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식 프로젝트의 가치와 방향성
1. 서론
부산화단의 문을 열고 꽃을 피운 화가 김종식. 부산미술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그의 삶과 예술은 부산화단은 물론 한국 근대화단의 면면을 헤아리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이다. 그는 여하한 시류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식민지 학습기를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이룩한 예술가이며, 중앙과 지방의 차별을 넘어 보편성을 획득한 거장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을 지키며 부산작가로 살다간 예술가 김종식은 근대화단의 선구자로서, 교육자로서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부산의 미술계는 그를 부산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식하고 있다. 토박이 작가로서 부산 근대화단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평생을 부산에 살면서 창작활동을 한 김종식에 대한 정당한 평가이다. 그러나 평가 그 자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일들을 벌이기에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작고 후에 동아대학교와 미술계가 추진한 흉상제작, 주정이 작가 등이 주도한 범어사 앞 기념비 제작 이외의 이렇다할 기념사업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김종식 20주기 심포지움은 이제 충분한 역사적 평가를 거리가 확보된 작가이니만큼 본격적으로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에 대해 연구해서 그 위상을 재정립하는 자리이다.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진단을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실현하고자하는 이번 20주기 심포지움은 토론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길러 올리는 새로운 출발과도 맞물려 있다. 부산지역 화단 안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 또는 동아시에서 근현대를 관통해온 우리 미술은 역사를 재점검 하는 차원의 큰 그림을 그릴 시점이다. 이 글의 목표는 김종식 예술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고 김종식을 기리는 프로젝트의 가치와 방향성을 생각해봄으로써 김종식 프로젝트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폭넓은 토론을 유도해서 향후 100년 이상을 내다보는 계획을 수립하는 물꼬를 트는 데 있다.
2. 김종식의 예술의 가치
김종식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이며,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미술을 학습하고, 해방 이후 부산화단의 생성과 발전에 기여한 근대인다. 그는 동래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유학했다. 부모 몰래 미술을 전공하기로 한 것이 그의 나이 열아홉인 1937년의 일이다. 임완규, 최덕휴, 권옥연, 장욱진 등이 유학 동문들이다. 1세대 유학파 화가들이 돌아와 이른바 서양화가 이 땅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예술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유학 당시 백우회(白牛會) 활동을 했다. 후에 재동경조선미술학우회로 이름을 고친 이 클럽은 3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질 정도로 왕성했는데, 김종식은 후에 한국화단의 주류를 형성한 이들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일제시대 유학생 김종식의 작품은 표현주의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 경향을 보였다.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한 1942년은 징용으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던 때였다. 김종식은 이 위기 상황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해방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공간에서의 김종식은 화단 형성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김종식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 선구자들이 1세대 작가 김원명의 집을 거점으로 음악가와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부산 예술계의 싹을 틔웠다. 해방공간의 김종식은 부산의 풍경과 일상을 그렸다. 특히 그의 유명한 부산항 연작들은 강한 윤곽선과 짙은 원색으로 매력적인 감각을 발산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김종식은 노점상, 판자촌, 귀환동포, 제빙회사 등 동시대 삶의 정황들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부산 풍경과 일상을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간결하면서도 굵직한 김종식 초기 회화의 전형을 창출했다. 해방과 함께 부산화단의 새 장을 열어나가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김종식은 창작과 네트워크를 병행했다. 1946년 동래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김종식 개인전은 '해방감격'을 비롯한 40여 점의 작품으로 이뤄졌다. 당시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김종식은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작품발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냈다. 김경, 임호, 김영교, 김윤민 등과 함께한 토벽 동인 활동은 김종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관념적인 유희에 빠져드는 기성화단의 아카데미즘과 달리 동시대의 삶을 관통하려는 리얼리즘 경향을 보인다. 물론 그가 표현방법에 있어 사실주의 기법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동시대 삶의 지평을 깊이 성찰하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이후 그는 토벽 동인활동을 통해 부산 토박이 화가로서 한 시대의 정황을 읽어내는 미술활동을 모색함으로써 한국근대미술사의 중요한 역사를 만드는 데 동참했다. 1960년대의 김종식은 부산과 양산, 진해, 김해 등으로 교직생활을 하면서 옮겨 다녔다. 그는 1968년 동아대로 옮기면서 부산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여러 도시를 다니며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거친다. 1961년 작 '대결'이나 '갈등'과 같은 작품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그는 추상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단색 화면에 추상적인 형상을 가미한 이러한 화풍은 곧이어 풍경과 재결합한다. 1970년대 들어 청색 윤곽선의 풍경화 연작으로 전환한다. 영도나 태종대, 하단, 통도사, 범어사, 천마산 등 수많은 실경산수를 남겼다. 이전의 검은색 윤곽선이 청색으로 바뀌면서 필선의 자유로운 운율을 가미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풍경화들은 기하학적이면서도 표현적인 패턴이 등장하기도 하고 붓의 운율로 풍경을 그려내기도 했다. 대상을 포착하는 화가의 붓질로 회화 그 자체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실재 대상을 담아내는 재현회화의 틀을 고수한 것이다. 완숙기에 접어든 그는 현실을 초월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화가로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일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고유의 필선과 색채로서 화면을 장악해 들어가는 힘을 가질 때 가능하다. 김종식은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는 아카데믹한 풍경에 빠지지도 않았고 시류에 영합하는 추상미술에 현혹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김종식의 모색과 전환들은 한국 근대화단이 걸어온 여정이며 경계 위의 세계이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한국 화단의 급속한 변화 속도에 비해 김종식은 더딘 발걸음으로 곧게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지속했다. 가령 1955년 작 '빨래'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주조로 형상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면추상의 묘미를 살린 그림이다. 평생을 구상회화 중심으로 작업했던 김종식의 세계에는 이와 같은 의외의 장면들이 종종 들어있는데, '녹심'(1963)이나 '이승과 저승'(1965) 같은 작품은 표현적인 반추상이나 단색평면회화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며, '담벽'(1982) 같은 말년 작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격변의 시대를 거쳐온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서울이라는 중심이 아닌 부산이라는 지역도시에서 활동한 김종식은 평생 그림 그리기 하나만을 위해 살아간 예술가이다.
3. 김종식 프로젝트의 당위성과 관점
김종식은 근대의 콤플렉스를 관통한 거장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부산화단 혹은 한국화단의 콤플렉스들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그는 서구미술의 이식으로 출발한 근대화단의 근본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 근대를 개척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에 이은 일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예술적 열정과 시대적 소명의식 속에서 갈등해야 했다. 또한 부산지역을 지키는 작가로서 중앙화단과의 간극을 넘어서는 일 또한 매우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제국과 식민, 건국과 내전, 중앙과 지방 등과 같은 격변의 세월을 맞이했다. 김종식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가중시키는 이중삼중의 콤플렉스를 맞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김종식의 예술은 부산지역의 미술계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의 미술사적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라는 점을 다시 인식하고 그 위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다각도의 프로젝트를 벌여야 한다. 이제는 김종식을 부산의 대표작가로 언급하기보다는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작가로 부각하여 그의 보편성을 확산해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종식이 부산미술계와 동행한 역사적인 대목에 대해 소홀히 해서는 안된 것이다. 김종식은 한국전쟁 전후에 부산미술을 주도하는 그룹활동을 펼쳤다. 그가 동참한 토벽회는 부산의 지역성과 시대정신을 반영한 성찰의 언어 쏟아낸 그룹이다. 김종식은 김남배의 백양다방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토박이'라는 말을 변형해 '토벽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토벽 동인들의 창립전 서문은 사뭇 장중하다. '회화라는 것이 한 개 손끝으로 나타난 기교의 장난이 아니요, 엄숙하고도 진지한 행동의 반영'이라고 선언한 이 글은 '새로운 예술'이라는 것은 '필경 새로운 자기인식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에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 없고 진실한 민족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 가난하고 초라한 채 우리들의 작품을 대중 앞에 감히 펴놓는 소이가 전혀 여기에 있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문화식민지의 모순과 지방화단의 척박한 환경에 놓인 이들은 회화를 통해서 근대적 지식인의 풍모를 갖춘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진지한 성찰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그 성찰은 부산이야기이며 동시에 민족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종식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가 소원하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김종식 콘텐츠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유화 작품들과 더불어 수만장에 달하는 드로잉은 김종식이 평생을 두고 진행한 거대한 프로젝트이다. '남의 눈으로 남의 붓으로 그리지 말고 자신이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그려야 한다'. 그의 제자인 이용길이 전언한 김종식의 말이다. 김종식은 '그림 그리는 기교가 아니라 그림 그리는 태도를 가르쳤다'고 이용길은 말한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화가로서의 태도는 그의 평생을 지배한 '그리기의 숙명'을 통해서 관철되었다. 김종식은 끊임없이 손을 움직인 화가로 유명하다. 6백여권에 달하는 그의 스케치북은 평생 그림 속에서 살다간 치열한 화가의 길을 증거하고 있다. 1988년 영면의 길에 접어든 이후 그는 평생을 부산을 지키며 살아간 존경받는 예술가로 남아있다. 그의 신중하고도 강건한 풍모를 흠모한 많은 미술인들은 거장의 향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평생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선을 그었다. 그 많은 콘텐츠를 가지고도 그를 널리 알리지 못한다면 이는 김종식 유산을 이어받은 부산미술계 전체의 문제일 것이다.
김종식 프로젝트의 당위성은 상호지역주의 관점에서 김종식의 가치를 부산지역 바깥과 공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데 있다. 김종식의 타계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부산지역의 대표작가로 언급하고 내부적인 합의를 만드는 데는 큰 이견이 없지만 그 바깥과의 교류를 통해서 김종식을 알리는 데 대한 노력이 부족했다. 이것은 부산미술계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한국미술계 전체의 소통 시스템 부재에는 오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말 그대로 ‘김종식을 높이는 일은 부산미술을 높이는 일이다’. 김종식을 다시 세우는 일은 부산미술을 다시 세우는 일이며, 그에 관한 역사를 제대로 쓰는 일은 부산미술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 김종식 프로젝트는 예술적 관점의 지역주의를 제대로 세우는 데 기여할 것이다. 부산이라는 도시 공동체가 지역성을 드러내는 김종식 예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예술전략이야말로 중심과 주변, 중앙과 변병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극복하는 지름길이다. 궁극적으로 김종식 프로젝트는 ‘지역적 사고와 지역적 실천(think local, act local)을 견인하는 예술전략’으로서의 지역주의를 역사적 관점에서 실행에 옮기는 프로젝트이다.
전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think global, act local)는 언명은 지역과 지역의 유기적인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중심주의가 숨어있다. 여전히 전지구의 중심권력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패권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성을 성찰하는 예술, 지역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지평 속에서 예술적 실천을 가늠해온 성과들에 대해 집중함으로서 우리는 예술 영역에 있어서 ‘지역적 사고와 지역적 실천’을 강조하는 새로운 전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적 실천의 맥락에서 지역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예술 자체가 이미 주류질서의 중심권력과는 다른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예술계가 예술계로 성립하는 순간 이미 그 계에 종사하는 예술생산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으로 자리한다. 예술생산자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정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적은 게 사실이다.
중심주의의 패권적 사고를 추종한다면 예술생산이라는 소외영역의 생산은 그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지역주의가 중요한 것 이와 같은 맥락이다. 중심도시가 아닌 도시에서 중심도시의 패권을 한 숨에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방식의 판짜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지역주의 관점이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상황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해서 예술적 실천의 맥락으로 끌어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동시대의 예술계가 취하는 보편주의 방식의 패권지향적 흐름을 쫓아가기 보다는 그 질서와는 다른 맥락의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예술적 실천이 중요한데, 그 가치 지향의 중요한 맥락이 지역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김종식 자신이 부산이라는 도시를 평생 삶의 단위로 삼으면서 부산을 세계 그 자체로 인식하고 살아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부산을 그렸고 부산을 이야기했으며 부산예술가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예술생산이 부산의 삶의 정황과 사건과 풍경들을 토대로 했으며 그것으로 세계사적 보편을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도 김종식 예술은 지역주의 관점의 중요한 유산이다.
3. 김종식 프로젝트의 방향성과 가능성
미술의 개념과 관행, 제도 등이 일정한 인적 구성과 결합하여 형성되는 것이 미술계이다. 김종식 프로젝트의 출발점에 부산의 미술계가 있다. 부산미술계가 지금까지 행해온 김종식 프로젝트는 매우 간헐적인 것이었지만 그 진정성과 헌신성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이 부산의 대표작가로 김종식을 꼽는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제 그 합의를 바탕으로 한층 더 체계적인 김종식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 행보의 중심에 부산미술계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네트워크의 폭을 넓혀야 할 것이다. 미술계의 외연을 문화계 전체로 넓히는 시각의 확장이 필요하다. 가령 부산지역 문단을 대표하는 요산 김정한의 경우 부산문학계를 넘어 한국문학계 전체에서 언급되는 중요한 작가이다. 문학계와 미술계의 네트워크가 김종식 프로젝트를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네트워크가 이루어지는 틀일 것인데 그런 점에서 <김종식프로젝트추진위원회>와 같은 단체가 성립한다면 반드시 그 외연을 범미술계는 물론 범문화계의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부산미술계가 성장하고 부산문화계가 튼튼해지는 지름길일 것이다.
문화계뿐만 아니라 정관계를 비롯한 각계각층과의 네트워크를 실천해야 한다. 네트워킹은 막연한 추상개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실천 개념이다. 폭넓은 네트워크를 얻기 위해서 발로 뛰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김종식 프로젝트를 부산의 문화정치로 직결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작고 작가를 한 지역의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프로모션한 사례는 매우 많다. 제주도 서귀포시의 경우 이중섭이 잠시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여 이중섭미술관을 만들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양구군의 경우에는 그 고장 출신인 박수근미술관을 설립했다. 광주의 경우 시립이 아닌 사립의 형태지만 의제 허백련을 기리는 의제미술관이 있어 광주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부산의 경우 김종식 미술관을 추진함으로써 부산의 문화브렌드를 높이는 문화정치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부산시 차원의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중구 차원의 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중구는 김종식의 작업실이 있던 지역의 관할 구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지금은 폐쇄되어있기는 하지만 김종식 작업실은 남장기념관으로서 그의 작품과 유품을 보관하던 곳이다. 그곳을 되살려 문화공간으로 만든다면 김종식 프로젝트의 핵심사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남장기념관 인근인 대청동은 부산우체국 뒤편의 40계단이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있으며 점점 쇄락해가는 인쇄골목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유휴공간을 활용한 도심재생이라는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부산시와 중구청의 협업으로 이 장소를 김종식 거리로 지정하고 남장기념관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나아가 그 건물을 중심으로 김종식미술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구상해볼 수 있다.
남장기념관을 신개념 문화공간으로 재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관점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우선 남장기념관 주변공간을 두루 통섭하는 신개념 문화공간으로서의 목표지향을 설정할 수 있다. 신개념 문화공간들은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관람객들에게 감성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물질기반의 시각 정보 소통 공간일 뿐만이 아니라 예술 생산과 매개, 나아가 향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담론을 유포하고 토론하며 격렬하게 논쟁하는 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들 공간은 아카데미를 열고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며 온라인 공간을 활성화하는 등 공간의 개념과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하고 있다. 정보와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은 미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전시공간 개념까지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남장기념과 프로젝트의 두 번째 정책기조는 남장기념관을 원도심의 문화생산 전초기지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신개념 문화공간을 추동한 또 하나의 모티프는 장소 특정성을 넘어서는 의제 특정성의 발견에 있다. 광주에서는 대인시장 인근의 창고 공간을 개조해서 새로운 개념의 미술문화공간을 여는 일이 진행 중이다. 광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와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이 공간은 인근 시장을 중심으로 도시공간 자체를 대상으로 문화생산에 직접 개입하고 참여하는 장소특정적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인천의 스페이스 빔 또한 유휴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공간을 옮기면서 새로운 문화생산 기지로 상승무드를 타고 있다. 안양의 대안공간 스톤앤워터는 대안공간들 가운데서도 해당 지역의 장소특정성(site specific) 뿐만 아니라 의제특정성(issue specific)을 살린 대표적인 공간으로 손꼽힌다. 해당 지역의 생생한 이슈를 발굴하고 예술적 실천의 목표로 설정하며 예술생산과 매개, 그리고 향유의 과정을 공유해 나가는 과정은 진화하는 미술문화생산이다.
셋째로 고려해 볼 만한 것은 남장기념관 주변 공간들을 레지던시 프로그램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주변 공간이 인쇄골목으로서의 효용성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발상이다. 유휴 공간 재활용 논의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작업실 담론의 활성화 또한 신개념 문화공간을 견인하는 중요한 모티프이다. 수년전부터 담론 수준에서 꾸준히 대안을 모색해오던 작업실에 관한 논의가 실질적인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작업실 담론의 여파는 전시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던 미술문화공간의 개념을 크게 뒤바꿔 놓고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미술문화공간을 향유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문화생산을 매개하는 기관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공기관의 문화정치도 예술생산을 담보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광역지자체와 기초단체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문화예술정책을 펴고 있다. 도심의 유휴공간을 활성화하여 예술의 생산과 향유를 매개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부산시와 중구청은 중구의 원도심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예술재생 프로젝트를 벌일 필요가 있겠는데, 이때 남장기념관은 중요한 구심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곳곳에서 태동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나 소규모 공간의 활성화, 미술시장의 다각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증대 등과 같은 현상은 탈근대 개념과 직접적으로 조우한다. 단일한 장르나 공간의 고립과 자폐로부터 벗어나 다차원적인 문화생산을 매개한다는 점, 이에 따른 자본의 이윤창출 방식도 단일성으로부터 복합성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 예술생산을 개별 예술가들의 것으로 방기하지 않고 적극적인 교류와 새로운 문화생산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 등 이 모든 것들이 단일한 것으로부터 다차원적인 것으로, 자족적인 것으로부터 상호적인 것으로, 닫힌 것으로부터 열린 것으로, 분화로부터 탈분화로 전환하려고하는 탈근대의 맥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탈근대적인 맥락의 통합의 정치학은 문화공간의 변화를 읽어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미술문화 내부에서도 통합의 맥락은 마찬가지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 생산과 향유를 분할하는 공간 배치, 생활공간과 예술향유공간의 엄격한 구분, 고급예술과 하위문화를 둘러싼 계층 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추세이다. 이러한 추세를 감안해서 김종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장기념관과 그 주변 공간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여론을 구체적인 실행 프로젝트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4. 제언
결론을 대신하여 몇 가지 제언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종식 프로젝트를 위하여 연구하고 구상해야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그 기초연구와 네트워크 구상을 위한 초석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작품의 수집과 보존을 통해서 김종식의 유산을 부산시민의 유산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보다 체계적인 학술활동을 벌여서 김종식을 부산미술계를 넘어서 한국미술계의 중요작가로 등재하고 근대미술사 연구의 맥락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는 데 심혈을 기울여할 것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김종식 전작을 가늠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를 열어서 제대로 된 도록을 만들고 전작의 면면을 미술인과 시민들이 체험하도록 하는 일이다. 나아가 부산 지역 바깥의 다른 도시에서도 김종식 전을 열어서 그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할 필요가 있다. 부산미술협회의 역할 또한 크다. 수천명에 달아는 미협회원들이 김종식의 가치를 앎으로써 역사적인 맥락 위에서 예술가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학계 또한 같은 맥락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며, 특히 교육계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부산지역의 미술을 소개함으로써 그들이 부산미술의 생산을 독력하고 후원하는 뿌리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화랑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한 작가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미술시장의 교환가치는 매우 큰 가늠자 역할을 한다.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음으로서 작품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김종식 프로젝트의 저력이 탄탄해 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 화랑과 경매 등 다양한 방식의 시장 프로모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범미술계와 범문화계, 나아가서 각계각층이 집결한 김종식프로젝트추진위원회 꾸려서 체계적인 사업을 준비하는 것이 첫 단계의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작고 20주기를 보내면서도 체계적인 기념사업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은 우리 부산미술계가 부산의 대표작가로 김종식을 꼽고 있다는 점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다. 기념사업회가 있어서 김종식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을 벌일 수 있다. 김종식학술대회를 꾸리거나 김종식미술상을 제정해서 진행하는 일을 추진할 중심축 역할이 절실하다. 미술상은 작가에게 주는 창작상과 김종식 연구논문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상을 동시에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김종식에 관한 연구가 미비하고 비평과 이론의 풍토가 부족한 부산미술계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김종식 화집과 단행본 출간 또한 시급한 사업이다. 막대한 분량의 드로잉집에 실린 그림과 글들은 출판물로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은 사업이다. 남장기념관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미술관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그 공간 주변과의 긴밀한 문화정책적인 프로젝트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부산미술계와 시민사회의 합의를 조율하고 실행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중심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20년동안 부산미술계가 김종식의 대표작가로 인식하는 데 합의해왔다면 앞으로의 일은 그 합의를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실천하는 일이다.
김준기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김종식 20주기 심포지움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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