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재구성하는 빛의 드로잉 : 이소영

critic & column | 2006/09/10 04:36



시간을 재구성하는 빛의 드로잉

예술가는 자발적 동력에 의해서 존재론적인 소외의 상황을 연장해나가는 존재들이다. 이소영도 오늘날 예술가들이 처한 소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술로서의 삶 자체가 이미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안고 있지 않은가. 때로는 예술의지라는 말을 감성의 영역이 아닌 이성의 영역으로 해석하면서까지 예술가로서의 삶을 추동하는 ‘저 막연하고 막막한 에너지’가 고갈될 때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회의하는 것도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다. 작업에 매달리면서도 그것에만 전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심적 부담은 일종의 콤플렉스로 자라나기도 한다. 이소영은 거의 대다수의 예술가들에게 존재하는 이러한 예술에 대한 회의를 넘어서서 차분하고 단정한 언어로 공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해법은 독설이 아닌 긍정이었다. 그러나 그 긍정은 계몽적 의미의 순응이라기보다는 지독한 부정을 관통한 이후의 것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긍정이라고 부를만하다.

그는 긍정의 역설을 담아내기 위해 감성 그 자체를 언어화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자 언어보다 앞서는 몸의 언어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는 문자언어의 매개 없이 소통할 수 있는 본원적인 소통을 꿈꾸고 있다. 시각예술은 그러한 소통의 원천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이소영의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흑백의 화면들로 이뤄져있다. 특히 어두움 속에서 미세한 빛만으로 사물의 존재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정제된 표현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통해서 공간을 응축한 이소영의 사진합성 이미지는 시간을 재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소영의 근작들은 공간을 재구성하는 빛의 드로잉이다. 그것은 암흑의 공간 속에서 한 줄기 빛에 의해 포착된 사물을 대면할 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뭉클한 존재론적 의미를 유발한다.


이소영의 지금은 그의 과거를 닮았으면서도 과거와 다르다. 그는 전시장 벽면의 텍스트에 조명을 쏘았던 첫 번째 개인전 이래 대체로 화려한 시각 효과를 추구해 왔다. 빛을 이용해서 소통의 부재 상황을 암시하고자 했던 이러한 작업 이후에도 그는 사이키 조명을 사용하는가 하면 전동모터를 이용해 천정에서 바닥까지 이어진 필름을 파르르 떨며 돌게 만든 후 그 필름에 반사된 빛의 떨림 효과를 극대화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얼굴에 영상을 쏘기도 했으며, 형형색색의 자연 이미지들을 오브제에 투사하기도 했다. 신전 내부에 역사적 사건과 현실 속의 이슈 이미지를 투사한 지난 번 개인전 이후 이소영은 점점 움직임을 통해서 빛의 떨림을 포착하거나 역동하는 이미지의 연쇄를 보여주고자 했던 경향들로부터 벗어나서 매우 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극도로 절제된 빛을 통해서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테이블 위의 정물들과 또 다른 사물 이미지를 겹쳐서 만든 일련의 합성이미지 연작들 속에서 매우 감각적인 섬세함을 드러낸다. 이들 합성 이미지 연작은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가시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는 인공적인 실사촬영 이미지와 생태 이미지 등을 결합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낸다. 예술이란 창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믿음 아래서 예술적 창조물을 고차원적인 정신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용인하는 것이 이른바 예술제도의 관행이다. 이러한 관행은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엄격하게 적용되곤 하는데, 이소영은 이러한 예술적 가치를 가진 이미지의 선택이라는 관행을 벗어나기 위해서 ‘창조적인 예술 행위가 소외시키는 대상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인 방식의 ‘탈소외의 발견’이다.

정물 실사 사진들끼리의 결합과 더불어 그 외에 실사 이미지와 채집 이미지의 결합도 있다. 이들은 서로 겹치거나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유리잔, 촛대, 종, 컵 등의 기물들은 기명절지 방식의 지시기능을 가진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존재 일반을 현현하기 위한 사물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소영의 합성이미지들 속에서 이미지의 기시 기능과 상징 기능을 분별하여 결합과 분리, 반복과 중첩 등을 의미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유보조항으로 남겨둘 일이다. 다만 우리는 이들 암흑 속에서 빛나는 사물의 존재들을 마치 라인드로잉을 보는 것과 같은 아슬아슬한 선으로 처리한 이소영의 감각의 절제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색채의 요소를 극도로 자제하고 흑과 백, 어두움과 밝음이라는 두 가지 요소만으로 이루진 이미지의 중첩과 결합은 현란한 색채와 밝은 빛의 세계로 이뤄진 화면에 비해서 훨씬 더 매력적인 시지각적 자극의 요소로 작용한다.


이소영의 이미지 결합구조는 이분법의 엄격한 틀을 고수하고 있다. 의자와 장미, 의자와 비둘기, 테이블 위의 정물들과 비둘기 등을 합성한 <그곳 혹은 다른 곳> 연작들은 흐트러짐 없이 이분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합성 이미지들은 테이블 위의 정물과 여타의 사물의 결합이라는 동일한 구조의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들 합성 이미지들은 실사 촬영을 통해서 얻어지기도 하지만 채집된 이미지를 사용한 것도 많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이미지를 다운 받아서 자신이 촬영한 이미지와 합성하는 것이다. 소라와 암모나이트, 달팽이와 깃털, 조개와 조개, 바다생물과 눈 결정체, 꽃과 꽃 등의 이미지들을 합성한 <얽혀있는 실재> 연작은 떠도는 이미지들을 채집한 후에 이들 이미지의 고유한 지시 기능과 무관한 방식으로 합성과정을 거친 작업들이다. 특정한 실재를 표상하고 있는 특정 이미지는 선형적인 지시기능을 가지지만, 이소영의 합성 작업은 그 이미지의 의미를 탈색하여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재배치한다. 이것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느끼는 일종의 감성적 쾌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두 개의 비디오 클립을 나란히 보여주는 동시상영 영상 작업 는 허공 속에서 퍼덕 거리는 비둘기의 날개짓과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하얀 천을 순간 포착하고 있다. 이들 두 화면은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한 ‘짧은 시간 길이’를 가진 것인데, 이소영은 이 시간 길이를 왜곡하여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함으로써 애초의 움직임과는 다른 양상의 화면을 만들어낸다. 느린 속도의 재생 과정에서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보완하는 애프터 이펙트를 가미함으로써 순간적으로 비둘기의 날개의 형상을 벗어나는 비정형의 화면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디지털 미디어 아트의 특징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선형적인 시간 길이의 변형 혹은 조율’을 통해서 나타나는 또 다른 이미지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살아있는 생물의 날개짓과 허공 속을 유영하는 천의 면면을 ‘늘어난 시간 길이’로 재생함으로써 실재의 시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또 다른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공간의 문제를 넘어서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따라서 이 작업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시간을 재구성하는 빛의 드로잉이다. 존재를 현현하는 공간 속의 사물과 시간의 재구성을 통해서 존재론을 극대화하는 이소영의 감각적인 언어들은 그리하여 확연히 문자언어의 매개를 넘어선 근원적인 소통의 창을 열어놓고 있다.

김준기 (미술비평)

*이소영 개인전 서문

2006/09/10 04:36 2006/09/10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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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im 2006/09/11 10:37

    to yun jun.
    i am in shanghai. i finished this essay sunday morning. and i couldn't call her. so maybe she is wating... would you tell Soyeong i finished an aticle for her and capture it here, please...
    and i will go to seoul friday... see you

  2. 이원석 2006/09/13 12:59

    말도없이 어디간겨...전화도 off 되있고..혼자간겨? 거긴 조아? ㅋㅋ
    금욜오면 전화한번 주소..

  3. 김피디 2006/09/19 15:38

    탈근대 시대의 동시대적인 감성을 향하여

    인류는 감성적 소통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나누는 방식을 개발해왔다. 그것은 20세기를 지나면서 확고한 제도이자 관행이며 개념이고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예술적 소통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있다. 특히 대학이라는 학제 시스템을 통해서 예술을 학습하고 경험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그들에게 전문화된 영역을 부여했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의 전통 회화의 방법과 이념을 동시대의 예술 언어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목표를 가진 동양화과라는 학제 편성을 만났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을 근거로 편성된 이 시스템은 한때 동양화단이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이제 서서히 종식을 선언하고 있다. 이제 동시대의 회화라는 보편적 개념을 향해 서서히 지평 혼융을 시작한 마당에 먹과 안료를 가지고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집약한 동양화라는 제도이자 관행이며 개념이고 영역이 어떻게 변모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있는 비평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17인의 성신여대 대학원생들의 전시 <뜨거운 돌>은 이런 관점에서 매우 뜨거운 이슈를 안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동시대는 물론이거니와 향후 수십년의 미래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 속에는 동시대의 예술적 편향과 더불어 특히나 동양화를 전공한 화가들의 미래상이 담겨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회화의 지층을 확인해보고 동시대의 회화 일반을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제해 둘 것은 이들이 단일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각자 나름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오고 있으므로, 일관된 전시의 맥락을 가지고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보다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몇 갈래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는 점이다.

    가장 압도적인 것이 풍경이다. 산수풍경과 일상담론이 중첩된 결과로 나타나는 이러한 그림들은 우리를 둘러싼 시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를 그리는 경우의 그 풍경이다. 김윤경은 짧은 선이나 점을 가지고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그의 선과 점들은 길을 만든다. 그에게 있어서 길은 풍경으로 이어지고 길에서 만난 세상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자신의 감성을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풀어내기 위한 시발점을 이룬다. 김은진은 나무들로 구성된 숲의 모습을 그린다. 그는 낱개의 조형요소들에 부유하는 자아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불안한 자아의 모습을 풍경을 통해서 담아내고자 한다. 결국은 풍경을 그리되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셈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주변의 나무들을 그리는 배한나는 부분적으로 생략되거나 강조하는 화면의 완급조절이 돋보이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대상의 형상을 화면 위에 옮겨놓는 것을 넘어서 매우 독창적인 화가주체의 감각에 따라 재구성된 화면을 제시함으로써 회화란 여전히 하나의 스타일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장성희 또한 나무숲과 빌딩숲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것을 그려낸다. 그의 그림에서는 바라보는 이와 그려내는 이 사이의 객관적 거리 같은 것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풍경을 그릴 때처럼 사람을 그릴 때도 그는 부분과 전체의 모습을 엮어서 하나의 구조체로 재구성된 회화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풍경을 그리되 그것을 자신의 내러티브나 회화적 관심을 관통하는 하나의 창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배현미는 ‘이기주의’나 ‘여행’ 등의 화제를 붙여서 나무나 자연 또는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그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점을 찍는 일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점은 평면 위에 형상을 구성하는 회화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리기의 목적이기도 하다. 만화적 상상으로 처리되었으며 동시에 민화적 도상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이미지를 그리는 이지영 같은 경우도 있다. 그는 실재 생태의 모습을 인간의 구경거리로 박제화한 동물원 공간의 모습을 실재의 모사로 보고 그것을 다시 모사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생태자연의 실재에 대해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전소진은 만화나 일러스트풍의 회화작품을 통해서 일반적인 서술구조와는 다른 방식의 풍경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고전적인 풍경화를 판타지소설 수준의 이야기 구조로 전환하여 몽환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사물의 모습을 하나의 시각적인 기호로 인식하고 그것을 재해석함으로써 삶의 정황과 정서들을 성찰해보고자 하는 태도를 가진 그림들도 많다. 이상순은 도시의 모습을 간략한 선묘나 색면으로 처리하면서 복잡한 외연 속에 담긴 단순한 구조를 찾으려고 한다. 레코드 판의 형상을 희노애락의 얼굴 기호로 표현하여 인간 삶의 정황을 심플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김민정은 옷이나 구두 등의 패션용품들을 컬러풀한 형상으로 기호화하여 먹그림 풍경 위에 배치한다. 그는 먹그림과 대비되는 이질적인 색면들을 통해서 욕망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신지원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키워드를 주방의 풍경이나 자동차 실내 풍경 속에 담는다. 부엌의 배관구조나 자동차의 각종 제어장치 속에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나 감각의 흐름 등을 담아내는 방식이다. 이은경은 자신이 접하는 일상의 장면과 풍경들을 담은 드로잉을 선보인다. 그 드로잉들은 작위적인 의도를 가지기보다는 하나의 놀이로 자리잡은 그림그리기이지만 그 속에는 순간의 감정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선이 녹아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태도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경향들이다. 나유리는 욕망에 충실한 동물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선묘와 색면으로 구성된 인간의 얼굴이나 인체의 형상을 통해서 권력욕에 사로잡인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다. 문성윤은 강렬한 원색과 먹색을 구사하면서 자아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자신의 이런저런 형상들을 그려낸다. 그림그리기를 통해서 자신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를 가지고 기성의 제도화된 방식을 벗어난 자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조원득은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 기재들을 코믹한 도상과 텍스트를 동원해서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이기도 하며 인간 모두의 상황이기도 한 이러한 삶의 모습들을 만화적 상상의 이미지와 텍스트로 담아낸다.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그림들 가운데는 그것을 하나의 스타일의 문제로 해석해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열어 나가는 경우도 많다. 양호정은 색면과 선묘들로 패턴화 된 얼굴을 반복하여 나열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때 그의 선과 면들은 동일성 위에서 반복적인 운율이나 변주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과 차이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유선영은 그림 그리기의 과정을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인간의 모습을 독특한 자세들과 상황설정으로 담아내며 묘사방식에 있어서도 나름의 독창적인 색깔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조이영은 얼굴을 그린다. 그는 ‘침묵을 입에 물고’ 또는 ‘네가 좋아’ 등의 감성적인 화제로 자신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압축적인 구성의 힘을 증폭시킨다. 그는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도 여유있게 비울 줄 알고, 마른 붓으로 그리면서도 충분히 촉촉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상의 서너 갈래 혹은 너댓 갈래 흐름들은 전제한 바와 같이 개별 작품들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일별해보려는 시각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그림의 대상에 관한 관심이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관찰해보고 그 대상을 화면위에 표현하겠다는 태도는 오늘날 회화 작업의 대세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점을 찍거나 선을 긋거나 면을 만들거나 심지어는 종이를 뜯어내는 식의 온갖 매체 실험이 일정한 성과를 이뤄낸 후에 회화의 내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회화의 외부로 다시금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커다란 흐름으로 해명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모든 매체와 장르의 예술에 걸쳐 유사한 흐름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들 17인의 출품 작가들이 지향하는 바를 가늠해 볼 때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는 것이 대상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을 그렸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에게는 천혜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표현을 억압하던 시기를 지나 표현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악재일 수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세대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난점이기도 한 이 악조건 또는 악영향이라는 것은 대상 표현이 난무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공허함 같은 것이다. 무언가 바라보거나 관찰해보고 그 대상을 그리는 방식을 채택한 대다수의 화가들에게서 ‘왜 그리는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략 가늠해본건대는 일상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이와 같은 개념없는 그리기는 오늘날 회화에서 성찰적 지점들을 점점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해왔다. 오늘날 회화의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표피적인 일상성 담론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해본 몇 갈래의 흐름들은 풍경과 사물과 인간의 모습으로 압축할 수 있다. 좀 더 나눠서 풀어보면 시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 작가의 내러티브나 회화적 관심을 관통하는 창으로서의 풍경, 시각적 기호로 재해석된 사물, 삶을 성찰하는 계기로서의 자신의 모습, 회화적 스타일의 문제로 귀결되는 인간의 모습 등이다. 이러한 흐름의 작품들이 동시대의 반짝이는 이슈와 첨예한 지점들과 얼마만큼 치열하게 만나고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비평적 진단은 작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체계적인 영역분화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던 패러다임의 역할모델을 딛고 탈근대적인 예술가 주체로 자신을 재정립해내려는 각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고, 회화와 비회화를 구분하며, 동양화와 비동양화를 구분하는 20세기 패러다임을 딛고 진정한 탈분화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것은 20세기 작가의 몫이 아니라 21세기 작가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그 시작이 여기에 있다. 이들 열일곱 명의 젊은 작가들 속에 이행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이 담겨있다.
    김준기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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