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6 이석우 : 20세기 한국사람을 그린 필선의 감성학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7/29 20:29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16 이석우
20세기 한국사람을 그린 필선의 감성학

사람을 그린 화가 이석우는 해방 이후 한국전통회화의 맥을 이은 제도권 교육 체제를 관통한 1세대 작가이다. 그는 충북에서 나고 자라 서울대에서 근원 김용준의 제자로 있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통영에 머문 후 부산에 정착한 엘리트 화가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박노수, 윤형근 등과 미술부 활동을 같이 했고, 서울대에 입학해서는 서세옥, 박노수, 권영우 등을 동기동창으로 만났다. 특히 그는 근원의 제자로서 남종수묵화풍의 영향을 받았으며, 관념산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현실을 담아내는 데에 집중했다.
그는 식민과 내전의 상황을 거친 20세기 한국사람들의 삶을 담았다. 농어촌 서민들의 모습과 도시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서 박제화한 관념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동시대성을 획득한 것이다. 단원과 혜원 이래 현실 속 삶의 모습을 담은 인물풍속화가 근대기 이후 다소 주춤한 상황에서 이석우의 그림들은 보기 드물게 현실지평에서 인물을 끌어낸 수묵채색화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내용적 현실성과 더불어 형식적인 독창성 또한 그가 대가로 성립하는 뚜렷한 근거이다.
또한 그는 부산의 문화예술계를 이끈 네트워커로서도 역할을 했다. 많은 문인과 화가들은 그를 낭만과 풍류를 아는 예술가로 기억하고 있다. 여러 학교에 근무하고, 광복동, 대신동, 송도 등에서 청초화실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심문섭, 박충검, 조일상, 진강백, 최추자, 이영 등이 그가 머문 학교와 화실을 거쳐 간 제자들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부산에 정착한 이석우는 상대적으로 소수에 머문 수묵채색화 계열의 전통을 잇는 데에 있어 허민, 이윤재와 더불어 불모지를 개척한 선구자로 손꼽히는 화가이다.

이석우는 그와 함께 살아간 사람들을 담았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는 서민들의 삶의 모필로 그려냈다. 그는 역사상 수묵채색화 계열의 화가들이 주로 그려왔던 관념 속의 인물을 그리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싼 삶의 정황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그린 이석우는 명쾌하게 자신의 이념을 드러낸 현실주의 화가이다. 그는 화가의 창작을 위해 차분하게 정적인 포즈를 취한 모델의 몸을 그린 것이 아니라 현실 삶의 지평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그렸다. 전쟁과 가난을 겪어낸 척박한 삶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또는 낭만적으로 살아간 동시대 사람들을 그린 것이다.
그는 전쟁 후의 피폐한 삶 속에서 희망을 일군 서민의 모습을 헤아렸다. 동양화 또는 한국화로 불린 수묵채색화 계열 다수의 화가들이 관념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상투적인 소재와 주제를 반복한 것에 비해 매우 그는 독창적인 스타일로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가 그린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끌어들이는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체험한 현실 속의 사람들이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움직이는 상태에 있다. 역동적인 포즈를 통해 생동감을 담아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담고자 하는 정황과 동세를 강조하기 위해서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만 표현했다.
이석우의 회화세계는 절묘한 필선의 감성학을 구현하고 있다. 특히 그의 인물 표현은 몰골법(沒骨法)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한 획의 수묵과 채색으로 형상을 그려내는 몰골법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석우 특유의 역동적인 신체표현을 담보하는 몰골필치들에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골격을 잡아내는 대가의 붓질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물론 신체 이외의 사물을 그려내는 구륵법(鉤勒法)의 현란한 필봉 또한 이석우 그림의 매우 큰 요소이지만, 신체 표현을 위해 각별하게 다듬은 그의 몰골 붓질은 비례와 자세를 자유자제로 표현하기에 더없이 잘 맞아떨어지는 방법이었다.
그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목도꾼을 그린 작품 ‘반(搬)’통해서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의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을 담았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특유의 몰골필체로 간략하면서도 명확하게 골격과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수묵담채의 수욕도와 소싸움 등도 몰골로 그린 인체 표현의 절묘한 맛을 잘 보여준다. 긴 붓을 이용해서 모필의 맛을 최대한 살린 그의 운필은 얼마나 담대하게 화면을 지배하며 일획의 감성학을 구현했던가.

그의 맛과 멋은 필선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다. 그는 20세기 한국사람을 다룬 인간미 넘치는 화제를 통해서 스타일과 정신을 두루 갖춘 대가로 우뚝 섰다. 그는 서민의 고난과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일상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전근대적인 주문생산으로부터 탈피한 근대적 의미의 예술이 어디에 초점을 맞춰 두어야 하는지를 몸소 알려준 작가이다. 예술의 장소성과 시대성을 기본으로 현실에 뿌리내리고 당대의 이슈와 동행하는 예술. 당대 삶을 소상히 헤아리고 예지와 통찰로서 새로운 성찰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예술. 이것이 청초 이석우가 꿈꾸며 실천한 예술이다.
박제화한 전통회화의 관념성을 탈피하고 현실성을 획득한 것은 이석우 회화세계의 최대 이슈이다. 특히 예술적 성찰의 시선으로 인물을 다룸으로써 수묵채색화가 그 자체로 목적의식적으로 보존해야할 가치이자 방법이라는 식의 안일한 인식을 벗어났다. 그는 삶의 역동성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방법적 다양성을 창출했다. 내용과 형식, 지향과 방법의 조화를 찾아내기 위해 필선을 중심으로 채색을 가미하고 생활주변에서 표현의 소재와 주제를 찾는 김용준의 가르침을 이석우는 매우 창의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그는 민족미학의 범주 안에서 전통을 포섭하고 목적의식적으로 서민의 정서를 상기하면서 생활미학을 갈구했던 후배 세대들의 미술운동보다 훨씬 앞서서 서민들의 일상을 매우 서정적인 차원에서 다룸으로써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의 거대한 시각을 강조하기보다는 일상의 미시사에 주목하고 있는 점 또한 이석우의 그림을 한층 더 친숙한 공감대 속에 놓이게 하는 요소이다. 그는 낭만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의 삶을 자상하게 들여다본 리얼리스트이다.

적게는 두어 명에서 많게는 십수명이 등장하는 크고 작은 풍물패의 연주장면은 이석우 회화의 역동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화제이다. 무수히 많은 농악패 모티프를 다룬 그는 상모 돌리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평면 위를 종횡무진하는 부드러운 곡선 속에 담긴 힘의 미학을 구현했다. 화려한 색채를 가미한 농악패 그림은 절망을 넘어 희망을 열어나간 암흑의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1980년대에 다수의 리얼리스트들이 다루곤 했던 전통미학이나 민족미학의 주제의식과 표현방법이 이미 1970년대 이석우의 농악패 연작에 담겨 있다는 점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면 전체를 역동적인 운율로 감싸는 농악패의 희열에 찬 유희를 비롯해서, 생선을 파는 노점상의 일상, 무거운 짐을 나르는 목도꾼의 노동, 세월을 낚아 올리는 낚시꾼의 휴식 등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 모든 사람들의 면면은 20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간 서민대중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낮잠 자는 사람, 목동, 소달구지, 씨름하는 장면, 소싸움 등 농촌생활의 서정을 그리기도 했으며, 머리에 짐을 진 아낙, 길거리 좌판, 시장 풍경, 목도꾼의 노동 현장 등 도시 서민의 삶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들을 다룬 몇몇 작품들은 인체를 표현한 운필의 맛과 힘이 넘쳐나는가 하면, 마치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내세운 이른바 조선화의 담백하고 경쾌한 분위기와도 상통하는 대목이 있어 한국현대 회화사에 있어 이석우의 너른 폭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작품들도 눈에 띈다. 광복의 감격을 다룬 작품 ‘해방’은 율동적인 운율로 구성된 먹그림이다. 화면 가득 흐르는 격정에 찬 운필과 담채는 고난과 역경 속에 쓰러진 사람들과 역동적인 자세로 환희에 차 태극기를 펼쳐들고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담고 있다. 질곡의 역사를 거쳐 온 20세기 한국사람의 시선으로 인간을 다룬 이석우. 그는 차분하고도 강렬하게 예술적 표현으로 시대적 소명의식을 실천한 예술가이다.

이석우는 1928년에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전주, 호는 청초(靑艸)이다. 1946년에 청주상고를 졸업하고 나서, 청주사범학교 특수강습과를 수료했으며,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으나 4학년 재학중에 한국전쟁을 만나 군에 입대했다가 건강이 안 좋아 통영으로 후송돼 제대했다. 휴전 후에 통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부산 대신중학교로 옮기면서 부산에 정착했다. 1953년에 미국공보원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청맥미전(1957-58), 동명서화원전(1960) 등을 비롯해 전후 화단의 굵직한 기획전과 단체전에 출품했고, 이외에도 전국 각 도시와 일본, 중국, 미국, 터키 등에서 초대전 및 기획전에 참가했다. 1987년 지병으로 타계했으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차남 이민한이 화업을 잇고 있다. 작고 후인 1989년에는 나고야세계디자인박람회에 그의 대표작 ‘농악환월도’가 18미터 길이의 도자벽화로 제작, 전시 후에 기증되었다. 부산대, 부산여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동아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부산미술협회 회장, 부산미전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한국예총 부산지회장 등을 지냈고, 눌원문화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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