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노동과 자본 또는 국가 : 아트인컬쳐 프리즘
critic & column | 2007/03/27 09:36
예술노동과 자본 또는 국가
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예술노동을 사회적으로 교환하는 방식과 그 결과에 관한 실태조사가 나왔다. 대다수 언론은 문화관광부가 문화예술인 2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6 문화예술인 실태조사> 가운데서 ‘설문조사 대상자 예술인 58%가 월수입 100만원 이하’라는 내용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달진미술연구소가 조사한 시각예술인 실태조사 결과 또한 60%에 가까운 응답자가 월수입이 없거나 100만원 미만인 것으로 답했다. 친척이나 지인들을 통해서 작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41.8%에 달한다는 통계 수치 또한 한국미술계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보도 기사들은 대부분 예술인들의 열악한 경제구조와 한국의 미술관련 정책과 시장구조를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에 한겨레 노형석기자의 분석은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내용을 앞세워 눈길을 끌었다. ‘순수 작업을 통한 월수입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가 약 20%에 이르렀다’며 부업까지 합치면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2백-3백 사이 8.5%, 5백만원 이상 5.6%, 1천만원 이상 3%’의 통계수치도 제시하고 있다. 미술시장의 활성화와 정부의 지원정책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평론가 하계훈의 평가를 인용하고 있는 이 기사는 그러나 대다수의 작가들은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다며 고학력 저소득, 후진적인 작품 판매 방식 등을 지적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예술인들은 가난에 순응한다. ‘그래도 미술인들은 연극인들보다는 낫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몇 년전에 나온 연극인 실태조사에서는 80%이상이 연극인 스스로를 저소득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렇듯 가난을 감수하면서도 예술가로 살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것이 예술의 매력이라면 매력일까? 가난을 선택한 예술가들의 상황을 일컫는 말이 있다. 자발적 가난. 우리는 이 말을 통해서 근대적 예술가 주체의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며 그 뒤에 화려한 광배를 갖다 붙이곤 한다. 그러나 가난에도 정도가 있다. 살림살이가 괜찮은 나라에서는 예술인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선택할 만한 기본적인 여건을 만들어 준다. 각 나라마다 형편이 다르긴 하지만, 예술인 조합이나 협회에 가입하면 기초적인 보험혜택과 더불어 생활지원과 창작지원도 이뤄진다. 한국의 예술가들도 이러한 사례들을 익히 알고 있는 바, 얼마 전에 나온 미술가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뉴스가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전업작가 96명이 미술인노조를 결성했다는 소식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보장하는 노동3권의 주체로서 노동의 조건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것을 기본으로 노동자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 향상을 모색하는 노동자들의 결사체이다. 노동조합은 사용자라는 대립항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미술인들의 사용자는 누구인가? 이 난감함을 돌파하는 논리는 “사용자는 국가”라는 설정이다. 미술가들의 노동자성을 주장하면서 한국노총 산하 한국예능인노조연맹에 산별노조로 가입함으로써 한국미술인노동조합은 개별 사업장 노조와는 달리 예술영역 또는 미술영역 전체를 놓고 사회적 차원에서 의제설정과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방식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난 제도이다. 그러나 예술노동자가 조합의 형태로 결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의 노동 그 자체를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놀라운 사실은 발견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가 그 이전의 사회와 변별되는 분기를 획정한 마르크스의 통찰도 예술노동의 특수성을 사회적 교환체계 안에서 파악해내지는 못했다. 노동조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와 고용인의 신분이어야 하지만, 예술가들의 경우 예술노동이라는 상품을 정해진 약속에 따라 특정 장소에서 정기적인 시간동안 특수한 목적에 따라 판매한다기 보다는 말 그대로 자율성에 입각해서 창작활동에 임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인 작품 또한 일반적인 상품시장과는 매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예술은 자본주의 논리에 위배되는 생산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자본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에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공동체의 경영을 맡고 있는 국가가 예술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뒷받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인의 예술노동이 그 자체로 공공성을 띄는 것이므로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지원이 전제해야 하는 것은 예술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관한 새로운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의 자율성을 근거로 자폐적 언어의 장에 갇혀있는 근대적 예술소통 체계와 그에 입각한 가치관으로는 시민사회를 설득하기 어렵다. 지원을 말하기 보다는 지금의 경제 시스템에 맞게 교환가치 체계를 합리화 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조합과 더불어 예술협동조합 모델도 연구하고 실험해볼 만한 일이다. 문화관련 예산이 국가예산의 0.7%를 밑돌고, 예술위원회의 기금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우울한 현실 속에서 부동산 억제 정책으로 갈 곳을 잃은 유동자금이 미술시장으로 몰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새로 발행된다는 10만원짜리 지폐에 김구선생초상을 찍기 전에 그가 염원한 문화사회의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예술의 예술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김준기 (미술비평, www.gimjungi.net)
* 아트인컬쳐 4월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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