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3 우신출
부산한 붓질로 대지와 바다를 만난 화가
1991년 10월 23일. 여든을 넘긴 노화가는 여느 때와 같이 그림을 그리러 교외로 나섰다. 양산군 기장읍 해동궁사였다. 가파른 108계단을 다 오른 노화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이내 숨을 거뒀다. 분필을 든 교사가 교단에서 쓰러져 생을 마감하는 신화처럼, 그림 그리러 나섰던 화가가 현장에서 삶을 마감한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손수 만든 나비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는 멋쟁이 화가 우신출은 그림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삶을 마감할 때가지 그의 온 삶을 통해서 20세기 한국사회가 서구를 수용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술사는 우신출을 서양화가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서양화가라는 말로 호명하고 싶지 않다. 그는 서양에서 유래한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가 그린 그림을 서양화로 부르는 것은 몹시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았고 부산을 그렸다. 앞뒤 10년을 제외하고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부산 토박이의 삶을 살아간 화가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새로 접한 유화라는 서양에서 유래한 매체를 만나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고 부산서양화가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가 않고 있는 아이러니이다. ‘근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은 우신출이라는 화가에게 깊이 새겨진 정체성과도 같다. 유화물감과 페이트를 구분하지 못했던 10대의 우신출이 부산미술전람회를 이끈 중견작가로 성장하고 부산화단의 중진-원로로 활동하기까지 우신출 개인은 서구적 방식의 근대미술을 첫걸음부터 완숙기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변화,발전하는 부산지역 안에서 체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우신출이 화가의 길에 접어든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화가들에 비해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우신출은 소학교를 마치고 독학으로 공부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척과의 인연으로 10대 후반부터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던 중에 임응구(林應九, 1907-?)를 만나 유화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화가가 되기까지는 몇 가지 우여곡절이 더 있었다. 그는 돌연 출가해 범어사로 들어갔다가 1932년 제3회 부산미술전람회에 유화물감이 아닌 페인트로 그린 그림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그는 1934년에 수정사립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미술교사와 장학사를 거쳐 기장중학교 교장을 맡았고 이후 평생을 교단에 있으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우신출이 페인트 그림으로 착각한 유화로 부산 최초의 개인전을 연 화가 임응구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임응구는 한국 근대 사진계를 이끈 선구자 임응식의 친형이다. 그는 1928년에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래 부산지역에서 활동한 이른바 서양화가 가운데 선구적인 입지를 가진 작가이다. 서양화, 유화, 전람회 등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창작 방법과 시스템이 부재던 시절 임응구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양식 그림인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미술인 가운데 최초로 당시 유일한 등단 시스템인 선전에 입선한 것은 부산 근대미술의 분기점으로 통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 10주년 기념전으로 <부산미술 80년, 부산의 작가들>이라는 타이틀을 내 건 것도 여기서 비롯한 일이다. 임응구는 남아있는 작품도 거의 없는데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이후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지지 않고 있지만, 부산지역 근대미술을 일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보인다. 임응구가 1930년에 최초의 서양화가 개인전을 열 때 ‘페인트 그림’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한 우신출은 임응구로부터 유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우신출은 한국전쟁 이후 부산지역 화단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지냈던 양달석과 비교적 자주 만나며 친분을 유지했다. 젊은 시절부터 춘광회를 통해서 화단의 동료로서 관계를 돈독히 해온 사이였다. 우신출은 여느 화가들처럼 학교에서 회화 학습을 거치고 유학 경력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부산지역 화단을 이끈 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격의 없이 우신출과 함께 한 춘광회 멤버들을 비롯한 동료 작가들의 열린 자세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학맥과 인맥에 근거한 배타성이 자리 잡기 이전의 유동적인 상황과 부산지역 화단의 근대성 일군 리더들의 열린 마음.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부산미술전람회(1928-1942)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 사람들이 주축이 된 전람회였다. 일본화와 양화 부문으로 나뉜 이 전람회는 2회 때부터 조선인 임응구에게 출품을 허락했다. 4회 때 임응구와 우신출이 출품한 이후에 5회를 넘기면서부터는 서너명 이상의 부산지역 작가들이 출품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배운 화가 임응구로부터 그림을 배운 우신출은 일본의 창을 통해 서양을 접했다. 부산양화전람회가 1932년부터 열리는데 이때 이인성, 우신출, 이상돈, 김원갑이 출품했다. 1937년에는 양달석,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이 참여한 춘광회 첫 전시가 열린다. 우신출은 스무살을 넘기며 빠르게 부산화단의 주역으로 성장해나갔다.
우신출은 평생에 걸쳐 인상주의 화풍을 자기언어로 습득하고 체득한 화가이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19세기 말 유럽의 아카데미 화단으로부터 멸시 받은 낙선전 출품작들을 보고 ‘참 인상적이군요’라며 조롱한 비평가들의 언급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그 이름은 별칭과도 같은 것인데, 본질을 따져 묻는 이름으로는 외광파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바깥과 빛이라는 두 요소를 강조한 것인데, 이들 인상파 화가들이 바깥에 나가서 직접 그림을 그렸다는 점, 빛의 변화에 따른 사물과 풍경의 변화를 포착해서 그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 외광파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
그들은 아침 해가 뜨는 장면, 눈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풍경, 스모그 가득한 도시의 잿빛 등을 그렸다. 정연하게 다듬어 붓질의 흔적을 비워버린 고전주의 화풍과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때로는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지나간 붓자국과 물감 덩어리를 드러내며 표면질감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 붓을 들고 대지와 만났던 그들처럼 우신출은 평생 자연을 만나 붓과 물감으로 눈부신 빛과 색애의 세계를 열었다.
우신출을 보면 한국 근대화단이 훤히 보인다. 그의 초기작에서 만년작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들은 한국의 근대미술이 어떻게 서양을 학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는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행의 길>(1931)이나 <농가풍경>(1932), <정물1>(1933), <초량풍경>(1933), <자화상>(1934), <가지 있는 정물>(1936), <버드나무>(1940) 등으로 이어지는 초기작들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실물로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습작기의 유신출이 어떤 진화단계를 거쳤는지를 증거하는 이 그림들은 유화물감을 캔버스에 발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 즉 서양화 그리기의 첫걸음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물과 정물, 풍경 등을 그린 이 그림들은 투박하고 거친 붓질과 소박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해서 이내 매우 감각적인 터치가 유화의 제 맛을 잘 살리고 있다. <강변풍경>(1972)과 <여름 숲속에서>(1973)와 같은 작품에 이르면 감각적인 색채와 속도감 있는 붓질, 그리고 탄탄한 구도가 어울려 그림 그리기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신출은 평생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부산의 안팎을 분주히 다니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도시 바깥의 풍경을 그리는 일은 근대미술이 새롭게 발견한 예술적 소통의 첫걸음이다. 붓과 물감으로 대지와 바다를 만나는 일, 미술의 창으로 자연을 만나는 일. 우신출의 저 부산한 붓놀림이 만들어낸 20세기 부산 미술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자산이 아니겠는가.
우신출(禹新出 1911-1992)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나서 동내서당과 부산진소학교를 다녔다. 특별히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익혀 화가로 성공했다. 그는 부산에 거주하거나 왕래하는 일본인 화가들의 영향으로 그림을 배워 부산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양달석, 김남배 등과 춘광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등 부산근대 화단의 터전을 닦았다.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완성하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부산 시내와 교외의 자연 풍경을 그려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평생을 교육자이자 화가로서 살면서 작품활동에 매진하면서 활발한 활동으로 부산지역 화단의 주축을 이뤘다.
아래는 부산일보 버전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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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③ 우신출
서양의 유화물감으로 서양화 아닌 부산을 그리다
▷ 우신출 (禹新出·1911~1992)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나 부산진소학교를 다녔다. 특별한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익혀 화가로 성공했다. 그는 부산에 거주하거나 왕래하는 일본인 화가들의 영향으로 그림을 배웠으며,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완성하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부산 시내와 교외의 자연 풍경을 담은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부산한 붓질로 대지와 바다를 만난 화가
1992년 10월 23일. 여든을 넘긴 노화가는 여느 때와 같이 그림을 그리러 교외로 나섰다. 기장군 기장읍 해동용궁사였다. 가파른 108계단을 다 오른 노화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내 숨을 거뒀다. 분필을 든 교사가 교단에서 쓰러져 생을 마감하는 신화처럼, 그림 그리러 나섰던 화가가 현장에서 삶을 마감한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손수 만든 나비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는 멋쟁이 화가 우신출은 그림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온 삶을 통해서 20세기 한국사회가 서구를 수용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술사는 우신출을 서양화가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를 서양화가라는 말로 호명하고 싶지 않다. 그는 서양에서 유래한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가 그린 그림을 서양화로 부르는 것은 몹시 마뜩찮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았고 부산을 그렸다. 앞뒤 10년을 제외하고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부산 토박이의 삶을 살아간 화가이다. 그런 그가 새로 접한 유화라는 서양에서 유래한 매체를 만나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고 부산서양화가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가 안고 있는 아이러니이다. '근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은 우신출이라는 화가에게 깊이 새겨진 정체성과도 같다. 유화물감과 공업용 페인트를 구분하지 못했던 10대의 우신출이 부산미술전람회를 이끈 중견작가로 성장하고 부산화단의 중진·원로로 활동하기까지 우신출 개인은 서구적 방식의 근대미술을 첫걸음부터 완숙기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변화·발전하는 부산지역 안에서 체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페인트 그림으로 부산미술전람회 입선
우신출이 화가의 길에 접어든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화가들에 비해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소학교를 마치고 독학으로 공부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척과의 인연으로 10대 후반부터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던 중에 임응구(林應九, 1907~?)를 만나 유화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화가가 되기까지는 몇 가지 우여곡절이 더 있었다. 그는 돌연 출가해 범어사로 들어갔다가 1932년 제3회 부산미술전람회에 유화물감이 아닌 페인트로 그린 그림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그는 1934년에 수정사립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미술교사와 장학사를 거쳐 기장중학교 교장을 맡았고 이후 평생을 교단에 있으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우신출이 페인트 그림으로 착각한 유화로 부산 최초의 개인전을 연 화가 임응구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임응구는 한국 근대 사진계를 이끈 임응식의 친형이다. 그는 1928년에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한 이래 부산지역에서 활동한 이른바 서양화가 가운데 선구적인 입지를 가진 작가이다. 서양화, 유화, 전람회 등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창작 방법과 시스템이 부재하던 시절 임응구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양식 그림인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부산 최초 유화 개인전 연 임응구를 만나다
부산지역 미술인 가운데 최초로 당시 유일한 등단 시스템인 선전에 입선한 것은 부산 근대미술의 분기점으로 통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 10주년 기념전으로 '부산미술 80년, 부산의 작가들'이라는 타이틀을 내 건 것도 여기서 비롯한 일이다. 임응구는 남아있는 작품도 거의 없는데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이후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지지 않고 있지만, 부산지역 근대미술을 일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임응구가 1930년에 최초의 서양화가 개인전을 열 때 '페인트 그림'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한 우신출이 임응구로부터 유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우신출은 한국전쟁 이후 부산지역 화단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지냈던 양달석과 비교적 자주 만나며 친분을 유지했다. 젊은 시절부터 부산지역 작가동인 춘광회를 통해서 화단의 동료로서 관계를 돈독히 해온 사이였다. 우신출은 여느 화가들처럼 학교에서 회화 학습을 거치고 유학 경력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부산지역 화단을 이끈 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격의 없이 우신출과 함께 한 춘광회 멤버들을 비롯한 동료 작가들의 열린 자세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학맥과 인맥에 근거한 배타성이 자리 잡기 이전의 유동적인 상황과 부산지역 화단의 근대성을 일군 리더들의 열린 마음.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부산미술전람회(1928~1942)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 사람들이 주축이 된 전람회였다. 일본화와 양화 부문으로 나뉜 이 전람회는 2회 때부터 조선인 임응구에게 출품을 허락했다. 4회 때 임응구와 우신출이 출품한 이래 5회를 넘기면서부터는 서너명 이상의 부산지역 작가들이 출품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배운 화가 임응구로부터 그림을 배운 우신출은 일본의 창을 통해 서양을 접했다. 부산양화전람회는 1932년부터 열리는데 이때 이인성, 우신출, 이상돈, 김원갑이 출품했다. 1937년에는 양달석,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이 참여한 춘광회 첫 전시가 열린다. 우신출은 스무살을 넘기며 빠르게 부산화단의 주역으로 성장해나갔다.
평생 걸쳐 인상주의 화풍 체득
우신출은 평생에 걸쳐 인상주의 화풍을 자기언어로 습득하고 체득한 화가이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19세기 말 유럽의 아카데미 화단으로부터 멸시 받은 낙선전 출품작들을 보고 '참 인상적이군요'라며 조롱한 비평가들의 언급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그 이름은 별칭과도 같은 것인데, 본질을 따져 묻는 이름으로는 외광파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바깥과 빛이라는 두 요소를 강조한 것인데, 이들 인상파 화가들이 바깥에 나가서 직접 그림을 그렸다는 점, 빛의 변화에 따른 사물과 풍경의 변화를 포착해서 그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 외광파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
그들은 아침 해가 뜨는 장면, 눈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풍경, 스모그 가득한 도시의 잿빛 등을 그렸다. 정연하게 다듬어 붓질의 흔적을 비워버린 고전주의 화풍과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때로는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지나간 붓자국과 물감 덩어리를 드러내며 표면질감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 붓을 들고 대지와 만났던 그들처럼 우신출은 평생 자연을 만나 붓과 물감으로 눈부신 빛과 색채의 세계를 열었다.
한국 근대화단의 단면 고스란히 담아
우신출을 보면 한국 근대화단의 단면이 보인다. 그의 초기작에서 만년작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들은 한국의 근대미술이 어떻게 서양을 학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는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행의 길'(1931)이나 '농가풍경'(1932), '정물1'(1933), '초량풍경'(1933), '자화상'(1934), '가지가 있는 정물'(1936), '버드나무'(1944) 등으로 이어지는 초기작들은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실물로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습작기의 우신출이 어떤 진화단계를 거쳤는지를 증거하는 이 그림들은 유화물감을 캔버스에 발라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즉 서양화 그리기의 첫걸음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물과 정물, 풍경 등을 그린 이 그림들은 투박하고 거친 붓질과 소박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해서 이내 매우 감각적인 터치로 유화의 제 맛을 잘 살리고 있다. '강변풍경'(1972)과 '여름 숲속에서'(1973)와 같은 작품에 이르면 감각적인 색채와 속도감 있는 붓질, 그리고 탄탄한 구도가 어울려 그림 그리기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신출은 평생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부산의 안팎을 분주히 다니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도시 바깥의 풍경을 그리는 일은 근대미술이 새롭게 발견한 예술적 소통의 첫걸음이다. 붓과 물감으로 대지와 바다를 만나는 일, 미술의 창으로 자연을 만나는 일. 우신출의 저 부산한 붓놀림이 만들어낸 20세기 부산 미술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자산이 아니겠는가.
김준기(미술평론가·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