ >

artpd clip | 2008/04/29 08:35



"글로벌화로 내달리던 세계가

       새로운 내셔널리즘(민족주의.국가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일성이다. 금융자본과 인터넷 등 평평한 글로벌리즘의 시대를 치달리던 세계가 새로운 민족주의, 새로운 국가주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8/04/29/0601090100AKR20080428218300072.HTML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4 박생광 : 동양화라는 허구를 넘어 채색의 전통을 재발견한 거장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4/2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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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4 박생광

동양화라는 허구를 넘어 채색의 전통을 재발견한 거장

세기의 강을 건너며 역사를 만든 예술가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박생광의 삶은 일본의 창으로 근대를 학습한 문화식민지 한국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본에서 학습한 그가 평생의 업으로 삼은 것은 결국  민족미학이었다. 노년까지 그를 따라다녔던 일본 화풍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인생 전체에 걸쳐 일본의 그림자를 넘어서기 위해 자기자신과 투쟁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재야화가로 살아온 그는 말년에 채색화 전통을 재발견하여 식민의 그림자를 떨치고 20세기 한국화단의 거장으로 우뚝 섰다.

일본 교토에서 대학을 나온 박생광은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미술원전 등에 출품해서 여러 차례 입선했다. 1936년에 일본 도쿄 긴자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해방이후 진주에 자리잡은 박생광은 부산을 비롯한 경남권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과도 꾸준히 교류했다. 1968년에는 진주를 떠나 서울에 정착하면서 홍익대에 출강했다. 이후 칠순에 이른 노화가는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는 ‘예술가에게 중도하라란 있을 수 없다‘며 끝까지 자신의 세계를 갈구했다. 모든 것을 접고 작업에만 매진했다. 말년에 서울 수유리에 자리잡은 그는 마침내 이르러 평생의 화업을 마무리했다.

1904년생인 박생광은 이응노와 동갑이다. 나이가 같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유사하다. 일본에서 공부해서 화가의 길을 걸었고, 한국화단의 재야로 살았으며, 말년에 더욱 탄탄하게 자신의 세계를 이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60대 이후 모든 것을 버리고 올연히 유럽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꽃피운 이응노와 함께 박생광은 20세기 한국미술사에 신화를 남겼다. 그것도 칠순의 넘긴 노화가의 열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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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과 부산지역 미술계


박생광은 진주사람이다. 진주에서 나고 자라서 일본 교토로 건너가 화가 수업을 받고 돌아와 중장년기를 진주에서 보냈다. 이후 서울과 일본 등에서 활동한 박생광은 오랫동안 부산화단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용길의 <부산미술사료>는 여러차례 박생광을 언급하고 있다. 1948년에 민주중보사 주최로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가 열렸다. 해방정국의 어수선한 정국 가운데서 부산미술계가 어떠한 지형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유력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총 134점의 응모작 가운데 45점이 입선하여 부산미술계의 신진을 발굴했던 이 전시에는 부산지역의 유력한 예술가들 23인이 초대작가로 출품했다. 양달석, 우신출, 김남배, 김종식, 전혁림, 김윤민 등과 같은 유화계열의 작가들과 더불어 수묵채색화 계열로 허민과 함께 이름을 올린 이가 박생광이다.

1950년대에 부산화단에서 수묵채색화 계열로 개인전을 연 작가가 이석우와 허민 정도였던 데 비해서, 1960년대에 들어서는 두 사람 밖에도 오재수, 배봉화, 박충검, 이재진, 박영근 등의 이름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다. 해방공간과 전후의 혼란을 딛고 한국화 화단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박생광이 부산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60년대에 들어서이다. 그가 부산에서 처음 개인전을 연 것은 1961년이다. 이후 ’65년과 ’68년에 개인전을 열었다.

이용길이 분석한 1970년대 부산의 주요 개인전 목록은 856차례의 각 매체별 개인전들 가운데 수묵채색화 계열로 178차례의 개인전을 소개하고 있다. 유화계열이 385차례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서 오늘날의 비율에 비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다. 70년대에 들어서 박생광은 1977년까지 총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부산에서 열었다. 말년에 마지막 불꽃을 피우기 직전까지 부산화단은 박생광의 중장년기를 품어 안은 터전이었다.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박생광은 부산경남을 떠나 꽃을 피웠다. 결과론적으로 부산경남화단은 박생광을 거장으로 길어 올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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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문화에서 길어 올린 박생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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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담채나 채색화를 오가며 다양한 화풍을 만들어 나가던 박생광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다. 70년대 후반에 박생광의 부산 개인전을 접했던 미술평론가 옥영식은 80년대의 폭발적인 채색화가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던 당시 노화가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증언과 기록에 따르자면 박생광 채색화의 주요 모티프는 단청이다. 초기에는 단청의 문양과 색채가 회화 작품에 직접 등장했고, 이어진 역작들은 단청의 굵고 간결한 윤곽선과 강렬한 원색을 다채로운 형상과 주제의식으로 확산했다.

칠순에 이른 박생광은 필생의 화업을 갈무리하는 화풍의 단초를 단청과 무속화, 탱화 등에서 얻었다. 그는 수묵화의 정통성을 세우며 채색화를 왜색이라는 이유로 배타시하던 한국화단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본 유학의 영향과 더불어 윤곽선 없는 회색톤의 화풍 때문에 일본적인 화풍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70년대말부터 시작해 80년대 한국사회를 휘몰아친 민족담론의 영향은 박생광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동했다. 채색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전통회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계승하려는 80년대 한국미술계에 전환적 국면을 선사했다. 박생광은 그 전환기의 한가운데서 엄청난 역작들을 생산했다.

진채기법은 채색안료를 두텁게 발라 강한 원색을 띄는 전통적인 채색기법이다. 문인들이 수묵을 중심에 놓고 있었던 반면에 불교와 무교를 비롯해서 민간에서 주로 생산했던 채색화의 전통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적인 것과 상통한다는 이유로 멀어졌다. 그러나 박생광은 채색을 놓지 않았다. 단청이나 탱화, 무속화 등에서 쓰는 굵은 윤곽선은 결정적으로 박생광 화풍을 형성했다. 또한 무당과 무속, 청담대사 연작 등에서 보이듯이 범신론적 관점의 종교적 서사를 가미했다. 완벽한 비주류 문화를 통해서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독창적인 박생광의 세계를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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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재발견하여 동양화 넘어 한국화로 성립하다


채색화 전통과 만난 박생광은 화려한 원색을 통해서 한국적 정서, 한국적인 미감을 발견했다. 여기서 한국화라는 개념을 들여다보자면, 그 뿌리는 19세기로 올라간다. 일본은 이미 19세기에 서양과 동등한 문화적 수준을 획득했다고 자부하면서 일본의 화풍을 일본화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아가 그들은 일본화를 통해서 동아시아, 혹은 전 아시아를 선도하는 문화제국주의의 시각을 관철하고자했다. 일본화의 주요한 특징은 윤곽선이 없이 흐릿한 형태에 색채 또한 부드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어 일명 몽롱체라고 부르는 화풍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일본화는 곧 동양화였다. 따라서 동양화는 동아시아를 넘어 동양 혹은 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회화개념으로 성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2차대전 이후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문화권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등 각기 다른 문화영역을 가진 아시아의 차이들이 드러나면서 자명해졌다. 한국화는 일본화의 그늘을 벗어나서 민족미학을 제대로 챙기자는 발상에서 태동한 조어이다. 일본화나 중국화와 마찬가지로 한국화와 북한의 조선화 모두 예술과 국가주의가 얽힌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특정 시기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생성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해방이후 한국의 미술계는 극심한 반일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채색화를 터부시했다. 수묵화에 비해 채색화는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박생광은 이러한 풍토에서 절치부심하며 평생의 화업을 이어갔다. 박생광은 일본화의 그늘에서 벗어나 동양화라는 거대한 스케일에 접근하고자했다. (동)아시아가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공통분모를 찾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말년에 인도를 여행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박생광은 말년에 민족미학을 최고의 가치로 꼽으며 회귀한다. 80평생에 있어 마지막 10년동안 박생광은 단청을 실마리로 무수한 민족미학의 정수를 토해냈다. 동양화라는 보편성보다 채색과 비주류 문화의 특수성에 주목함으로써 빛나는 세계를 얻을 수 있다는 점. 세계성과 지역성의 명암이 엇갈리는 부산화단에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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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 (朴生光, 1904-1985)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농업학교를 다녔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회화학교를 졸업한 후 20여년간 일본에 머물렀으며 해방 직전에 귀국해서 진주에 정착했다.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 초대작가로 출품했으며 이후 부산에서 8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기획전, 단체전에 출품했다. 이후 서울과 일본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채색화 계열의 대표작들을 남겼다. 말년에 들어 그는 중앙미술대상(1981), 인도성지순례(1982), 미술회관 개인전(1984), 파리 그랑팔레르살롱전 특별초대(1984), 호암갤러리 1주기전(1986) 등의 이력을 쌓으며 채색화 전통을 새로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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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501/060020080501.1035152121.html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3 우신출 : 부산한 붓질로 대지와 바다를 만난 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4/2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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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3 우신출

부산한 붓질로 대지와 바다를 만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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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23일. 여든을 넘긴 노화가는 여느 때와 같이 그림을 그리러 교외로 나섰다. 양산군 기장읍 해동궁사였다. 가파른 108계단을 다 오른 노화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이내 숨을 거뒀다. 분필을 든 교사가 교단에서 쓰러져 생을 마감하는 신화처럼, 그림 그리러 나섰던 화가가 현장에서 삶을 마감한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손수 만든 나비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는 멋쟁이 화가 우신출은 그림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삶을 마감할 때가지 그의 온 삶을 통해서 20세기 한국사회가 서구를 수용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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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는 우신출을 서양화가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서양화가라는 말로 호명하고 싶지 않다. 그는 서양에서 유래한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가 그린 그림을 서양화로 부르는 것은 몹시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았고 부산을 그렸다. 앞뒤 10년을 제외하고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부산 토박이의 삶을 살아간 화가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새로 접한 유화라는 서양에서 유래한 매체를 만나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고 부산서양화가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가 않고 있는 아이러니이다. ‘근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은 우신출이라는 화가에게 깊이 새겨진 정체성과도 같다. 유화물감과 페이트를 구분하지 못했던 10대의 우신출이 부산미술전람회를 이끈 중견작가로 성장하고 부산화단의 중진-원로로 활동하기까지 우신출 개인은 서구적 방식의 근대미술을 첫걸음부터 완숙기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변화,발전하는 부산지역 안에서 체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우신출이 화가의 길에 접어든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화가들에 비해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우신출은 소학교를 마치고 독학으로 공부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척과의 인연으로 10대 후반부터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던 중에 임응구(林應九, 1907-?)를 만나 유화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화가가 되기까지는 몇 가지 우여곡절이 더 있었다. 그는 돌연 출가해 범어사로 들어갔다가 1932년 제3회 부산미술전람회에 유화물감이 아닌 페인트로 그린 그림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그는 1934년에 수정사립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미술교사와 장학사를 거쳐 기장중학교 교장을 맡았고 이후 평생을 교단에 있으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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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신출이 페인트 그림으로 착각한 유화로 부산 최초의 개인전을 연 화가 임응구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임응구는 한국 근대 사진계를 이끈 선구자 임응식의 친형이다. 그는 1928년에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래 부산지역에서 활동한 이른바 서양화가 가운데 선구적인 입지를 가진 작가이다. 서양화, 유화, 전람회 등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창작 방법과 시스템이 부재던 시절 임응구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양식 그림인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미술인 가운데 최초로 당시 유일한 등단 시스템인 선전에 입선한 것은 부산 근대미술의 분기점으로 통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 10주년 기념전으로 <부산미술 80년, 부산의 작가들>이라는 타이틀을 내 건 것도 여기서 비롯한 일이다. 임응구는 남아있는 작품도 거의 없는데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이후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지지 않고 있지만, 부산지역 근대미술을 일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보인다. 임응구가 1930년에 최초의 서양화가 개인전을 열 때 ‘페인트 그림’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한 우신출은 임응구로부터 유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우신출은 한국전쟁 이후 부산지역 화단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지냈던 양달석과 비교적 자주 만나며 친분을 유지했다. 젊은 시절부터 춘광회를 통해서 화단의 동료로서 관계를 돈독히 해온 사이였다. 우신출은 여느 화가들처럼 학교에서 회화 학습을 거치고 유학 경력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부산지역 화단을 이끈 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격의 없이 우신출과 함께 한 춘광회 멤버들을 비롯한 동료 작가들의 열린 자세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학맥과 인맥에 근거한 배타성이 자리 잡기 이전의 유동적인 상황과 부산지역 화단의 근대성 일군 리더들의 열린 마음.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부산미술전람회(1928-1942)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 사람들이 주축이 된 전람회였다. 일본화와 양화 부문으로 나뉜 이 전람회는 2회 때부터 조선인 임응구에게 출품을 허락했다. 4회 때 임응구와 우신출이 출품한 이후에 5회를 넘기면서부터는 서너명 이상의 부산지역 작가들이 출품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배운 화가 임응구로부터 그림을 배운 우신출은 일본의 창을 통해 서양을 접했다. 부산양화전람회가 1932년부터 열리는데 이때 이인성, 우신출, 이상돈, 김원갑이 출품했다. 1937년에는 양달석,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이 참여한 춘광회 첫 전시가 열린다. 우신출은 스무살을 넘기며 빠르게 부산화단의 주역으로 성장해나갔다.

우신출은 평생에 걸쳐 인상주의 화풍을 자기언어로 습득하고 체득한 화가이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19세기 말 유럽의 아카데미 화단으로부터 멸시 받은 낙선전 출품작들을 보고 ‘참 인상적이군요’라며 조롱한 비평가들의 언급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그 이름은 별칭과도 같은 것인데, 본질을 따져 묻는 이름으로는 외광파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바깥과 빛이라는 두 요소를 강조한 것인데, 이들 인상파 화가들이 바깥에 나가서 직접 그림을 그렸다는 점, 빛의 변화에 따른 사물과 풍경의 변화를 포착해서 그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 외광파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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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침 해가 뜨는 장면, 눈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풍경, 스모그 가득한 도시의 잿빛 등을 그렸다. 정연하게 다듬어 붓질의 흔적을 비워버린 고전주의 화풍과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때로는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지나간 붓자국과 물감 덩어리를 드러내며 표면질감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 붓을 들고 대지와 만났던 그들처럼 우신출은 평생 자연을 만나 붓과 물감으로 눈부신 빛과 색애의 세계를 열었다.

우신출을 보면 한국 근대화단이 훤히 보인다. 그의 초기작에서 만년작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들은 한국의 근대미술이 어떻게 서양을 학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는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행의 길>(1931)이나 <농가풍경>(1932), <정물1>(1933), <초량풍경>(1933), <자화상>(1934), <가지 있는 정물>(1936), <버드나무>(1940) 등으로 이어지는 초기작들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실물로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습작기의 유신출이 어떤 진화단계를 거쳤는지를 증거하는 이 그림들은 유화물감을 캔버스에 발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 즉 서양화 그리기의 첫걸음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물과 정물, 풍경 등을 그린 이 그림들은 투박하고 거친 붓질과 소박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해서 이내 매우 감각적인 터치가 유화의 제 맛을 잘 살리고 있다. <강변풍경>(1972)과 <여름 숲속에서>(1973)와 같은 작품에 이르면 감각적인 색채와 속도감 있는 붓질, 그리고 탄탄한 구도가 어울려 그림 그리기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신출은 평생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부산의 안팎을 분주히 다니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도시 바깥의 풍경을 그리는 일은 근대미술이 새롭게 발견한 예술적 소통의 첫걸음이다. 붓과 물감으로 대지와 바다를 만나는 일, 미술의 창으로 자연을 만나는 일. 우신출의 저 부산한 붓놀림이 만들어낸 20세기 부산 미술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자산이 아니겠는가.

우신출(禹新出 1911-1992)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나서 동내서당과 부산진소학교를 다녔다. 특별히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익혀 화가로 성공했다. 그는 부산에 거주하거나 왕래하는 일본인 화가들의 영향으로 그림을 배워 부산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양달석, 김남배 등과 춘광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등 부산근대 화단의 터전을 닦았다.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완성하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부산 시내와 교외의 자연 풍경을 그려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평생을 교육자이자 화가로서 살면서 작품활동에 매진하면서 활발한 활동으로 부산지역 화단의 주축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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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부산일보 버전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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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③ 우신출
서양의 유화물감으로 서양화 아닌 부산을 그리다

▷ 우신출 (禹新出·1911~1992)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나 부산진소학교를 다녔다. 특별한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익혀 화가로 성공했다. 그는 부산에 거주하거나 왕래하는 일본인 화가들의 영향으로 그림을 배웠으며,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완성하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부산 시내와 교외의 자연 풍경을 담은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부산한 붓질로 대지와 바다를 만난 화가

1992년 10월 23일. 여든을 넘긴 노화가는 여느 때와 같이 그림을 그리러 교외로 나섰다. 기장군 기장읍 해동용궁사였다. 가파른 108계단을 다 오른 노화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내 숨을 거뒀다. 분필을 든 교사가 교단에서 쓰러져 생을 마감하는 신화처럼, 그림 그리러 나섰던 화가가 현장에서 삶을 마감한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손수 만든 나비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는 멋쟁이 화가 우신출은 그림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온 삶을 통해서 20세기 한국사회가 서구를 수용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술사는 우신출을 서양화가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를 서양화가라는 말로 호명하고 싶지 않다. 그는 서양에서 유래한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가 그린 그림을 서양화로 부르는 것은 몹시 마뜩찮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았고 부산을 그렸다. 앞뒤 10년을 제외하고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부산 토박이의 삶을 살아간 화가이다. 그런 그가 새로 접한 유화라는 서양에서 유래한 매체를 만나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고 부산서양화가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가 안고 있는 아이러니이다. '근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은 우신출이라는 화가에게 깊이 새겨진 정체성과도 같다. 유화물감과 공업용 페인트를 구분하지 못했던 10대의 우신출이 부산미술전람회를 이끈 중견작가로 성장하고 부산화단의 중진·원로로 활동하기까지 우신출 개인은 서구적 방식의 근대미술을 첫걸음부터 완숙기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변화·발전하는 부산지역 안에서 체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페인트 그림으로 부산미술전람회 입선

우신출이 화가의 길에 접어든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화가들에 비해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소학교를 마치고 독학으로 공부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척과의 인연으로 10대 후반부터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던 중에 임응구(林應九, 1907~?)를 만나 유화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화가가 되기까지는 몇 가지 우여곡절이 더 있었다. 그는 돌연 출가해 범어사로 들어갔다가 1932년 제3회 부산미술전람회에 유화물감이 아닌 페인트로 그린 그림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그는 1934년에 수정사립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미술교사와 장학사를 거쳐 기장중학교 교장을 맡았고 이후 평생을 교단에 있으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우신출이 페인트 그림으로 착각한 유화로 부산 최초의 개인전을 연 화가 임응구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임응구는 한국 근대 사진계를 이끈 임응식의 친형이다. 그는 1928년에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한 이래 부산지역에서 활동한 이른바 서양화가 가운데 선구적인 입지를 가진 작가이다. 서양화, 유화, 전람회 등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창작 방법과 시스템이 부재하던 시절 임응구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양식 그림인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부산 최초 유화 개인전 연 임응구를 만나다

부산지역 미술인 가운데 최초로 당시 유일한 등단 시스템인 선전에 입선한 것은 부산 근대미술의 분기점으로 통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 10주년 기념전으로 '부산미술 80년, 부산의 작가들'이라는 타이틀을 내 건 것도 여기서 비롯한 일이다. 임응구는 남아있는 작품도 거의 없는데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이후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지지 않고 있지만, 부산지역 근대미술을 일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임응구가 1930년에 최초의 서양화가 개인전을 열 때 '페인트 그림'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한 우신출이 임응구로부터 유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우신출은 한국전쟁 이후 부산지역 화단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지냈던 양달석과 비교적 자주 만나며 친분을 유지했다. 젊은 시절부터 부산지역 작가동인 춘광회를 통해서 화단의 동료로서 관계를 돈독히 해온 사이였다. 우신출은 여느 화가들처럼 학교에서 회화 학습을 거치고 유학 경력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부산지역 화단을 이끈 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격의 없이 우신출과 함께 한 춘광회 멤버들을 비롯한 동료 작가들의 열린 자세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학맥과 인맥에 근거한 배타성이 자리 잡기 이전의 유동적인 상황과 부산지역 화단의 근대성을 일군 리더들의 열린 마음.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부산미술전람회(1928~1942)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 사람들이 주축이 된 전람회였다. 일본화와 양화 부문으로 나뉜 이 전람회는 2회 때부터 조선인 임응구에게 출품을 허락했다. 4회 때 임응구와 우신출이 출품한 이래 5회를 넘기면서부터는 서너명 이상의 부산지역 작가들이 출품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배운 화가 임응구로부터 그림을 배운 우신출은 일본의 창을 통해 서양을 접했다. 부산양화전람회는 1932년부터 열리는데 이때 이인성, 우신출, 이상돈, 김원갑이 출품했다. 1937년에는 양달석,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이 참여한 춘광회 첫 전시가 열린다. 우신출은 스무살을 넘기며 빠르게 부산화단의 주역으로 성장해나갔다.

평생 걸쳐 인상주의 화풍 체득

우신출은 평생에 걸쳐 인상주의 화풍을 자기언어로 습득하고 체득한 화가이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19세기 말 유럽의 아카데미 화단으로부터 멸시 받은 낙선전 출품작들을 보고 '참 인상적이군요'라며 조롱한 비평가들의 언급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그 이름은 별칭과도 같은 것인데, 본질을 따져 묻는 이름으로는 외광파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바깥과 빛이라는 두 요소를 강조한 것인데, 이들 인상파 화가들이 바깥에 나가서 직접 그림을 그렸다는 점, 빛의 변화에 따른 사물과 풍경의 변화를 포착해서 그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 외광파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

그들은 아침 해가 뜨는 장면, 눈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풍경, 스모그 가득한 도시의 잿빛 등을 그렸다. 정연하게 다듬어 붓질의 흔적을 비워버린 고전주의 화풍과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때로는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지나간 붓자국과 물감 덩어리를 드러내며 표면질감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 붓을 들고 대지와 만났던 그들처럼 우신출은 평생 자연을 만나 붓과 물감으로 눈부신 빛과 색채의 세계를 열었다.

한국 근대화단의 단면 고스란히 담아

우신출을 보면 한국 근대화단의 단면이 보인다. 그의 초기작에서 만년작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들은 한국의 근대미술이 어떻게 서양을 학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는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행의 길'(1931)이나 '농가풍경'(1932), '정물1'(1933), '초량풍경'(1933), '자화상'(1934), '가지가 있는 정물'(1936), '버드나무'(1944) 등으로 이어지는 초기작들은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실물로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습작기의 우신출이 어떤 진화단계를 거쳤는지를 증거하는 이 그림들은 유화물감을 캔버스에 발라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즉 서양화 그리기의 첫걸음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물과 정물, 풍경 등을 그린 이 그림들은 투박하고 거친 붓질과 소박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해서 이내 매우 감각적인 터치로 유화의 제 맛을 잘 살리고 있다. '강변풍경'(1972)과 '여름 숲속에서'(1973)와 같은 작품에 이르면 감각적인 색채와 속도감 있는 붓질, 그리고 탄탄한 구도가 어울려 그림 그리기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신출은 평생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부산의 안팎을 분주히 다니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도시 바깥의 풍경을 그리는 일은 근대미술이 새롭게 발견한 예술적 소통의 첫걸음이다. 붓과 물감으로 대지와 바다를 만나는 일, 미술의 창으로 자연을 만나는 일. 우신출의 저 부산한 붓놀림이 만들어낸 20세기 부산 미술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자산이 아니겠는가.

김준기(미술평론가·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국립현대미술관 독립시켜야 개혁 가능

critic & column | 2008/04/23 23:14


가끔 검색 사이트에서 짐준기를 쳐본다.
문득 이 글이 올라와 있었다.
옛날 글이 왜 위로 올라와있는 건지 알 수 없다.
4년 전 글인데, 전혀 옛이야기가 아니다.
생생한 요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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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10일자 <세계일보> 기고문

[미술] 국립현대미술관 독립시켜야 개혁 가능

국립현대미술관을 책임운영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공개된 이후 한달 가까이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핵심은 책임운영기관 전환이 과연 국립현대미술관을 정상화하는 데 실효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개혁논의 과정의 비민주성에 모아졌다. 무엇보다도 개혁을 표방하는 여러 정책들이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주의로 흐르고 있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세간에 얘기하고 있는 바, 보수적 관료들이 개혁의 옷을 입고
‘무늬만 개혁’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행정자치부의 일방주의에 대한 미술계의 분노는
이제 서서히 양비론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동안 과천이 얼마만큼 미술계와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는지가 드러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양비론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시각이다.
과천은 학예직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신뢰받지 못해온 과천은 행정직과 학예직의 비정상적인 역관계 속에서 굴러온 비정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89명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62명이 일반행정직이라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이러한 직제의 비효율성은 책임운영기관으로 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당장 행정직 중심에서 학예직 중심으로 직제개편을 실행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그 어떤 개혁논의도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제 기능을 하도록 자율성과 책임성을 부여하려면, 독립기관으로 가는 것이 궁극적인 대안이다.
알맹이 없이 겉도는 논쟁보다는 내놓고 본질을 얘기해야 한다.
현재의 논점을 넘어서 행정관료와 학예전문직 양자 모두 진지하게
이 문제를 검토해 볼 것을 권고한다.

과천 식구들이 학예직이든 행정직이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독립기관으로 가겠다는 각오를 밝히지 않는 한,
자기 자리 지키기 위해 밥그릇 싸움 벌이고 있다는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논점이 되었던 문화의 상업화 논란은 다소 선정적인 문구였다. 책임운영제 논란의 핵심은 예산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적 구성의 문제다. 최근에 알려진 바로는 향후 학예직 상당수를 비정규직으로 채용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도 전문성을 길러 안정적으로 일을 해야 할 학예연구사를 채용하는 데 있어서 말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만영한 행정관료와 전문가집단의 갈등과 긴장이
이번 논란의 저변에 깔린 핵심이다.
행자부의 자율성과 독립성 운운은 이러한 과천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인적 구성이나 배치의 문제를 비껴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때가 어느 때인데 국가 차원에서 눈가리고 아웅하려 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관료주의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정부의 통제 아래 두지 않고
독립적인 이사회를 갖춘 법인을 만들고, 예산을 정부가 아닌 의회에서 직접 받는 재정적 독립을 이룬 영국의 국립미술관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 김준기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2 : 양달석, 기록과 기억 너머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4/1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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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2 : 양달석

양달석, 기록과 기억 너머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


“나는 고통 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68세에 이른 노화가 양달석은 1975년에 한 일간지에 연재한 비망록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시대적 질곡과 개인사적 고통으로 가득 찬 이 풍진 세상을 예술가로 살았다. 50년간 2천6백 여점을 헤아리는 그림을 그려낸 전업화가이다. 20대 중반 이후 부산에 정주하면서 전국화단에 양달석이라는 이름을 남긴 20세기 한국 근대화단의 대표 작가이다. 1995년에 문화부가 주도한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는 전국의 근현대 미술 유적지를 선정해서 표석을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남 거제에 있다. “거제시 사등면 성내리 717은 양달석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그 역사성을 기념하여 여기에 표석을 세우다. - 문화체육부 95”. 양달석 생가 표석의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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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908년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조선 사람으로서 유년기에 부모를 잃고 큰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자랐다. 학창시절 국어교육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동경 유학길에 오르지만 병을 얻어 중도하차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생계가 막막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해방 후에는 미술단체 대표를 맡은 전력과 회색을 쓴 그림 때문에 모함을 받아 좌익으로 몰려 고문을 받기도 했다. 두 명의 어린 자식을 그림 때문에 먼저 보내야했던 뼈아픈 삶의 체험도 있었다. 1972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중풍을 얻은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양달석은 한국의 근대미술을 일군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자, 부산지역을 토대로 한 미술생태 형성과 성장의 주역이다. 그는 해방 후 국가공동체의 재건 과정에서 미술단체의 대표를 맡아 미술제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후 평생을 전업화가로서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을 오가는 화가로서 국전 초대작가의 영예를 얻었다. 지금이야 공모전의 권위가 나락으로 추락한 상태지만, 일제시대의 조선미술전람회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약칭 선전과 국전은 절대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활동을 승인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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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밑에서 소낙비를 피하는 아이. 소를 타고 낮잠 자는 아이. 양달석의 그림은 소와 목동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집결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소와 목동’ 이외에 주목할 대목들이 많다. 일제시대 이후 농촌의 실경을 그린 그림들이 초기작의 주요 모티프이다. <부활>(1950)이나 <판자촌>(1965)처럼 형태와 색채가 어울려 반추상의 린 강렬한 조형세계를 선보인 작품도 있다. 자화상 연작들은 자신을 광대에 비춰 생의 한가운데 선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꽃 모티프의 강렬함도 그의 명작들 가운데 손꼽히는 대목이다.

유년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선장수, 어촌 등의 풍경이나 장면들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1940년대에 그린 <나물 캐는 여인>이나 1950년대의 <생선장수>, 새참 먹는 장면을 그린 <농부들> 등의 그림은 농촌사회의 생생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관상보는 사람>(1963)은 수묵담채화 같은 그림으로 유머가 넘치는 표정들과 현장을 포착한 감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양달석은 다양한 관심사와 화풍으로 20세기 한국사회의 변천을 기록하고 기억한 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달석하면 소와 목동을 떠올리는 것은 그 양과 질이 월등하기 때문이며, 그 그림들이 작가의 체험과 진솔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달석의 소는 착한 소이다. 이중섭에서 사석원에 이르는 격렬한 모티프의 소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전에 그린 양달석의 소에 관한 비평적 언급들은 야수파 화풍을 가진 양달석의 소가 마냥 착한 소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관심사가 조선향토색 논쟁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1930년대 조선향토색 논쟁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농촌공동체를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관통한 조선화가들의 조선향토색풍의 그림들은 패배주의 젖어있던 1930년대말 이후 일반적인 경향성으로 나타났다.

선전은 당대의 현실을 들춰내기보다는 일본인 심사위원들에게 호소하는 이국취향의 그 무엇이었다. 예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하기보다는 조선반도라는 식민지 영토의 풍토색을 강조함으로써 겉으로는 지역성이나 종다양성을 용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예술을 박제화한 불구의 시선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그렇다면 1940년을 전후로 한 양달석의 소와 목동이라는 소의 그림들은 향토색 논쟁에 있어 어떤 위치를 가지는가? 양달석의 그림은 조선의 풍토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제의 문화정책이 요청한 향토색과는 다르다. 양달석의 그림은 자신의 어릴 적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 농촌사회를 이상향이 아닌 현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백부 댁에서 자라면서 소 먹이러 나갔다가 잠시 조는 사이에 소를 잃어버리고 쫓겨나서 밤새 울다 새벽에 소를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일화는 훗날 소와 목동을 그리는 화가 양달석의 자전적 체험으로 자주 거론되곤 한다. 양달석이 주목한 농촌 풍경은 농경사회의 전통적 감성이 해방 이후 산업사회로 이행하던 시기까지 지속되었음을 알려준다. 그가 많은 작품을 남긴 20세기 후반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던 근대화 시기이다. 그는 전업화가였다. 자신의 그림을 구입해주는 콜렉터들의 취향이 전원생활, 목가풍경 등이었으며 양달석은 기꺼이 그러한 도상들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주요한 모티프로 활용했고 다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박수근이 나목과 아낙네를 그렸듯이 양달석은 소와 목동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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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석과 조선향토색을 변별하는 또 한 가지 결정적인 단서는 양달석 자신이 밝힌 선전 출품작 낙선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고향’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에 어긋나 기대했던 특선이 아닌 낙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일제가 기대했던 조선향토색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에 제국주의 시각으로 박제화한 조선향토의 미감, 차이가 아니라 차별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던 근대주의의 ‘내려깐 눈(down cast eyes)’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감성의 표현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와 해방공간의 갈등, 한국전쟁의 뼈아픈 상처를 넘긴 현실 삶 너머의 이상향을 지향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은 일제의 문화정책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일러스트 풍의 화면 구성과 간략한 표현으로 이어진 채색들은 민화의 특성과 일치한다. 민화 전통과 연계한 양달석의 그림은 요즘 우리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중진 이희중의 민화풍 그림이나 민화를 차용해 감각적인 회화를 보여주는 젊은 작가 홍지연으로 이어지는 작풍의 선례로 언급할만하다. 박제화한 전통 소재의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 매우 세련된 감각의 동시대성을 획득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이다. 후반기의 그의 그림은 윤곽선이 살아있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으로 나뉜다. 1972년 중풍을 얻어 정교한 붓놀림이 어려워진 이후에 양달석은 오른 손이 아닌 왼손으로 그리거나 손에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현실과 이상향을 동시에 담고 있다. 풍경의 부분을 포착해서 그 위에 소와 아이를 배치하거나, 저 푸른 초원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와 목동을 조망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실경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실재 풍경을 통해서 당대의 삶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강한 원색이나 미색 계열의 색채를 구사함으로서 밝고 맑은 이상향을 화면 속에 구현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생긴 판자촌의 야경을 그려낸 수채화 <판자촌>이 그 예이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빛과 사람들의 실루엣이 묻어난다. 당대의 애환이자 낭만을 진하게 담고 있다. 1954년 작 <목동>은 풀꽃이 만발한 들판에 작은 둔덕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전경과 원경의 원근법적인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화면 전체를 수평적인 요소의 나열로 채운 그림이다. 전면회화의 특성을 보이는 양달석의 대표작이다.

소와 목동의 화가 양달석. 고통 속에서도 목가적인 이상향을 그려 예술적 영예를 획득한 불굴의 화가 양달석. 이러한 수사는 현대적 의미의 예술을 개척하며 살아온 그에 삶에 비해 다소간 부족한 말들이다. 그가 부산에서 예술가로서 살았다는 것. 그것도 예술로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제도와 관행이 부재한 시대에 태어나 미술문화를 만들고 길러내며 한 평생을 살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양달석의 그림은 근현대기 부산과 20세기 한국의 트라우마를 담고 있는 삶의 기록이자 역사의 기억이다. 나아가 그것은 자기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이다. 양달석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세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자신의 자기극복, 즉 구원의 세계’라고 말했다. 예술은 작가 자신의 자기 구원이며 한 시대와 동행하는 시대정신이다. 부산미술 다시 읽기의 출발점에 서서 기록과 기억 너머 치유와 구원으로서의 예술을 다시 생각한다.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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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달석(梁澾錫, 1908-1984)은 경남 거제 출생으로 본관은 남원이며 호는 여산(黎山)이다. 거제의 유명한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큰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에 통영의 사립청년학원을 거쳐 진주농업학교에 진학해서 그림을 시작했다. 1932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로 입선한 후에 동경에 건너가 제국미술학교를 다녔지만 병을 얻어 마치지 못하고 돌아와서 부산에 정착했다. 1930년대부터 자신의 성장기를 바탕으로 한 농촌의 풍경과 장면을 그렸는데, 면서기를 하면서 1932년, 38년, 39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입선했고, 1940년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과 춘광회 동인활동을 했다. 1940년 부산미술전 서양화부 최고상을 수상했으며, 1945년부터 약 2년간 경남상고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미술동맹에서 출발해 이내 바뀐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맡았으며(1946-1949년), 한국전쟁동안 종군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3년 경남 문화상을 수상했고, 197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출품했으며 1984년 작고할 때까지 화업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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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부산일보에서 편집한 글임.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② 양달석 (梁澾錫·1908~1984)

소와 목동의 화가 근·현대기 역사를 담다


"나는 고통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1975년 67세에 이른 노화가 양달석은 한 일간지에 연재한 비망록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시대적 질곡과 개인사적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예술가로 살았다. 50년간 2천600여 점을 헤아리는 그림을 그려낸 전업화가이며, 20대 중반 이후 부산에 정주하면서 전국 화단에 이름을 남긴 20세기 한국의 작가이다.

그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908년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부모를 잃고 큰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성장했다. 학창시절 국어교육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병을 얻어 중도하차하고 귀국했다가 생계가 막막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해방공간에서는 좌익으로 몰려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72년에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중풍을 얻었다. 두 명의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뼈아픈 체험도 있었다. 그러나 양달석은 그런 고단한 삶의 고통 속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양달석은 한국의 근대 미술을 일군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자, 부산지역을 토대로 한 미술생태 형성과 성장의 주역이다. 평생을 전업화가로서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을 오가는 화가로서 국전 초대작가의 영예를 얻었다. 일제시대 조선미술전람회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절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활동을 승인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소 밑에서 소낙비를 피하는 아이. 소를 타고 낮잠 자는 아이. 양달석의 그림은 소와 목동이라는 단일한 모티프로 집결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소와 목동' 이외에도 주목할 대목들이 많다. 일제시대 이후 농촌의 실경을 그린 그림도 많다. 1965년작 '판자촌'처럼 형태와 색채가 어울린 강렬한 조형세계도 있다. 자화상 연작들은 자신을 광대에 비춰 그린 인물 연작들이다. 꽃 모티프의 강렬함도 그의 명작들 가운데 손꼽히는 대목이다. 바다 연작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선장수, 어촌 등의 풍경이나 장면들을 그렸다.

특히 1940년대에 그린 '나물 캐는 여인'이나 1950년대의 '생선장수', 새참먹는 장면을 그린 '농부들' 등의 그림은 생생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1963년 작 '관상보는 사람'은 수묵담채화 같은 그림으로 유머가 넘치는 표정들과 장면을 포착한 감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양달석은 다양한 관심사와 화풍으로 20세기 한국사회의 변천을 기록하고 기억한 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론할 때마다 소와 목동을 떠올리는 것은 그 양과 질이 월등하기 때문이며, 그 그림의 진정성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달석의 소는 착한 소이다. 이중섭에서 사석원에 이르는 격렬한 모티프의 소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전에 그린 양달석의 소에 관한 비평적 언급들은 야수파 화풍을 가진 양달석의 소가 비상하게 보였음을 증거한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관심사가 조선 향토색 논쟁이다. 양달석의 그림은 1930년대 조선 향토색 논쟁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민속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서 조선 향토색 풍의 그림들은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1930년대 말 이후 조선의 화가들에게 일반적인 경향성으로 나타났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당대의 현실을 들춰내기보다는 일본인 심사위원들에게 호소하는 이국 취향의 그 무엇이었다. 예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하기보다는 조선 반도라는 식민지 영토의 풍토색을 강조함으로써 겉으로는 지역성이나 종다양성을 용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예술을 박제화한, 불구의 시선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그렇다면 1940년을 전후로 한 양달석의 소와 목동의 그림들은 향토색 논쟁에 있어 어떤 위치를 가지는가? 변별점을 찾을 수 있다. 양달석의 그림은 자신의 어릴 적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백부 댁에서 자라면서 소 먹이러 나갔다가 잠시 조는 사이에 소를 잃어버리고 쫓겨나서 밤새 울다 새벽에 소를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일화는 훗날 소와 목동을 그리는 화가 양달석의 자전적 체험으로 자주 거론되곤 한다.

그는 일제시대에 제국주의 시각으로 박제화한 조선향토의 미감, 차이가 아니라 차별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던 근대주의의 '내려깐 눈(down cast eyes)'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감성의 표현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해방공간의 갈등, 한국전쟁의 뼈아픈 상처를 넘긴 현실 삶 너머의 이상향을 지향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이다. 이는 농촌 모티프가 농경사회의 전통적 감성이 해방 이후 산업사회로 이행하던 시기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가 많은 작품을 남긴 한국전쟁 이후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던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 시기이다.

그는 전업화가였다. 자신의 그림을 구입해주는 콜렉터들의 취향이 전원생활, 목가풍경 등이었으며 양달석은 기꺼이 그러한 도상들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주요한 모티프로 활용했고 다수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박수근이 나목과 아낙네를 그렸듯이 양달석은 소와 목동을 그렸다.

일러스트 풍의 화면 구성과 간략한 표현으로 이어진 채색들은 민화의 특성과 일치한다. 민화 또는 전통과 연계한 양달석의 그림은 요즘 우리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중진 이희중의 민화풍 그림이나 민화를 차용해 감각적인 회화를 보여주는 젊은 작가 홍지연을 연상하게 한다. 박제화한 전통 소재의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 매우 세련된 감각의 동시대성을 획득한 것이 양달석의 그림이다.

후반기의 그의 그림은 윤곽선이 살아있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으로 나뉜다. 1972년 중풍을 얻어 정교한 붓놀림이 어려워진 이후에 양달석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그리거나 손에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실재 풍경을 바탕으로 당대의 면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강한 원색이나 미색 계열의 색채를 구사함으로서 밝고 맑은 이상향을 화면 속에 구현하기도 했다. 1950년 작 '판자촌'은 전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생긴 판자촌의 야경을 그려낸 수채화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빛과 사람들의 실루엣이 묻어난다. 풀꽃이 만발한 들판에 작은 둔덕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전경과 원경의 원근법적인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화면 전체를 수평적인 요소의 나열로 채운 전면회화의 특성을 보인다.

소와 목동의 화가 양달석. 고통 속에서도 예술적 영예를 획득한 불굴의 화가 양달석. 이러한 수사는 현대적 의미의 예술을 개척하며 살아온 그에 삶에 비해 다소 부족한 말들이다. 그가 부산에서 예술가로서 살았다는 것. 예술로써 대화하고 소통하는 제도와 관행이 부재한 시대에 태어나 미술문화를 만들고 길러내며 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양달석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세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자기극복, 즉 구원의 세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예술은 작가 자신의 자기 구원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와 동행하는 시대정신이다. 그의 그림은 자기 치유와 구원의 메시지였으며, 나아가 근현대기 부산과 20세기 한국의 트라우마를 담고 있는 역사의 기억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양달석 (梁澾錫·1908~1984)
호는 여산(黎山)이다. 경남 통영의 사립청년학원, 진주농업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를 다녔다. 부산에 정착한 1930년대부터 자신의 성장기를 바탕으로 농촌의 풍경과 장면을 그렸다. 1932·1938·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고, 1940년 부산미술전 서양화부 최고상을 수상했다.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과 춘광회 동인활동을 했으며, 1945년부터 2년간 경남상고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맡았으며(1946~1949), 6·25전쟁 당시에는 종군화가로 나서기도 했다. 197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로 출품했다.



공간과 매체의 경계, 김민정의 경우 : 고양창작스튜디오 어드바이징 프로그램

critic & column | 2008/04/14 00:07


국립고양창작스튜디오. 그곳은 태릉선수촌과 같은 곳이다. 국가대표 미술선수를 육성하는 엘리트 미술의 요람이다. 그곳에 입주해서 일년 동안 수많은 미술인들과 대면하는동안 그들은 엘리트 미술이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한다.

그곳에서는 미술에 관한 현재의 합의가 자연스럽게 반복재생산된다. 미술장의 관행을 지탱하고 만들어나가는 곳. 그곳에 입주해 있는 한 작가에게 어드바이스를 하라는 요청을 받고 그를 만났다. 김민정 작가. 그와 나눈 이야기들을 다시 글로 풀었다. 역시 말과 글은 다르다.

미술...... 나는 그 끝모를 미로의 한 가운데 서서 '내도 모르고 니도 모르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모르는' 미술이라는 끈을 잡고 헤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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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매체의 경계, 김민정의 경우

김민정과의 대화는 공간과 영역, 사회와 개인, 매체와 개념 등의 몇몇 가지 논점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논지는 김민정의 공간이 집과 작업실, 전시장 등과 같이 자신의 가시적인 생활영역에 국한된 것이라는 점, 따라서 비가시적이며 가시적인 체험과 상상의 공간이나 영역에 관한 관심으로 확장할 필요성이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김민정은 그것을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와 방법론에 대한 고민으로 풀이했다. 숨쉬는 벽과 문은 그에게 있어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발견 이후 그는 예술가의 체험이 예술적 생산과 어떻게 결합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와 나의 관심사였다. 김민정과의 대화에서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혹은 내가 그와의 대화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는 나에게 (강변하지는 않았지만) 예술이란 꽉 짜여진 가치체계 안에 가둬진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이 바로 예술을 만드는 출발점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했다. 그는 초심을 가지고 출발선에 선 작가이다. 그의 고민은 곧 나의 고민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나를 어드바이징 했다.

90년대 이후 세대들 다수에게 있어서 사회적인 주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 등은 다소간 거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어떤 작가들은 이 대목을 일종의 콤플렉스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떤 작가들은 주목받기 위한 전술로 활용하기도 한다. 김민정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김민정은 작업실용 사회비판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장에 앉아 세계를 들었다가 놓는 상투적인 비판정신은 이제 아무런 자극과 상상을 주지 않는다. 상투적이고 관념적인 사회비판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빈곤에서 나온 무기력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 넋두리도 진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이른바 ‘사회적인 것’에 대한 우리시대의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고 또 다른 길로 나아가리라는 희망을 발견했다. 보편적인 것은 특수한 것의 발현이며, 글로벌한 것은 로컬한 것과 한 몸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은 불이(不二)의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들을 집요하게 다루다보면 그 속에서 우리사회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이 관점을 대부분 망각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상호배타적일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사회의 구조를 지탱하는 개인심리와 집단심리의 작동을 생각해보면 해답은 간단하다.

그는 스스로 매체장악력을 넓혀왔으며 그것이 점점 미술계에서의 인정투쟁 과정에서 생존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가능성을 확장하는 만큼 자신이 삶의 체험을 통해서 메시지의 발신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김민정은 최근 무대에서 무용가의 안무와 결합하는 영상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전위적인 음향도 가미된다. 오픈스튜디오를 위한 작업에서는 작업실 공간 가운데서도 창에 주목한다. 그는 창을 대치하는 영상을 만들고 그 영상이 창 틀 밖으로 나와 전시장 공간을 유영하도록 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문제는 그 영상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지금까지 공간 내부에 집중한 나머지 공간 바깥을 다루는 데 인색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유와 체험을 근거로 하는 작업 태도 때문인데, 최근에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작업은 자신이 머무르는 물리적 공간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공간 개념이다. 공간을 가시적인 공간(space)로 한정하지 않고 비가시적인 영역(sphere)의 문제로까지 확장하려는 시도이다.

최근작 이전부터 김민정은 경계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실재와 가상, 물질과 비물질, 개념과 조형, 시각과 청각 등 여러 가지 대립항들 위에 서서 경계를 타넘는 작가이다. 그는 빈번히 실재공간과 가상공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실재 공간을 왜곡하고 변형하는 일루전의 세계. 그것은 영상을 통해서 가상의 실재를 창출하는 김민정의 세계이다. 그의 작업을 통해서 집과 작업실, 전시장 공간이 숨을 쉰다. 고정된 틀이 움직이며 숨을 쉰다. 자신의 신체에서 나오는 다양한 음향들이 영상과 더불어 숨을 쉰다. 김민정의 작업이 공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작가 자신을 비롯해 여러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입을 모으는 진단이다. 최정희는 장소 특정적인 영상작업이라고 했다. 고유의 프레임 밖으로 나와 전시장 공간으로 확장하는 영상이라는 것이다. 벽과 벽 사이, 문과 틀 사이 등 틈새를 파고드는 영상이 장소의 맥락을 타는 작업이라는 데 주목하고 있다. 최은하가 지적한 포인트는 물질 구조의 실재 공간과 비 물질의 영상을 결합하는 작업이다. 김윤옥은 전시장공간과 영상공간,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결합을 통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언급했다. 임정희는 전시장 공간에 집이라는 공간을 투여함으로써 기억과 경험의 확장을 불러온다고 보았다. 김민정에 대한 이러한 비평적 언술들은 그를 공간 지각과 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가상의 세계를 창출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공간을 전유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전업미술가로 자리잡아가는 시각이미지생산자들에게 있어 작업이란 우물에 물이 고이기를 기다렸다가 길러 올리는 것이 아니라 전동모터로 지하수를 퍼올리듯 뽑아내야하는 경쟁 그 자체에 가깝다. 김민정의 장점은 자신의 작업을 언어게임의 장을 관통하는 트렌드를 발견하고 거기에 기대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감성들을 소통가능한 언어로 생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발화하는 작업. 진정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작가의 삶과 유기적으로 호흡하는 작업. 그것이 지금 김민정이 찾고 있는 길이다.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는 의제 허백련의 명제가 치열한 시각언어 게임의 장인 고양스튜디오에 입주해있는 지금의 김민정에게 절실한 화두라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일이다.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박제화한 언어게임의 장에서 장의 논리에 함몰되는 언어생산에 몰두하는 것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은 따라서 매우 이례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인정투쟁에 몰두해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둘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불안하고 허황된 위치에 작가라는 존재를 자리매김하게 하는지 말이다.

그는 조각가 정체성에서 예술가 정체성으로 확장된 영역을 설정해왔다. 그는 오프라인 기반의 작업 뿐만 아니라 온라인 기반의 작업까지 두루 관통할 수 있는 작가이다. 그는 모델링과 드로잉, 3D 애니메이션과 구조물 설계, 인테리어, 웹디자인과 웹프로모션 그리고 사진에까지 전방위의 관심과 능력을 갖췄다. 그것이 완벽한 능력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전방위에 관심을 두고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능한 모든 매체를 선택한다는 점에 있다. 매체선택과 관련한 김민정의 행보는 정보와 통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정보화 사회의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매체를 장악하는 능력. 그것으로부터 작가 고유의 스타일이 나온다. 예술은 정신이면서 동시에 물질형식이다. 따라서 그것이 개념적이든 조형적이든,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심지어는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작가는 자신의 이념과 감성을 실현할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 그 물질적 기반의 현현이 스타일이다. 김민정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명쾌한 스타일을 만들어 왔다. 매체를 장악한 예술가는 그 이후 무엇을 잡아야 하는가? 지금 김민정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김민정은 이미 그 해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처음 출발할 때부터 이미 경계 위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가. ■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시미 큐레이터)

* 고양스튜디오 어드바이징 프로그램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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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1 : 프롤로그, 부산 미술의 초석을 놓았던 1세대 작고 작가들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4/1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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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1

프롤로그 : 부산 미술의 초석을 놓았던 1세대 작고 작가들



며칠 전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은 일본 후쿠오카의 한 큐레이터가 부산미술의 특성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부산미술은 없다." 부산미술을 다른 도시와 차별화해 해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개방성 정도.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후쿠오카미술이나 일본미술은 뭐냐고. 서울미술 혹은 한국미술, 아시아미술이 뭐냐는 질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미술은 없는 게 확실하다. 대구미술과 광주미술이 구상회화, 인상파회화와 같이 일부 주류를 중심으로 언급되는 것도 신화에 불과하다. 그 어디든 미술문화의 맥락을 한두 가지 흐름으로 단선화 하는 것은 미술사의 신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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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다양성이 살아있는 문화예술 생태계에 있어 단일한 정체성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문화적 다원성을 계보의 신화보다 앞선 가치로 보기 때문이다. 단일한 정체를 단언하는 것은 권력의 논리를 앞세운 반문화이다. 공공미술관과 화랑, 대안공간이 활동하는 도시, 부산비엔날레를 통해 미술을 매개로 국제적인 그물망을 넓히는 도시, 관람객 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미술시장이 날로 커지는 문화의 도시 부산. 이와 같은 문화 지표를 이루기까지 80년이 걸렸다. 미술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착종하기 위해 반세기의 세월에 걸쳐 미술생태가 순환했다.

이 연재는 부산지역의 미술생태를 다룰 것이다. 근대적 개념과 제도를 만들어간 부산미술 5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기획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는 몇 가지 방법들 가운데서도 작가들을 중심에 두고 안팎의 구조를 파악해보는 인물학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대상은 대부분 1940년대 초반 이전에 출생한 작고 작가들로, 부산지역 미술생태를 기록하는 데 굵은 선을 남긴 이들이다. 활동시기로 보면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가 주요 대상이다.

1970년대까지를 하한선으로 잡은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역사적 시간거리를 확보하는 데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 시기 이전과 이후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근본적인 지형변화가 일어난다. 1980년대는 한국사회의 근현대 분기를 앞뒤로 가늠할만한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를 본격적인 분기로 보든 과도기로 보든 간에 대변동의 축선임은 분명하다. 부산미술에서 급격하게 다원화 현상이 일어난 1980년대 이전까지의 미술생태 지형도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1930~70년대 굵은 족적 찾아

일제강점기가 미술문화의 씨앗을 뿌린 여명기였다면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이후의 부산미술은 본격적인 착종기로 볼 수 있다. 미술의 개념과 방법, 제도, 관행 등을 만들어가던 시기에 부산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에 관한 기술과 분석이 함께할 것이다. 인물학이란 작품의 양식사에 밀려 소홀히 취급받는 인물에 관한 연구를 시도하는 태도이다. 양식사를 중심으로 기술하는 미술사는 역사적 관점에 따라 가감의 편견이 극심하다. 그렇지만 인물 중심의 야사로 가거나 인적 네트워크의 계보를 파악하는 데만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에 대한 비평적 성찰 또한 이 연재의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까지의 미술사가 양식계보학이었다면, 그것을 보완하거나 뒤집는 것이 인물계보학이다. 인물계보학은 인물을 중심으로 미술생태 전반을 꿰뚫는 것이 궁극의 관심사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술생태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싸이클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생태계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미술문화의 생산과 매개와 향유를 둘러싼 일련의 순환구조를 생태적 관점에서 파악해 보려는 시각이다. 미술사의 신화를 쫓기보다는 미술인물의 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양식분석 중심의 미술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부산지역의 미술생태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중요유산 - 김종식·김홍석·양달석

한국전쟁 이후에 등장한 본격 모더니즘은 김종식과 김홍석과 같은 거장을 낳았다. 김종식은 부산 근현대미술의 전사와 후사, 정사와 야사에 두루 걸쳐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김종식은 한국전쟁시기 피난처 부산에서 각지에서 온 미술인들과 교류했으며 이후에도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작품성향 또한 아카데미 회화에서 반추상과 비구상에 이르기까지 그 품이 너르기 그지없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작가이면서도 웬만하면 서울 가서 활동하는 관행과는 거리를 둔 부산지역 미술계의 느티나무였다. 한국 현대미술계의 숨겨진 진주인 김홍석은 재료선택과 화면처리 등에서 단연 돋보이는 모더니스트이다. 미술문화의 뿌리가 약한 상황에서 이 같은 작가들이 나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현대미술의 빗장을 연 작가들을 만난다. 양달석은 유화와 수묵채색화를 넘나들며 한국화단 전체에서도 잘 알려진 화가이다. 우신출은 미술관련 학제교육 없이 화가가 되었는데, 여러 가지 기법들을 두루 익혀서 그림이 매우 다채롭다. 김윤민은 초현실주의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오묘한 매력의 작품들을 남겼다. 김동규 같은 선구적인 작가는 50·60년대에 전위적인 실험미술을 했다. 그의 설치와 평면회화들은 초기의 전위미술을 증거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수묵채색화의 경우 허민이 전통사회의 맥락을 잇고 있는 드문 작가이다.

부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다가 출향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 작가도 많다. 부산에서 현직 교사생활을 했던 조양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북송선을 타기 전까지 중요한 재일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질곡의 역사 한 가운데에 뛰어든 예술가이다. 해방직전부터 6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서 활동한 박생광은 오랜 세월 예술에 대한 열정을 토대로 80년대 이후 말년에 꽃을 피운 작가이다. 마산 출신의 문신은 유럽으로 건너가 비례미를 꽃피운 대가이다. 이들 출향작가들 또한 부산미술생태의 중요한 맥락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예술로 부산을 들여다 보려는 본격적인 시도와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라는 두 가지 길로 갈린다. 이들의 활동은 구상과 비구상, 추상에 이르기까지 부산미술의 두께를 더한 중요한 유산이다. 특히 이들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는 역사 속의 미술생태 지형을 살피는 데 더 없이 중요한 자산이다. 그들의 생생한 증언이 생태지도를 구성하는 데 큰 힘을 줄 것이다.

종 다양성이 살아있어 건강한 부산미술

왜 부산지역에는 스타가 없는가? 과연 부산에는 한국사회가 공감할만한 근현대 시기의 빼어난 작가가 없다는 말인가?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했던 80년대에 부산에서 자란 필자는 국제적인 미술문화도시인 부산의 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절실하게 그 답을 찾고 있다.

해답은 스타를 만드는 것과는 정반대 쪽에 있다. 특정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문화권력을 휘두르는 미술계는 재미가 없다. 부산지역미술에 스타가 없다는 것은 문화권력을 장악한 강력한 힘의 집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특정스타가 없는 부산미술계는 그래서 오히려 건강하다. 종 다양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대구에 이인성이 있고 광주에 오지호가 있다면 부산에 김종식과 김홍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문화권력 구도는 향토색 논쟁을 관통한 이인성이나 오지호 정도만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주류미술사의 권력의지나 미술시장의 관심사에 따르자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권력의 중심에 진출하지 안/못했다고 해서 그 가치가 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더욱이 필자의 관심은 부산지역의 대가를 호명하는 데 있지 않다. 더 넓고 깊게 얽히고설킨 생태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서로 다른 가치와 감성의 차이가 공존하는 공간. 이것이 살아 움직이는 문화예술생태계 최고의 가치다. 예술은 종 다양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기 때문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필자 소개
1968년 생으로, 부산 대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술대학 예술학과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 2006년 부산비엔날레 조각프로젝트 전시팀장과 공공미술추진위원회 팀장의 일을했다. 2007년 석남미술상 '젊은 이론가상'을 받았다.

입력시간: 2008. 04.1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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