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앞바다의 섬

lense & world | 2009/06/2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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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9 15:08 2009/06/29 15:08

예술가들은 어떻게 무리수를 두는가 : 알로곤 어페어 리뷰

critic & column | 2009/06/27 15:20


예술가들은 어떻게 무리수를 두는가

20세기 모델의 예술가 상이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모더니즘 시대가 열광해마지 않았던 천재적 존재로서의 작가의 위상이 ‘작가의 죽음’으로 공언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예술가 주체로부터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 화폐로 치환 가능한 예술상품의 생산자로서의 예술가 이상의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 예술가에게서 일상의 평범함이 아닌 일탈의 비범함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구축하고 직조하는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들의 존재를 수의 세계로 치환해서 얘기하자면 유리수가 아닌 무리수에 탐닉하는 존재들에 가깝다. 예술가들은 어떻게 무리수를 두고 사는가? ‘무리수 사건’을 다루는 이 전시는 세 명의 예술가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는 탈은폐와 비논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알로곤(alogon). 유리수가 아닌 수, 그래서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수. 무리수다. 피타고라스는 무리수를 발견하고는 그 존재를 은폐하려고 했으나, 그의 제자 히파수스가 무리수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히파수스는 그 댓가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것은 피타고라스 시대나 지금이나 지식에 관한 욕망과 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전시가 ‘무리수 사건’을 타이틀로 내세운 것은 무리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히파수스와 같은 예술가들이 실체를 알 수 없는 것, 풀어낼 수 없는 진실, 숨겨진 이야기들을 캐내고 들춰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각기 성향도 다르고 방식도 다른 고낙범과 노순택, 양아치 세 작가를 맥락화하는 프레임이다. 세 작가의 차이는 알로곤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동일성과 차별성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고낙범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비정형과 비논리이며 모순에 가득 찬 불완전한 세상이다.
고낙범의 출품작들 오각형이라는 도형으로부터 나온 파생변종 회화이다. 그의 신작들은 단일한 색채를 선택해서 거대한 초상화를 그리거나 인상주의 회화 작품에서 색 값을 추출한 후 수평의 색면으로 재구성했던 기존 작업들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것이다. 오각형은 사선으로 이뤄진다. 삼각형이나 사각형에 비해서 오각형은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안고 있다. 규율과 신비, 섭리를 의미하는 정오각형이 아닌 삐뚤어진 오각형들을 통해서 통제불가능한 에너지를 가진 예술가의 상상력을 드러낸다. 그가 펼치는 무리수 프레임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순택은 <얄읏한 공> 연작을 냈다. 노순택이 명명한 ‘얄읏한 공’은 지금은 사라진 마을 대추리를 지켜보고 있는 레이다 돔이다.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에 있는 거대한 공은 대추리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던 노순택에게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힘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대추리의 일상과 사건을 포착한 노순택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그 거대한 구체는 판옵티콘 그 자체이다. 이번 전시에는 개인전 이후의 파괴된 대추리 마을을 찾아서 찍은 미발표작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말에 전시장 문제로 수난을 겪었던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 : 들 가운데서> 때 손상된 액자를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작품의 팔자’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노순택에게서 히파수스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양아치의 루머건 시리즈 또한 정교하게 짜여있는 시스템에 균열을 내며 루머를 퍼트리는 가상의 존재를 등장시킨다. 미들코리아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그것을 알로곤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의 공간으로 삼아온 양아치는 예술가의 존재가 상상공간 속의 액티비스트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양아치의 분절적 상상체계들은 일련의 서사 구조 안에서 점점 맥락을 형성해가고 있다. 저격수 차지량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의 가상의 캐릭터들 만들어 내고 김씨 공장(Gim's Factory), 바이크, 루머건 등의 설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꾸준히 이어나가는 스토리 텔러의 면면이 분절적이면서도 맥락화한 사진과 드로잉 작업들에 담겨있다.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판명가능한 수인 유리수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무리수를 끄집어내는 예술가 주체의 존재는 예술을 문화상품 이상의 것으로서 여전히 유효한 사회적 노동의 한 요소임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예술가 주체의 존재 자체가 무리수와 같은 비논리의 세계일 수 없다. 예술가 주체 또한 세계의 정교한 시스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비예술가와 변별하는 지점은 그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는 시도를 감행한다는 점이다. 이 전시의 미덕은 세 작가의 작품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와 개체, 전체와 부분, 시스템과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분주히 오가면서 무리수 두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들춰냈다는 데 있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2009년 7월호 아트인컬쳐 기고문 : [알로곤 어페어] 리뷰

2009/06/27 15:20 2009/06/27 15:20

찍사와 모델의 교감, 서상호와 첸궝과 이가영의 경우

lense & world | 2009/06/2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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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서상호와 첸궝과 이가영 등 부산과 베이징의 여러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서상호는 오픈스페이스배 디렉터다. 지금까지 미술판에 존재해온 유형과는 좀 부류가 다른 좋은 예술가다. 첸궝은 30대후반의 중국작가다. 1989년 천안문 현장을 군인으로서 목격했다. 세월이 지나 당시의 장면을 회화로 표현한 작가다. 이가영은 부산 출신의 젊은 작가다. 부산예고를 거쳐 한예종을 졸업하고는 베이징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 겉모습도 아름답고 속마음도 예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로 교감한다. 길고 짧은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충분히 교감한다. 바디랭귀지의 제일 수단으로 주로 손을 꼽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정확한 것이 있다. 눈빛이다. 이 사진들은 아트스트 서상호가 누른 것이다. 만약 내가 눌렀으면 저 사람들의 저토록 자연스러운 모습이 안나왔을 것이다. 나는 그날 초면이었으므로 그들과 눈빛을 나누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서 찰나적으로 존재하는 교감이 좋은 사진을 만들어 낸다. 찍사와 모델의 교감, 그것도 눈빛으로 나누는 순간의 느낌들이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낸다.
2009/06/23 11:36 2009/06/23 11:36

초여름 햇살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무지개솜사탕꽃

lense & world | 2009/06/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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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햇살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꽃.
나는 이 꽃의 이름을 모른다.
그 이름을 물었더니 누군가 무지개 꽃이라고 불렀다.
옆에서 솜사탕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임의로 새 이름을 지어 부르기로 했다.
무지개솜사탕꽃이라고.
2009/06/19 14:05 2009/06/19 14:05

김구 그녀 090614

lense & world | 2009/06/1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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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8 09:49 2009/06/18 09:49

액티비스트포럼 연속토론 V : 예술가 주체의 다극화와 예술행동

project | 2009/06/11 02:59


액티비스트포럼 연속토론 V
예술가 주체의 다극화와 예술행동

시각예술 관련 연구자와 비평가들의 네트워크인 <예술사회포럼>은 ‘액티비스트포럼’ 행사의 일환으로 연속토론을 열고 있다. 액티비스트포럼 연속토론은 예술행동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지속가능성한 예술담론을 창출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다. 첫 번째 장은 부산의 대안공간반디에서 ‘액티비스트 리포트’라는 전시 개막일에 열렸으며, 두 번째 장은 서울의 지행네트워크에서 다양한 분야의 평론가들이 모여서 비평을 위한 시론을 다뤘다. 세 번째 장은 안양의 스톤앤워터와 공동주최로 ‘로컬리즘과 액티비즘’을 다뤘으며, 네 번째는 도시공동체와 예술행동을 다뤘다.

앞으로 몇 차례 더 액티비즘과 관련한 각 분야의 실천가들과 이론가, 비평가 그룹이 함께 토론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 활동이 나날이 넓고 깊게 번져가고 있다. 이번 행사는 <액티비스트 포럼> 연속토론의 다섯 번째 장이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예술가 주체의 다극화와 예술행동”이라는 주제로 액티비즘과 다양한 예술가 주체의 관계를 파악해볼 것이다. 다양한 존재 방식과 실천 방식으로 다양화 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실천 사례들을 듣고 이에 대해 비평적인 언술을 시도해 봄으로써 행동주의 예술의 확장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자리이다.

□ 개요
■ 행사명 : 액티비스트포럼 연속토론 V - 예술가 주체의 다극화와 예술행동의 위치
■ 일시 : 2009.6.13 오후 2시-5시
■ 장소 : 문화우리
■ 참가자 : 김문경 김유선 김준기 노순택 민운기 박경주 손문상 양아치 연영석 윤태건 이중재 채은영
■ 주최 : 예술사회포럼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협찬 : 문화우리

□ 토론 주제
행동주의 예술의 실천 사례와 전망 / 다양한 예술가 주체들과 예술행동 / 공동체 예술운동과 행동주의 예술의 관계 / 예술행동의 예술적 지위와 역할 /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관계 / 지역적 실천의 상호교류의 문제 / 도시생태와 예술행동의 만남

□ 액티비스트포럼 연속토론
■ 연속토론 1회 : 액티비스트 리포트 전시 개막 토론 / 대안공간반디 2008.11.14 오후 7시-9시 / 김준기 이광기 송성진 배인석 신호윤 신양희 구헌주 최윤정 김지문 정윤선

■ 연속토론 2회 : 액티비즘 비평을 위한 시론 / 2009.4.4. 오후 6시 - 10시, 지행네트워크 / 박영균 김지연 김준기 홍지석 오창은 이명원 최창근 권경우 고영직 신보슬 김소연

■ 연속토론 3회 : 로컬리즘과 액티비즘 / 2009.5.9 오후2시-5시, 안양 스톤앤워터 / 김준기 박찬응 김강 백기영 이원재 드라마고 김기현 홍지석 김기환

■ 연속토론 4회 : 도시공동체와 예술행동 / 2009.5.23 오후 3시-5시, (가칭)서교예술사무소 / 김가연 김기환 김두해 김종길 김준기 우명화 유창복 이중재 함다혜 홍지석

■ 연속토론 5회 : 예술가 주체의 다극화와 예술행동의 위치 / 2009.6.13 오후 2시-5시, 문화우리 / 김문경 김유선 김준기 김지연 노순택 민운기 박경주 손문상 양아치 연영석 윤태건 이중재 채은영 황석권

■ 연속토론 6회 : 전위 혹은 통섭으로서의 예술행동 / 2009.6.

■ 연속토론 7회 : 민중미술과 예술행동 2009.6.

■ 연속토론 8회 : 새로운 공공미술과 예술행동 2009.

■ 연속토론 9회 :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예술행동 2009.

    * 향후 일정 변경 가능성 있음.

2009/06/11 02:59 2009/06/11 02:59

욕망과 분출과 절제가 공존하는 부산 태극도마을

lense & world | 2009/06/10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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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감천2동 태극도마을. 집과 집, 색과 색, 골목과 골목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이 숨막히는 광경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하다. 산비탈을 깎아만든 이곳 태극도 마을은 산개와 집약, 개체와 군집, 낱개와 연쇄가 공존하는 곳이다. 슬레이트집과 슬라브집이 줄지어 있고, 일층집과 이층집이 나란히 있고, 윗집과 아랫집과 옆집이 맞닿아 있다. 하늘색과 연두색, 파란색과 하얀색, 그 사이를 비집고 구석구석 자리잡은 보라색의 낭만을 보라. 집과 집 사이로 촘촘하게 뻗어있는 골목길의 네트워크도 있다. 욕망의 분출과 절제가 공존하는 동네사람들의 지혜가 곳곳에서 번득인다. 골목 골목을 조심스럽게 걸어다니다보면 어느새 진한 삶이 베어있는 그곳 마을 사람들의 각별한 삶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이 동네에 깊이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인의 시선을 자각하곤 한다.
2009/06/10 22:22 2009/06/10 22:22

안개 낀 해운대 앞바다

lense & world | 2009/06/0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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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어느날 저녁이었다. 해운대 가장자리 미포 앞에서 안개 낀 해운대 앞바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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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오륙도와 그 앞의 괴물 에스케이뷰 아파트. 거대한 자연이 거대한 인공과 공존하고 있다.
2009/06/04 21:58 2009/06/04 21:58

2009년 5월 말의 일주일

lense & world | 2009/06/0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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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한 그날,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오전.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원 일동은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세미나실에서 "변화하는 미술관 정책과 큐레이터의 역할"을 이야기한 후 프래카드 앞에 나란히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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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홍대 앞 서교동예술사무소에서는 "커뮤니티 아트와 액티비즘"을 주제로 예술행동 연속토론이 열렸다. 그날 저녁, 일행 가운데 몇몇과 오랜 시간 깊이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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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주일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줌의 재로 돌아가던 5월 29일 금요일 오후. 부산 해운대의 삼성해운대연수소 정원 앞에서 "부산비엔날레 10주년, 전환점에서"라는 타이틀로 열린 학술심포지움을 끝낸 참가자들이 일자진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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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줌의 재로 돌아가던 5월 29일 금요일 저녁. 일행들이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나무에 오른 고양이 한 마리를 강선학 선생님이 발견하고는 옛그림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고 말했다. 나는 줌렌즈를 길게 뽑아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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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 고양이는 훌쩍 담장 너머로 사라졌고, 잠시 후 방안의 테레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들어있는 관이 화장장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2009/06/03 22:01 2009/06/03 22:01

자율과 연대의 시대정신과 상호지역주의 예술

critic & column | 2009/05/27 18:09


자율과 연대의 시대정신과 상호지역주의 예술

지역은 물리적 장소를 기반으로 한 삶의 공간이자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는 공공의 영역이다. 지역주의는 해당 공동체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려는 정치적 합의이다. 그러나 지역이라는 낱말은 중심주의 시각으로 왜곡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에게 지역이라는 이름은 중앙으로부터 떨어져있는 변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역주의 개념 또한 오염된 언어여서 폐쇄적인 공동체의 집단이기주의로 지탄받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지역의 가치와 지역주의의 가능성을 제대로 발견한 적이 있는가? 특히 예술영역에 지역 단위의 예술생태를 묶어서 사용하는 ‘지역미술’이라는 말에 예술적 실천을 통해서 지역공동체의 가치를 담아내고자 하는 예술 담론으로서의 지역주의 가치를 담고 있는가? 이 짧은 글은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안적인 예술실천의 사례들을 간략히 언급하면서 지역주의 예술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지역분권 시대의 자율과 연대라는 개념을 지향하는 풀뿌리 문화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수준에서 상호지역주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전지구화 시대의 지역주의 예술
각 도시 별로 대안적인 지역주의 예술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광주의 의제미술관과 매개공간 미나리는 사립미술관과 대안공간의 틀로 지역공동체 속에서 예술생산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좋은 사례로 꼽힌다. 인천의 스페이스빔과 퍼포먼스 그룹 반지하의 프로젝트들은 미술로서 도시공간을 재해석하고 동행하는 실천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안양의 스톤앤워터가 벌이는 안양천 프로젝트는 미술문화를 가지고 지역공동체와 접점을 형성하면서 지역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안산의 커뮤니티스페이스리트머스는 국경없는 마을의 이주노동자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다문화 현장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부산에서는 대안공간반디와 오픈스페이스배가 대안공간의 축을 구축하고 있으며, 복합장르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다원예술매개공간 아지트가 젊은이문화를 거리예술로 끌어내려는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다. 각 도시의 대안공간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움직임은 지역주의 예술운동을 견인하면서 대안공간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주의 예술운동의 전향적인 양상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서로 다른 역할모델을 찾아가고 있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안산의 리트머스나 청주의 하이브, 광주의 대인시장, 부산의 오픈스페이스배 등에서 벌이고 있는 지역주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오브제 중심의 예술노동 교환구조를 변환하는 일과도 연결된다. 소수의 힘있는 콜렉터가 좌지우지하는 미술은 활기를 잃기 십상이다. 아무래도 특정한 취향에 끌려가다보면 종다양성이 쪼그라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개미의 힘으로 꾸려지는 비영리 문화공간을 통해서 지역단위의 미술생태를 재구조화하려는 움직임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도 중심주의 미술문화를 고쳐보려는 생각과 실천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 예술운동의 다양성이야말로 오늘날의 미술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강력한 중심에 포섭되기 이전의 자생적인 문화생태는 단일한 정체성에 의합 통합이기보다는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지역성을 둘러싼 중심주의 사고는 국가체제나 사회현상 전반의 문제이다. 지역미술 운운하는 미술 제도와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을 사고하는 식민주의 관점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일본 제국에서 바라본 식민지 조선의 미술은 일종의 지역미술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향토색 운운하며 당대의 현실에 눈감고 귀닫게 하는 박제화한 지역성이었다. 해방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역미술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알맹이는 없었다. 지역의 예술생태는 자생성을 가늠하기에는 매우 척박한 환경이었다.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는 주류미술의 인정게임에 몸을 실을 기회도 없이 지역 단위의 예술생태는 황폐한 사막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마다 독창적인 풍토색이 담긴 미술형식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도 접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자치와 분권의 가치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지역미술을 그저 변방의 비주류로 여기는 풍토가 남아있다. 지역미술을 둘러싼 외눈박이 낡은 생각을 버려야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다. 지역주의 예술담론이 필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지역주의 예술은 탈중심주의 이슈와 직결된다. 각 지역마다 각기 다른 삶의 정황들을 예술적 의제로 채택하고 예술적 실천으로 현장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프로젝트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벌어지는 예술운동은 단일한 이념 아래서 유사한 양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다. 미술을 양식상의 진보주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20세기 미술사 개념이 종언을 고한 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지역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지 난감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지역주의 미술이 눈떠야 할 대목은 지역단위의 삶의 처소와 대화하는 일이다. 지역주의 예술실천의 첫걸음은 공동체와의 밀접한 협업체제의 구축이다. 그것은 지역거점 예술공간 활동에서부터 공공미술이나 예술행동(activism)의 첨예한 실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한국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동체예술(community art)의 가능성은 지역주의 예술을 견인하는 첨단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문화민주주의를 향한 상호지역주의 예술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폐해 가운데 하나는 노동의 소외이다. 예술노동 또한 두 말할 나위 없이 사회적 교환체계에서 자율성이라는 명목 하에 철저하게 소외된 노동이다. 예술노동의 소외현상을 극복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중심주의 예술이슈를 좇아 국제주의의 미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역공동체의 현안을 다루고 있는 예술의 지역적 실천을 꼽을 수 있다. 다수의 예술가들이 문화권력의 환상에 젖어있다. 삶 전체를 건 그들의 예술노동을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언어게임의 장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성에 입각한 문화적 종다양성은 글로벌리즘의 문화중심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으로서 패권주의를 넘어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이 시대의 좌표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화다원주의 시각으로 활성화한 지역주의 예술생태는 예술가와 비예술가, 생산자와 수용자,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의 관계를 탈경계와 상호작용의 수준에서 재정립하게 함으로써 예술노동의 교환방식을 다양화 한다. 그것은 예술가의 소외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받는 예술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역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중심주의 사유를 탈피하는 것이며, 중앙집중의 일극 체제를 지역분권의 분극 체제로 전환하는 출발점이다. 중앙과 지역, 글로벌과 로컬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집단이기주의나 소영웅주의와는 다른 모습으로 지역단위의 문화생태를 건강한 구조로 이끌어내는 것이 지역주의 예술담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폐쇄성이 아니라 상호성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한다. 지역의 문화권력 재생산 구조에 포획당한 지역주의가 아니라 지역 간 예술적 소통의 기제를 만들 필요가 있다. 거대도시의 문화 정체성을 단일한 문화권으로 묶어서 미술문화 집중공간이나 거대한 미술권력의 작동방식을 상징하는 미술관 중심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가령 홍대앞이나 문래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움직임은 서울을 단일한 중심의 패권주의 미술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편하고 있다. 하물며 이른바 중앙을 중심으로 대상화하는 한 묶음의 지역미술이라는 범주설정은 그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지역주의 담론은 종종 ‘전지구적으로 사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think global, act local)’는 식의 글로컬리즘(gloalism)과 같은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이미 글로벌리즘에 포획된 사유로는 지역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할지가 의문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지역적 사고와 지역적 실천을 견인하는 지역주의(localism) 관점이 필요하다. 글로컬리즘에는 지역과 세계의 상호 연대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전지구화의 위계화 전략이 들어있다. 따라서 지역성과 예술을 새로운 차원에서 담론화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삶의 처소로서의 지역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지역성을 발견하고 예술적 실천의 뿌리를 지역공동체에 두는 ‘지역적 사고와 지역적 실천’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술영역에 있어서의 지역주의는 포착 가능한 삶의 단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상황들에 관해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고 그 속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예술 실천이다.
지역주의 예술은 지역을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다중정체성으로 재발견하게 하는 것이며, 일극의 패권이 아닌 분극의 다중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역주의의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논의가 있다. 상호지역주의(inter-localism) 관점이다. 중심과 주변,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의 이분법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상호성(the inter-)은 지역간 소통에 있어서 중심과 주변으로 고착화한 중심주의 구도를 넘어서는 것이며, 동시에 국가단위 안에서만 맴도는 지역간 소통의 문제를 전지구적 차원의 열린 소통으로 재구조화 하는 지름길이다. 지역 간의 관계를 열린 구조로 사유하는 상호지역성은 폐쇄적인 지역주의 모델을 개방적인 상호지역주의로 새롭게 해석하는 지혜를 요청한다. 상호지역주의 관점은 커뮤니티 안의 예술생태를 하나의 완결체로 인식하는 태도를 기본으로 그것을 바깥과 나누는 상호연대의 철학에서 나온다.
폐쇄적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상호지역주의 담론을 활성화하는 일은 자율(authority)과 연대(solidarity)의 시대정신과 동행한다. 모든 삶의 장소와 풀뿌리 공동체는 평등한 낱낱의 요소이다. 따라서 지역간의 상호 연대는 흩어진 낱개들이 자생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필수 항목이다. 상호지역주의 사유가 필요한 까닭은 개별적인 지역주의 예술실천이 지역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열린 구조 속에서 소통가능성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지구적인 사유 아래 내용과 형식을 통폐합하려고 하는 전지구화 논리와 갈라서는 상호지역주의의 핵심 논리이다. 지역공동체와 동행하면서 문화제국주의적인 힘의 질서에서 비켜서는 것이 상호지역주의이다. 노회한 중심을 해체하고 풀뿌리 문화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담론인 상호지역주의 예술의 이름으로 자율과 연대의 큰 그림을 다시 생각한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월간미술 2009년 6월호 기고문.

2009/05/27 18:09 2009/05/2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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